[월드컵 人터뷰14 -이회택上] 70년대 아시아의 스트라이커!
대한축구협회(KFA) 홈페이지에서는 DAUM과 공동 기획한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는 내년 6월까지 격주로 게재합니다.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과 대표팀 경기의 홍보를 위해 국내 최대 인터넷포털 운영사이자 KFA 공식후원사인 DAUM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하는 홍보 프로그램으로서 한국축구의 국민적 붐 조성을 꾀하고자 하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월드컵과 관련된 인물들이며, 현 대표팀 선수들을 비롯해 추억의 스타, KFA 행정인, 역대 월드컵대표팀 감독 등이 릴레이 인터뷰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특히 KFA 및 DAUM 홈페이지를 통해 축구팬들의 질문들도 수렴해 궁금한 점들을 해소시켜드립니다. 인터뷰는 KFA 홈페이지와 DAUM 홈페이지에 기사와 동영상으로 게재됩니다.
14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70년대 한국축구를 대표했던 스트라이커이며,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대표팀을 이끌었던 '그라운드의 풍운아' 이회택 KFA 부회장(64))입니다. 이 부회장은 동북고와 석탄공사, 양지, 한양대, 포항제철(현 포항)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1966년 대표팀에 선발되어 77년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활약했습니다. A매치 통산 72경기에 출전해 21골을 기록했으며, 무엇보다 시원스런 돌파와 슈팅으로 보는 이를 통쾌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1979년에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한양대와 포항 감독을 거쳐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감독으로 대표팀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후 전남 감독으로 재직했고, 현재는 KFA 부회장 겸 기술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특집 인터뷰 14번째 주자로 인터뷰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월드컵에 눈앞으로 다가와 여러모로 바쁘실 텐데,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요?
일단 대표팀이 남아공 월드컵에서 1차 목표인 16강에 가기 위해 기술위원회와 기술교육국이 중심이 되어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구상하고 있지.
곧바로 예전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하신 것이 고교 때라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늦게 축구를 시작하신 셈인데요.
내가 어렸을 때는 6.25 전쟁이 끝난 후라 놀이라는 것이 없었어. 내가 살던 곳이 김포였는데, 당시에는 벌판이었지. 거기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녔는데, 축구부가 없었어. 당시에는 농번기에 들어가기 전에 동네 어른들이나 청년들이 축구를 많이 했거든. 나도 거기에 껴서 동네축구를 많이 했지.(웃음)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생 선배들과 같이 축구부 만들어서 조금 차다가 고교 1학년을 마치고 이제 본격적인 축구 선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내가 부모님이 안 계셔서 할머니와 살았는데, 할머니께 서울 가서 축구해야겠다고 말씀드렸지. 사실 그 때는 먹고 살기 정말 힘들 때인데, 서울 가면 하숙도 해야 하고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많았거든. 그럼에도 고비를 넘기고 서울로 가게 됐어.
한양공고와 영등포공고를 거쳐 동북고에 가셨습니다. 복잡한 과정이셨는데요.
처음에는 친지가 소개해준 한양공고에 갔지. 거기서 1주일 정도 훈련했는데, 정식으로 축구를 했던 것이 아니니까 특별한 기술이 없잖아. 그래서 축구부에서 나와야 해서 고향에 내려갔어. 그 와중에 4년 정도 선배인 백원기 씨라고 있어. 배재고 백현영 감독의 작은 아버지인데, 이 분이 영등포공고를 나오셨거든. 그래서 나를 소개시켜줬어. 그래서 영등포공고에 가서 5개월 정도 뛰었지. 이 때가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때라고 할 수 있어. 그 때 처음으로 축구협회 등록 선수가 되어서 경기에 나섰는데, 예상 외로 아주 잘했지.(웃음)
그것을 보고 동북고에서 오라고 해서 다시 학교를 옮겼어. 당시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 영등포공고 학생도 아니고, 그냥 축구부에만 등록해서 경기할 때였거든. 그래서 학교를 옮기는데 큰 지장이 없었지. 다만 그 때가 7~8월 정도 되었는데, 다음 해부터 경기에 나설 수 있었지.
