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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人터뷰13 -김태영上] 밀착 마크의 달인! 김태영

정민건TV 2010. 2. 17. 05:51

 

[월드컵 人터뷰13 -김태영上] 밀착 마크의 달인! 김태영

 

대한축구협회(KFA) 홈페이지에서는 DAUM과 공동 기획한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는 내년 6월까지 격주로 게재합니다.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과 대표팀 경기의 홍보를 위해 국내 최대 인터넷포털 운영사이자 KFA 공식후원사인 DAUM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하는 홍보 프로그램으로서 한국축구의 국민적 붐 조성을 꾀하고자 하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월드컵과 관련된 인물들이며, 현 대표팀 선수들을 비롯해 추억의 스타, KFA 행정인, 역대 월드컵대표팀 감독 등이 릴레이 인터뷰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특히 KFA 및 DAUM 홈페이지를 통해 축구팬들의 질문들도 수렴해 궁금한 점들을 해소시켜드립니다. 인터뷰는 KFA 홈페이지와 DAUM 홈페이지에 기사와 동영상으로 게재됩니다. 13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파이터형 수비수의 대명사였던 '아파치' 김태영(40)입니다.


김태영은 동아대 4학년 시절인 1992년 10월 21일 UAE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한 이래 2004년까지 12년 동안 대표팀에서 활약했습니다. 98 프랑스 월드컵과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주전을 활약하는 등 총 105회의 A매치에 출장해 한국을 대표하는 수비수 중 하나로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95년 전남에 입단해 2005년 은퇴할 때까지 줄곧 '전남맨'으로 활약하며, 총 250경기에 출장해 5골-12도움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아파치'라는 별명답게 터프한 수비력으로 상대 공격수들을 압도하면서 전남과 대표팀의 중심 수비수로 오랜 기간 활약했습니다. 은퇴 이후 지도자의 길로 나섰고, 2008년에는 서정원 코치 등과 함께 홍명보 감독을 보좌해 FIFA U-20 월드컵 8강 신화를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도 올림픽대표팀 코치로서 2012년 런던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월드컵 특집 인터뷰 13번째 주자로 인터뷰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현재 올림픽대표팀의 코치로서 활동하고 계신데요. 근황이 궁금하네요.
작년에 U-20 월드컵을 끝내고 나서 12월에 올림픽대표팀의 첫 공식전으로 일본과 경기를 했죠. 최근에는 올림픽대표팀 연령대 선수들을 살피기 위해 대학대회를 살피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신체조건이나 체력적으로 좋은 선수들이 많은데, 기본적인 부분인 패스나 주위 움직임 등이 부족한 모습이더군요. 어느 정도 기량이 있는 선수를 찾아 합류시켜 발전시킨다면 더 좋은 팀을 만들 수 있기에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다만 올해는 올림픽 아시아예선 일정이 없기 때문에 11월에 열리는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는 단계로 돌입해야할 것 같습니다.

- 이제 올림픽대표팀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시점인데요. 기대, 부담감, 책임감 등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실 것 같네요.

아무래도 U-20 대표팀 시절에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에 모두들 다음에는 더 좋은 결과를 얻기를 원하죠. 어차피 주어진 임무이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위해 철저히 준비하려고 합니다.

- 이제 본격적으로 예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처음 대표팀과 인연을 맺은 것이 1992년 동아대 시절로 알고 있는데요.


대학 4학년때 처음 대표 유니폼을 입었죠.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어요.(웃음) 당시에는 대표 1진과 2진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2진에 뽑히면서 싱가폴에서 열린 머라이언컵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했어요. 이후에 대표 1진으로 올라갔죠.

당시에는 나이도 어리고, 국제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태극마크를 달고 운동장에 들어가는 순간, 숨이 꽉 막히는 느낌이었습니다. 전반 20~30분 정도 지나서야 긴장감이 풀릴 정도였죠. 시간이 흐르면서 대표 1진에서 프로팀 소속의 형들과 경쟁하면서 대표팀에서 잠시 떨어져 있기도 하고, 다시 발탁되기도 했어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대표팀에 대한 애착도 더 커졌던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에는 청소년대표팀에 발탁된 적이 한번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주위에서는 '대기만성형이다. 개천에서 용났다' 등의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기사에서도 그렇게 많이 나왔고요.(웃음)

- 그 해 10월 UAE전이 공식 첫 A매치였는데요. 그 때가 기억나십니까?