결국 한양공고에서는 가능성이 없다고 쫓겨난 셈인데, 한양공고 입장에서는 아쉬웠겠네요?(웃음)
그 당시 영등포공고는 선수가 부족했던 반면, 한양공고는 각 지방에서 50~60명이 올라와 테스트 받을 때였어. 나는 빠르긴 했지만, 축구를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눈에 들어오기 힘들었겠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3~4개월 후에 영등포공고 선수로 동대문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는데, 내가 누비고 다녔거든.(웃음) 전국선수권에서 2경기를 뛰었는데, 4골을 넣었어. 부산상고에게 2-0으로 이길 때 내가 다 넣었고, 최강이었던 한양공고를 꺾고 올라온 광주상고를 상대로도 2-0으로 이겼는데, 내가 다 넣었지.
그 때 부산상고전에서는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는데, 아마 다들 깜짝 놀랐을 거야. 시골에서 논 메고 밭을 갈던 놈이 와서 2골을 넣은 거니까...그 때 운동장 사정이 열악해서 발목까지 빠지고 그랬는데, 힘과 스피드가 있어서 2골을 넣었던 거지. 다음 날도 마찬가지이고...그 시절은 지금처럼 수비 조직이 강할 때가 아니라서 스트라이커가 중앙 수비수만 제치면 골키퍼와 맞서던 때였어. 그 이후에 동북고로 가게 됐지.
이 시절에는 어떤 선수를 모델로 삼고 정진하셨는지요?
그 당시에는 대표팀에 조윤옥, 정순천 선수 등 대단한 선수들이 많았어. 그런데 일단 첫 번째 목표는 김기복 선배였어. 1년 위 선배였는데, 내가 동북고에 가니까 김기복 선배가 청소년대표팀에 갔다와서 대표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더라고. 그걸 보니까 부럽기도 하고, 내가 이 산을 넘어야 큰 선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 그래서 김기복 선배를 목표로 훈련을 했지.
당시에는 축구밖에 몰랐던 때라 아침부터 밤까지 축구공과 붙어살다시피 했어. 결국 다음 해 봄에 전국대회에 나가면 내가 골을 많이 넣고, 최우수선수상도 받고 그랬지. 당시에는 축구가 단순해서 그 팀의 공격수가 얼마나 잘하느냐가 제일 중요했는데, 나는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지.
정식 축구선수가 된 지 2년 만인 1965년에 청소년대표팀에 발탁되어 AFC U-19 챔피언십에 나가시게 됐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은데요. 그야말로 선천적인 재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웃음)
천재라는 것보다는 하늘이 도왔던 것 같아. 순발력 같은 부분은 훈련해서 되는 것이 아니거든. 체력이나 순발력 등은 타고난 부분이 있었지. 사실 동북고에 다닐 때 전국대회의 절반은 우승했고, 그 팀의 주전 공격수였으니까 청소년대표팀에는 뽑힐 거라 생각했었어. 그런데 아시아대회 나가서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어.
1966년에는 아시안게임에 나가는 A대표팀에 선발되셨어요. 이것은 의미가 컸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대표 선수가 되는 것은 내 꿈이었으니까...
그 시절에 다른 꿈이 있겠어. 첫 번째도 대표, 두 번째도 대표 선수가 되는 것이었지. 모든 것을 거기에 걸었다고 봐야지. 66년 10월에 태국 방콕에서 아시안게임이 있었는데, 그 때 대표팀이 새롭게 바뀌었거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대표팀이 변화를 준 것이었지. 나로서는 축구 시작한 지 3년 만에 대표팀에 들어간 거지. 그리고 67년에 메르데카배에 나가서 우승하고, 아시아 올스타에도 뽑히면서 3~4년 사이에 얻을 것은 다 얻었어.
동북고를 졸업하실 무렵에는 연-고대를 포함해 여러 대학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셨던 걸로 압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성균관대에 입학했고, 2달 만에 다시 학교를 그만두셨어요. 여러 복잡한 사연들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복잡했지. 각 대학에서 데려가려고 난리가 났었고, 연-고대는 동기들을 모두 받아 주겠다고도 했으니까...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면 복잡했어. 내 고교 시절 스승님이 중앙대로 가셨다가 성균관대로 옮기시면서 나를 데려가려고 하셨거든. 그래서 성균관대로 가기로 했는데, 도저히 안되겠더라고. 그래서 석탄공사로 갔지. 거기에 선배가 하나 있었는데, 1년을 뛰고 대학으로 간다는 조건을 내걸고 입단한 거야. 그렇게 1년을 뛰고 나를 데려가려고 적극적이었던 연세대에 입학하려는 순간에 문제가 생겼지.