당시 수비진에는 정용환 선배님, 최영준 선배님 등이 계셨죠. 당시 프로에서 전부 베스트로 뛰고 계셨던 선배들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들어가서 정말 여기서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죠. 그래도 나이가 젊다보니까 팀에서 한발 더 뛰겠다는 생각으로 하기로 다짐했죠. UAE와의 첫 A매치는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안양에서 경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당시 안양에서 경기를 펼쳐 0-0 무승부를 기록 -편집자 주)

- 대학을 졸업한 뒤에 K-리그로 들어오지 않고, 국민은행을 선택하셨습니다. 드래프트제 때문이었는데, 당시 이야기를 해주세요.

진로 때문에 힘든 부분이 많았죠. 대학 졸업 후에 프로에 가길 원했는데, 마침 완산 푸마가 창단된다는 이야기가 들리면서 연고 지명으로 거기에 가야한다는 소문이 흘러나왔어요. 완산 푸마의 경우 워낙 재정 상태나 환경 등 여러 면에서 걱정스런 이야기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실업으로 도피하다시피 가게 된 것이죠. 저 외에도 실력이 좋은 선수들 상당수가 프로를 가지 않고 실업을 선택했어요.

원래 1년 정도 있다가 프로에 갈 생각이었는데, 실업 팀에도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2년을 뛴 다음에 프로에 오게 됐죠. 사실 실업에 있는 동안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어요. 2년간 그런 경우였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잃은 것이 많다고 생각했고, 무조건 프로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2년 만에 프로 무대에 다시 도전하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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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롭게도 프로행을 결정한 95년에 전남이 새로 뛰어들면서 창단멤버로 프로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신생 팀에 입단하는 것이었기에 걱정스런 마음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신생 팀은 기존 팀들보다는 재정이나 주위 환경 등에서 많이 열악한 상태에서 시작하기 마련이에요. 또한 전부 새로 만나는 선수들이다보니 팀을 정비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리고요. 힘든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죠.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부분들을 전부 떠나서 프로에 가지 못해 잃었던 것들을 전부 찾아오고 싶다는 마음가짐밖에 없었어요. 따라서 신생 팀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 프로에서 첫 시즌을 보내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정말 강해야 프로에서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사실 신생 팀이라 다른 팀들과 경기했을 때 실력 면이나 팀 조직 면에서 차이가 나긴 했거든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절대 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경기를 할 때마다 강하게 상대와 부딪쳤고, 그로 인해 한 게임에 경고 1장씩은 꼭 받았어요. 구단에서는 경기당 경고 1장씩 받으면 나중에 1경기 못 나오니까 제발 경고 받지 말고 경기할 수 없냐고 사정하기도 했죠.(웃음)

프로 1-2년차 시절에는 이런 부분이 상당히 심했어요. 내가 살아남기 위해 상대 공격수들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정신이 있었죠.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프로 5-6년차가 되니까 외국인 공격수든 국내 공격수든 저에 대해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더군요. 수비수로서의 그런 이미지를 상대 공격수들에게 점차적으로 심어준 것이었죠.

- 그렇다면 프로에 들어온 이후에 좀 더 터프한 스타일로 바뀌셨다고 할 수 있나요?

그렇죠. 앞서 말했듯이 프로에서는 강해야만 살아나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무엇보다 제가 센터백으로는 신체조건도 그렇고 부족한 부분이 많거든요. 그것 때문에 주위에서 걱정도 많이 했고요. 그래서 저만의 장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김태영하면 떠오를 수 있는 이미지 말이에요. 그래서 웨이트 트레이닝도 많이 하면서 몸싸움에서는 절대 밀리지 않는 수비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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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무렵에는 축구팬들이 '김태영은 너무 거칠다. 영리하지 않고 너무 저돌적이다'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했었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섭섭함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축구팬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그러나 막상 경기장에 들어와서 선수들끼리 경기하고 경쟁하는 단계에서는 다른 부분이에요. 결과를 많이 따지게 되잖아요. 이겼을 때와 졌을 때는 천지차이입니다. 시즌이 끝난 후 성적이 저조하면 퇴출당할 수도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성실하면서도 투쟁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다만 일부러 상대 선수에게 보복하기 위해 플레이하지는 않았어요. 경기를 하다보면 부딪치는 순간도 그렇고, 주위에서 볼 때에는 '정말 거칠다, 보복성 플레이다'라고 이야기를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하는데 보복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적은 없었어요. 물론 순간적으로 충돌하는 상황이나 태클하는 장면에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은 알아요. 다른 선수들보다 제가 더 깊고 과격하기도 했고요. 그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상대를 다치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이런 부분들에 대해 인터넷을 통해 저를 욕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죠. 그런데 강해져야만 했어요. 2002 월드컵에서도 봤듯이 외국 선수들과 똑같이 겨룰 수는 없어요. 현 대표팀도 마찬가지인데, 유럽과 아프리카, 남미 팀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더 강해져야만 해요. 몸싸움도 강하게 해야 하고요.

- 그러고 보면 요즘 선수들 중에는 파이터형의 선수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볼을 예쁘게 차는 선수들은 많아졌지만, 팀의 에너자이저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들이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인데요.

아무래도 그런 부분이 많이 보이긴 합니다. 사실 팀 전체가 예쁘게 볼 차는 선수들만 모여서는 안 되거든요. 그 중에는 몸싸움을 잘하는 선수, 투지가 좋은 선수, 패싱력이 좋은 선수, 이런 모든 선수들이 종합적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정말 그 팀이 뭔가 이뤄집니다. 지도자를 하면서 이런 부분을 더 많이 느끼고 있어요.

- 사실 수비수는 10번 잘해도 1번의 실수 때문에 비난받는 포지션입니다. 괜히 수비수를 했다는 후회가 들었던 순간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제가 수비수였기 때문에 은퇴할 때까지 대표팀에 있었고, 프로 무대에서도 잘할 수 있었어요. 수비수로서 그 위치까지 갔었던 것이죠.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힘든 점도 많았죠. 일단 수비수는 100%를 다 해야지만 기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만약 90%를 잘했다가 나머지 10%를 못했다면 누구 때문에 실점 내주고 졌다, 수비가 어떻다는 말을 듣게 되죠. 그런 점 때문에 나중에는 수비수 안하고 공격수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였어요.(웃음)

그런데 요즘은 점차적으로 축구팬들의 눈높이가 많이 높아지셔서 공격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비적인 부분도 많이 보시더군요. 저 수비수는 정말 묵묵하게 플레이하고, 위치 선정이나 모든 부분이 좋다는 칭찬도 많이 해주세요. 그런 점들은 정말 고마운 부분이에요.

- 1996년 아틀랜타 올림픽대표팀에도 와일드카드로 발탁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올림픽까지 가지는 못하고, 중도에 나오게 되셨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3개월 동안 올림픽대표팀 선수들과 훈련했는데 마지막에 나오게 됐죠. 당시 비쇼베츠 감독님이셨는데, 저와 그 분의 스타일이 맞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3개월간 고생했기 때문에 저도 와일드카드로 계속 남아있고 싶었지만, 결국 팀의 결정권자는 감독이니까요. 감독이 팀을 위해 필요한 선수를 데려와 쓰는 것이죠.

사실 탈락했을 때는 상당히 마음이 아팠어요. 선수에게 탈락이란 것은 큰 상처거든요. 당시 소속팀인 전남에 돌아갔을 때 허정무 감독님이셨는데, 거기 가서 고생하느니 팀에서 열심히 하라고 농담으로 격려해주시더군요.