66년에 북한이 런던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거든. 그것을 보고 박정희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의 김형욱 부장이 '우리도 한번 국가적으로 축구팀을 키워보자'라고 결심했던 거야. 그래서 중앙정보부에 '양지'라는 이름의 축구팀이 만들어졌지.
당시 나는 연세대 입학을 2주 남겨놓은 시점이었는데, 나이가 있어서 병역기피자가 되버렸던 거야. 그래서 중앙정보부에서 강제로 입대를 시켜서 양지에서 데려갔던 거지. 결국 양지에서 3년을 보내고, 이후에 한양대로 입학하게 됐어.
이 때의 양지 팀은 어떻게 보면 단일팀으로는 역대 최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모두 대표 선수들 아니었습니까?(웃음)
그렇지. 최강팀이었지. 대표팀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축구라는 것이 묘해서 한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임하면 우승을 하는데, 목표를 달성하고 나서는 허무해지거든. 그러다보면 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다른 팀에게 당하는 거야. 어쨌든 그 때는 해보자는 마음만 생기면 무조건 우승했을 때였지. 내가 조금 축구를 하긴 했는지, 고교 시절부터 쭉 돌이켜보면 마음 먹고 열심히만 하면 우승하고 그랬던 것 같아.(웃음)
그 무렵이 기량 면에서 최고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요. 당시를 회상해보신다면.
사실 그 무렵에는 희망이 없었어. 처음에 서울 올라와서는 청소년대표팀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 이후에 대표팀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 아시아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거든. 그런데 이런 것들을 다 이루고 나니까 허무해지더라고. 지금처럼 프로팀이 있었다든지, 해외에 나갈 수 있었다면 새로운 목표를 두고 했을텐데,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지.
그래서 68년 무렵부터는 거의 축구반, 노는 것 반이었던 것 같아. 지금도 제일 아쉬운 것은 그것밖에 없어. 그 때 좀 더 열심히 했으면 하는 마음...
그래도 하늘이 축구선수를 좀 더 하라고 그러셨는지 술은 전혀 못했어. 아마 술까지 마셨다면 22~23세에 축구 선수 접었어야 했을 거야. 지금은 소주 1병 정도는 마시지만, 당시에는 2잔 이상을 못 마셨지.
어쨌든 그 무렵에 부모가 계셨다든지, 옆에서 나를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좀 더 멋진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 아쉬움이 크지.
그러고 보니 양지 팀 시절 너무나 좋은 환경과 대우를 받았던 것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고 밝히신 적이 있습니다. 축구에만 전념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후회가 크신 것 같은데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중앙정보부는 최고의 권력기관이었거든. 무서운 것이 없었지. 사실 대학 1~2학년이면 그 또래와 어울려야 하는데, 6~7년 위 선배들과 어울리다보니까 어른들이 하는 것을 다 따라한 거지. 또 선배들이 내가 하는 짓이 귀여웠는지 나를 꼭 데리고 다녔거든. 그 시절에 내가 대학에 가서 좀 더 충실하게 생활했다면 더 좋은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
실제로 올드 축구팬들의 경우 이회택 부회장님이 지금 선수들처럼 생활하면서 동기부여만 잘 되었다면 해외에서도 충분히 통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을 하곤 합니다.
당시에는 해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어. 우리가 1969년에 3개월여 동안 유럽에 가서 친선경기를 한 적이 있었어. 그 무렵에 독일 출신의 크라우천이라는 지도자가 대표팀을 지도한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을 통해 독일의 2부리그 팀에서 보고 싶어한다고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어. 그러나 당시 나는 양지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갈 수도 없었지.
1967년에는 일본에서 멕시코 올림픽 아시아예선에 치러졌는데, 홈팀 일본과 3-3으로 비기면서 골득실로 본선 진출에 실패하셨습니다. 그 경기에서 1골 넣기도 하셨지만, 박진감 넘치는 경기였다고 들었는데요.
당시에 일본이 필리핀과 첫 경기를 치렀었는데, 15-0으로 이겼어. 필리핀이 대회에 잘 나오지 않는데, 그 대회에서는 나왔거든. 첫 경기여서 그런지 공격도 하려고 하다가 15골이나 실점했지. 그런데 우리와는 예선 마지막 경기였는데, 필리핀 선수들이 자기 진영에서 나오지를 않는 거야. 우리도 골키퍼 빼고 10명이 상대 진여에 있고, 필리핀 선수들 11명은 자기 골 에어리어 안에 버티고 있으니 골이 잘 안들어갔던 거지. 그래서 결국 5-0으로 이겼어.
일본전은 필리핀과 하기 전에 했었는데, 당시에는 일본이 최고의 멤버였지. 아마 지금까지 다 합쳐도 멤버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당시가 최고였을 거야. 경기 전 예상도 우리가 0-3으로 진다고 그랬었거든.
실제로 경기 시작하고 나서 0-2로 지고 있었어. 속으로는 진짜 3골 이상으로 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런데 후반 시작하자마자 2골을 따라 붙었어. 나와 허윤정 씨가 투톱이었는데, 허윤정 씨가 먼저 1골을 넣고 내가 동점골을 넣었지. 그러다가 나중에 1골을 허용하고, 다시 허윤정 씨가 골을 넣어서 3-3이 되었어.
그리고 경기 종료가 1분도 안 남았을 때야. 김기복 선배가 상대 센터백이 치고 나오는 것을 끊었어. 그리고 치고 들어가면서 그대로 슛을 시도했지. 나는 쇄도했고. 그런데 그 볼이 골대 맞고 나왔어.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쇄도하던 내 키를 넘어갈 정도였어. 그리고 경기가 끝났지. 그것만 들어갔으면 우리가 멕시코에 가는 건데 말이야.
돌아보면 우리는 올림픽과 월드컵 모두 아쉬운 장면이 많았어. 충분히 갈 수 있었는데,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지. 당시만 해도 전술적인 면이나 여러 면에서 부족한 것이 많았고, 지금처럼 선진축구를 받아들이기 힘들 때였고...
결국 한국을 누르고 올라간 일본이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고, 이 때의 심정은 어떠셨나요? 부러움과 아쉬움이 공존했을 것 같은데요.
그 일을 생각하면 항상 아쉽지. 지금도 도쿄의 그 운동장에 가면 생각이 나. 골대가 진동했던 장면도 생생해. 앞서 말했지만 이런 경우가 많았어. 1971년에 있었던 뮌헨 올림픽예선에서도 말레이시아에게 졌거든. 질래야 질 수 없는 팀이었는데 졌어. 전원 수비하다가 한번 역습했던 것이 골로 연결된 거야. 69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도 호주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1-1 동점이었는데, 마지막에 페널티킥까지 얻었는데 임국찬 선수가 놓치면서 탈락했고...
어쨌든 월드컵이든 올림픽이든 70~80%는 가는 듯 보였는데, 마지막에 10~20%가 부족해서 못 갔어. 결국 선수 시절에는 한번도 본선 무대를 못 밟았지. 지금처럼 몸 컨디션을 꾸준히 조절하고 그랬으면 충분히 가고도 남는 실력이었는데, 많이 아쉽지. 당시에는 봄에 대회 치르고 쉬다가 여름에 대회 치르고, 또 쉬다가 가을에 대회 치르고 그랬으니까. 지금처럼 꾸준히, 집중력 있게 훈련하고 몸 관리를 하지 못했어.
결국 나중에 감독으로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나갈 수 있었고, 단장으로 2006 독일 월드컵과 2008 베이징 올림픽을 갔다올 수 있었지.
당시 라이벌이었던 스트라이커 가마모토 쿠니시게는 멕시코 올림픽에서 득점왕도 차지했습니다. 부회장님이 생각하는 가마모토는 어떤 선수였나요?
모든 것을 갖춘 선수였어. 키도 크고, 힘도 좋았지. 대신 나는 순발력이 엄청 좋았어. 그러나 크게 보면 가마모토가 더 잘했다고 봐야지. 올림픽에 가서 동메달도 따고 그랬으니까. 사실 그 시절에는 내가 승부욕이 강해 인정을 하지 않았지. 아마 루니가 온다해도 인정은 못했을 거야.(웃음)
1969년에는 양지 팀이 105일 간의 유럽 전지훈련을 떠났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인데요. 100일이 넘는 해외 전지훈련이라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당시를 회상해보신다면.