어쨌든 아픈 시간이었지만, 그만큼 성장하는 부분도 있긴 했어요. 나중에 올림픽 끝나고 주위 이야기를 들어보니 비쇼베츠 감독님이 저를 그냥 와일드카드로 데려갔으면 좋을 뻔 했다는 말을 했다고 하던데, 어차피 다 끝나고 난 이후니까요. 지난 과거는 필요 없잖아요.

- 사실 작년 U-20 대표팀의 경우에도 최종결정권자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최종엔트리에서 2명을 제외해야하는 입장이었잖아요. 선수 시절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셨을 것 같네요.

어휴, 정말 2명을 제외해야할 때는....
우리들도 선수 때 그런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제대로 잠도 못 잤어요. 훈련하는 과정에서 선수들 움직임을 하나하나 더 봐야 하고, 정말 어떤 선수를 데려가고, 어떤 선수를 제외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며칠 동안 정말 힘들었어요. 코칭스태프 미팅도 많이 하고, 나중에 최종적으로는 감독님이 하시는 거죠. 같이 고생했는데, 마지막에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힘들더군요.

- 대표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1997년 차범근 감독님이 부임하신 이후 본격적으로 활약을 펼치셨던 것 같아요. 차 감독님께서 특별히 인정해준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제 경우 프로에 들어와서 신장이 작은데도 터프한 플레이를 보였어요. 각 부분에서 장점이 있는 선수들을 종합적으로 모아놓은 팀이 좋은 팀이잖아요. 차 감독님이 부임한 이후에도 처음에는 경기에 나설 때도 있고, 벤치를 지킬 때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98년에 들어가면서 경기를 많이 뛰기 시작했죠.

- 98 월드컵은 처음 세계와 맞닥뜨렸던 무대였습니다. 월드컵 무대에 선 느낌은 어떠셨나요?

축구 선수로서는 가장 큰 무대잖아요. 세계 강호들과 한판 벌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흥분도 되었고요. 선수로서의 자부심도 정말 커졌죠. 다만 국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꽉 들어찬 관중 속에서 경기를 치르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어요.

- 첫 경기 멕시코전에서는 홍명보, 이민성 선수와 함께 3백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3골을 내주고 말았는데요. 무엇이 문제였나요?

선제골까지 넣어 1-0으로 앞서나간 상황이었는데, 그날은 될 듯 하다가 리듬이 바뀌었던 것 같아요. 저도 첫 게임이라 긴장을 많이 했었고, 상대 선수들도 저보다 한 템포 빨랐죠. 어려운 상황으로 흘렀고, 결과적으로 1-3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전체적으로 힘든 게임이었어요.

-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멕시코전 킥오프 전에 연습할 때 김 코치님이 강하게 슈팅한 볼에 이상윤 선수가 맞고 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경기 시작 후에도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경기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가해자(?)의 입장에서 당시를 회고하신다면.(웃음)

지금도 그 이야기를 꺼내면 이상윤 선배님에게 정말 미안해요.(웃음)
멕시코전을 앞두고 워밍업을 하다가 끝날 무렵에 각자 알아서 슈팅이나 크로스, 헤딩 등을 자유롭게 하면서 마무리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하프라인 근처에서 볼을 가지고 패스하다가 라커룸에 들어갈 시간이 되어서 센터서클 부근에서 드리블 하다가 그대로 슈팅을 했어요. 발등에 제대로 얹힌 느낌이었는데, 공교롭게 그 때 이상윤 선배가 페널티 박스 중앙에서 헤딩슛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이었거든요. 그대로 얼굴에 맞고 쓰러지셨죠. 가슴이 덜컹해서 뛰어갔더니 순간적으로 기절하셨더군요. 깨어나서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시고..(웃음)

상윤 선배 이야기로는 전반전 내내 자기가 어떻게 경기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공중에서 걸어 다니는 느낌이셨다네요. 저는 볼을 맞고 후유증이 그렇게 오래갈 지는 몰랐어요. 개인적으로 정말 죄송하죠. 당시 팀에게 있어서도 마이너스 요인이었고요. 어쨌든 지금도 파주 NFC에 가면 멕시코전 선발 라인업 단체 사진이 걸려있는데, 당시 뛰었던 선수들은 상윤 선배 표정 보고 다 웃어요. 일명 멍 때리는(?) 표정을 하고 사진을 찍으셨거든요.(웃음) 지금도 너무 미안할 따름입니다.