당시 동남아에서 1달을 보냈고, 이후 유럽을 돌았지. 100일 원정이라고도 불렸는데, 너무 힘들었어. 일단 태국으로 가서 군인선수권에 출전했고, 이후에 라오스, 미얀마 등을 돌았어. 그리고 그리스로 가서 군인선수권에 참가하고,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을 쭉 돌았지. 올 때는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등 우리와 외교적으로 활발하지 않았던 나라들을 다 돌았지.
그 때 우리 선수들이 유럽에 처음 간 것 아닌가요? 무엇을 보고 느끼셨나요?
사실 해 볼만 했던 것 같아. 우리가 단일팀으로 갔기 때문에 상대도 대표팀이 아니었지만, 1부리그 팀들과도 경기를 많이 했거든. 프랑스에 가서는 마르세이유, 메스 같은 팀들과도 경기를 했지만, 해볼 만 했어.
이러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70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결국 양지 팀은 1970년에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해체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내가 70년 6월말에 제대였는데, 4월인가 5월에 해체되었던 걸로 기억해. 그 때 중앙정보부장으로 새롭게 김계원 씨가 왔어. 그 시절에는 축구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야 팀이 운영되는데, 그 분은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 그래서 중앙정보부에 악단이 생기고 축구팀은 해체됐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 그 이후에 나는 해병대로 복귀해서 잠시 있다가 제대했지.
이전에도 67년에 메르데카배에서 공동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었지만, 1970년에는 단독 우승을 차지하셨고, 귀국 후 카 퍼레이드까지 벌어졌습니다. 당시의 메르데카컵은 대단한 대회였나 보네요.
그 시절에는 그것밖에 모를 때였으니까...(웃음)
유럽에는 군인선수권 원정 갔다 온 것밖에 없었고, 주로 메르데카배, 킹스컵, 박스컵 등의 국제대회에 나갔고, 70년에는 아시안게임에서도 우승을 차지했었지.
1970년 포르투갈의 명문 벤피카가 한국에 내한했을 때 슈퍼스타 에우제비오도 왔습니다. 당시 국가대표 1진 청룡과 1-1로 비겼는데요. 그 경기에서 에우제비오와 이회택 부회장님이 1골씩 넣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에우제비오와 함께 뛴 느낌은 어땠는지요?
에우제비오는 정말 훌륭한 선수였어. 한 장면, 한 장면이 대단했지. 경기를 뛰면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동작들이 아름다웠어. 그것은 72년에 온 펠레도 마찬가지였어. 먼 길을 왔으니 그 선수들이 컨디션이 100%도 아니었을 거잖아. 그런데도 동작 하나 하나가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어. (1972년에는 브라질의 명문 산토스와 함께 펠레가 내한했다. 이날 경기에서 청룡은 2-3으로 졌고, 펠레가 1골, 이회택 부회장과 차범근 감독이 1골씩 넣었음. -편집자 주)
그렇다면 조금 어려운 질문이지만, 부회장님이 보시기에 펠레와 마라도나 둘 가운데 누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시나요?(웃음)
마라도나와는 직접 뛰지는 않았는데, 둘 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잖아. 비슷한 수준이지. 그래도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전체적인 면에서 펠레가 낫지 않나 싶어. 펠레는 드리블, 슈팅, 패스 등 모든 것을 겸비했거든. 황제 소리는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니지.
74년을 끝으로 한동안 대표팀에서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부상이 심각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부상 때문에 경기에 못 나간 것도 있고, 협회에서 쉬라고 해서 안 뽑힌 적도 있고 그래. 그런데 당시에 협회에서 뽑기 싫어도 안 뽑을 수 없었던 것이 팬들이나 매스컴이 왜 나를 안 뽑냐고 아우성이었거든. 또 나가면 잘하기도 했고...아마 협회에서도 갈등을 많이 했을 거야.(웃음)
1977년에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앞두고 다시 대표팀에 복귀하셨습니다. 오랜만의 대표팀 복귀였기에 감회가 새로우셨을 것 같은데요.
77년에 최정민 감독 시절에 다시 뽑혔지. 그런데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어. 어느 정도 조절을 하면서 훈련을 했어야 하는데, 너무 오버웍을 했거든. 당시에 내가 대표팀에 늦게 합류했고, 전부 후배들이어서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수 있기 때문에 오버웍을 했던 것 같아. 그리고 내가 긴장하면 잠을 잘 못자거든. 그 날은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밤을 꼬박 새우고 나갔어. 그러니 뻔하잖아. 잘 뛰지도 못하고, 전반 끝나고 교체되었지.
그 경기가 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예선 이란전이었는데요. 말씀대로 전반만 뛰고 교체되셨고, 이후에는 대표팀에서 더 이상 모습을 볼 수 없었어요. 당시 교체에 불만을 품고 축구화를 집어던지셨다고 들었습니다.(웃음)
그건 아니야. 축구화를 바닥에 한번 쳤던 거지 던지긴 뭘 던져.(웃음)
어쨌든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은 끝났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잘못했던 것 같아. 어느 감독이 중요한 월드컵 예선에서 잘하고 있는 선수를 교체하겠어. 잘못하니까 그런 거지. 과장되어서 소문이 나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해서는 안될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많은 팬들이 70년대 초중반 대표팀이 개개인의 능력 등을 봤을 때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뭐 그 때 선수들이 지금보다 잘했겠어. 다만 최고 수준이라기보다는 그 때는 개개인의 특성이 있었어. 누구는 패스가 좋다, 누구는 크로스가 좋다, 누구는 드리블이 좋다 등등...
지금은 체격도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고, 모든 부분에서 조금씩 다 갖췄지. 그런데 개인의 특성은 부족한 부분이 있어. 자기만의 특성을 갖고 있어야 해.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많이 좋아졌어. 체격도 좋아졌고, 어릴 때부터 축구를 해왔지. 나만 해도 고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잖아. 어쨌든 월드컵 4강까지 올라간 선수들도 있으니까 우리보다 낫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인정받으셨지만,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무대에는 나서지 못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한 아쉬움이 정말 크실 것 같은데요. 여러 고비 중에서 가장 아쉬웠던 경기를 꼽아주신다면.
아무래도 68 멕시코 올림픽 아시아예선에서 일본과 3-3으로 비긴 경기가 가장 아쉽지. 특히 종료 1분 전에 골대 맞고 나오면서 이길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으니까...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 경기가 생각이 많이 나.
70년대를 대표했고, 한국축구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으셨지만, 후대에 이르러서는 차범근 감독님으로 인해 조금 가려진 느낌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신지요?
사실 대표팀에서 포지션은 조금 달랐어. 나는 스트라이커였고, 차범근 감독은 라이트 윙이었으니까.
그리고 내 경우 73~74년 무렵부터는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차범근 감독은 36~37세까지 현역에서 뛰었잖아. 그것은 차 감독이 독일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야. 만약 차 감독도 국내에 있었다면 그렇게까지는 못했을 거야.
어쨌든 차 감독은 당시 유럽에서도 최고 리그였던 분데스리가에서 98골을 넣었잖아. 정말 대단한 기록이지. 유럽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잘 알지도 못하던 시절에 맹활약을 펼친 것이니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팬들도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야. 나와 비교할 수 없지.
무엇보다 차 감독은 항상 성실했어. 지성이나 영표도 마찬가지지만, 차 감독은 정말 성실했거든. 지금 해외에 나가 있는 선수들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해. 유럽에 간다고 기량이 늘면 얼마나 늘겠어. 문제는 경험과 요령, 자기 관리야. 그 때부터는 사생활과의 전쟁이지. 얼마나 차 감독처럼 성실하고 착실한 생활을 하느냐가 중요해. 그래야 더 빛을 낼 수 있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 차범근 감독님이 인터뷰하실 때 "대표팀 초창기 시절에 이회택 선배님이 너 편한 대로 마음껏 하라면서 용기를 주셨던 것이 기억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웃음)
그럼 기억나지.(웃음) 74년에 이란 테헤란에서 아시안게임을 할 때 차범근 감독이 거의 막내였어. 그 때도 라이트 윙이었는데, 감독님은 윙이니까 벌려서 플레이를 하라고 하고, 코치는 좁혀서 플레이히라고 해서 차 감독이 정신이 없었지. 더군다나 신인이었잖아.(웃음)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한 거야. 소신껏 네 마음대로 해보라고...
- > 2편에 계속...
인터뷰=이상헌/김유석, 영상=정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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