- 네덜란드전에서는 선발에서 제외되셨어요. 후반 8분에 최성용 선수를 대신해 투입되셨는데, 어떤 임무를 맡고 들어가신 건가요?

더 이상 실점을 내주지 말자는 의도였죠. 그런데 상대의 스피드나 움직임 등 모든 부분이 우리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힘들었어요. 수비 입장에서는 대인방어 면에서도, 조직적으로도 힘들었죠. 5골이나 실점하고, 경기 끝나고 운동장을 걸어나오는데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아마 보신 분들도 '한국축구가 이것밖에 안 되나'라는 마음을 가지셨을 거예요.

-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당시 뛰었던 모든 선수들이 감탄을 금치 않았어요. 김 코치님이 느꼈던 네덜란드는 어떤 팀이었나요?

패스 타이밍도 그렇고, 한 템포 빠른 선수들의 움직임이 정말 대단했죠. 선수들이 그다지 큰 포지션 체인지를 하지 않으면서도 제 위치에서의 움직임이 순간순간 빨랐어요. 패스 타이밍이나 골 결정력까지 모든 면이 월등했죠. 당시 히딩크 감독님이 그런 부분들을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강조했기 때문에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 팀을 맡았을 때도 그런 부분을 많이 주문했어요. 한국축구가 패스 타이밍이나 움직임, 커버링 등에 대해 다시 배운 셈이죠.

- 당시 네덜란드의 공격진은 막강했어요. 김 코치님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공격수는 누구였나요?

누구 하나 꼽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한국에서는 잡지에서나 봤던 선수들인데, 직접 맞닥뜨리니까 스피드나 제공권, 골 결정력 등이 한 수가 아니라 두 수 정도 위였으니까요. 이런 선수들을 잡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이 필요하고, 어떻게 해야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 98 프랑스월드컵은 한국축구에게 있어 큰 절망감으로 다가온 것이 사실입니다. 대회를 치른 후 어떤 점들을 느끼고 배웠는지요?

가장 기본적인 것은 패스였어요. 우리가 운동장 밖에서는 서로 말하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운동장에서는 말로만 축구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서로간의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패스로 이뤄지거든요. 패스를 통해 팀의 조직적인 부분이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죠.

제가 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패싱 컨트롤이에요. 이것부터 몸에 익혀야만 다른 부분들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죠. 가장 기본적인 것을 건너뛰고 다른 부분부터 만들어가려고 하니까 나중에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 이후 2000년 아시안컵에 출장하셨습니다. 이 대회는 시드니 올림픽에 참가했던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고, 그로 인해 초반 중국, 쿠웨이트전에는 출장하지 못하셨어요. 아쉬운 마음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모든 결정은 감독이 하는 것이잖아요. 선수로서 뛰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전술적인 부분을 포함한 모든 결정은 감독이 합니다. 그 부분은 선수로서 인정해야 하는 것이죠. 저에게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 잡느냐에만 집중해야죠. 선수로서는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 결국 3차전부터는 주전으로 복귀하셨습니다. 뭔가 보여주겠다는 각오는 더욱 컸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초조하고 그렇죠. 이번 경기도 못 뛰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하고요. 그러나 기다릴 줄 아는 자가 나중에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어요. 또 자신에게 기회가 왔을 때 운동장에서 어떻게 뛰어야겠다는 사명감도 갖게 되고요. 이런 부분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 8강에서 이란과 연장전까지 치르면서 승리했던 경기는 정말 명승부였는데요. 당시를 회상하신다면.

그 전에 96년 아시안컵에서 우리가 이란에 2-6으로 대패하면서 논란이 컸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후배인 우리들 입장에서는 이란을 꼭 잡아야겠다는 마음이었죠. 이란 때문에 한국축구가 대혼란을 겪었기에 반드시 꺾고 복수하겠다는 강한 마음들이 있었어요. 그런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연장까지 가면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