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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人터뷰17 - 차범근下] 한국 축구의 영원한 전설 '차붐'

정민건TV 2010. 5. 4. 04:02

 

 

[ⓜ 월드컵 人터뷰17 - 차범근下] 한국 축구의 영원한 전설 '차붐'

 

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전에 참가했던 대표팀(윗줄 왼쪽 끝이 차범근) ⓒ FIFA
- 이제 86 멕시코 월드컵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감독님의 대표팀 합류를 반대하는 의견도 꽤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꽤나 섭섭하셨을 것 같아요.

찬반은 항상 있는 것이죠. 그러나 많은 국민들이 제가 뛰길 원한 걸로 알고 있어요. 사실 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우리가 못 나갔는데, 그 때도 아시아 예선에 저를 부른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참가하지 못했어요. 어느 시대든 서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어쨌든 후배들이 좋은 자리를 마련해줬고, 많은 사람들이 제가 뛰길 원했고, KFA가 결정해서 월드컵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월드컵 참가는 제 인생에 있어 더없이 즐겁고 좋았던 기억이에요. 더 잘해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한 것이 아쉬운데, 독일에 있느라 너무 후배들과 떨어져서 지내다보니 호흡 면에서 완벽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후배들이 너무 잘해줬고,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서 밥 잘 먹고 온 것이라 고마울 뿐입니다.

- 감독님께서는 월드컵을 앞둔 85/86 시즌에 분데스리가 17골로 한 시즌 개인 최다골을 기록하셨어요.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의 컨디션은 어떠셨나요?

사실 복숭아뼈 아래 인대가 파열해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수술해야 하는데, 월드컵 때문에 하지 못했죠. 근육이 계속 올라오는 것은 아닌데, 한 번씩 올라오면 아프고 두렵죠. 그래서 늘 테이핑을 했는데, 아주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월드컵을 앞두고 팬들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술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월드컵이 끝난 뒤, 수술을 하게 됐죠.

- 월드컵을 참가하는 감독님을 위해 레버쿠젠에서도 많은 협조를 해줬다고 들었습니다.

배려가 있었죠. 그 때만 해도 재활이나 의무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많이 부족했어요. 월드컵 자체도 32년 만에 나가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 레버쿠젠의 의무 담당자가 우리 선수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어 요청을 했고, 레버쿠젠 구단에서도 기꺼이 파견해줬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번 도움을 받았죠.

86 멕시코 월드컵 당시 현지 축구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모습 ⓒ 한국사진기자회
- 오랜만에 대표팀에 합류하셨고, 감독님은 이미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한 상황이었습니다. 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춰보지 않은 젊은 선수들도 많아 서먹서먹한 경우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런 면도 있었죠. 너무 오래 떨어져있었으니까요. 또 저와 같이 볼을 찼던 선수들도 많지 않았어요. 최순호, 박경훈, 정용환 같은 선수는 저와 같이 대표 생활을 하지 않았던 세대였습니다. 젊은 선수들이 많아 그 선수들로서는 한참 선배인 제가 어렵기도 했겠죠.

- 그토록 갈망하던 월드컵에 나가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를 위해 피치에 섰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요?

벌써 우리는 아르헨티나의 네임밸류에 많이 위축되어 있었어요. 정신적으로는 무장이 잘됐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많은 부담을 안고 있었습니다. 상대는 마라도나라는 세계적인 선수가 있었고, 모든 카메라가 거기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니 몸도 경직되고, 움직임도 둔화되고, 오버하게 되었죠.

그러다보니 너무 쉽게 실점을 내줬고, 연속골을 내주면서 자신감이 떨어지고 조직도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어려운 경기를 펼쳤어요. 그래도 나름대로 1골을 만회하면서 1-3으로 패했는데, 당시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한 경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유럽에서 뛰고 있었고, 경험이 많았지만, 부담이 컸습니다. 상대 선수 개개인이 모두 대단한 선수들이었거든요. 어쩌면 제가 무명이었다면 부담이 덜했을 지도 모릅니다.

86년 멕시코 월드컵 첫 경기 아르헨티나전에서 ⓒ 한국사진기자회
- 사실 상대팀들은 한국 선수 중에 감독님만 알고 있는 상황이었죠. 집중적인 견제 대상이었고, 그로 인해 상당히 힘드셨을 텐데요.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외부에 노출이 많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견제를 많이 받았죠. 제가 여러 가지를 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한 선수를 경계하다보면 다른 곳에서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죠.

아쉬움은 분명 있었습니다. 공격수가 골을 넣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요. 그러나 골운이 닿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죠. 어쨌든 상대는 제 움직임을 견제했고, 저는 수비수들을 끌어내는 역할을 했어요. 그러다보니 틈이 생기고 골도 들어갔기에 제 역할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당시는 동료들과 공을 같이 차본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볼을 주고받는 타이밍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었어요.

- 언급하셨지만, 어떻게 보면 분데스리가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다가 한국 선수들과 함께 하면서 플레이에 있어 미묘하게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움직임이나 패스 스피드, 타이밍 같은 것에서 말이에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제가 독일에 처음 갔을 때 동료들이 저에게 볼을 주지 않았어요. 분명히 달라고 했는데도 안 줬죠. 나중에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볼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제가 볼을 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겁니다. 그 선수들은 움직이는 선수에게는 볼을 주지만, 서 있는 선수에게는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초창기에 볼을 많이 받지 못했죠.

독일에서 그런 부분에 적응한 상태에서 대표팀에 왔는데, 아무래도 독일과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움직이면서 볼을 받으려고 했는데, 잘 맞지 않았죠. 아무래도 다른 스타일의 축구를 했었고, 서로 호흡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불가리아전을 보면 제가 오프사이드를 정말 많이 범했어요. 제가 들어가는 타이밍과 패스를 주는 타이밍이 조금씩 맞지 않았기 때문이죠. 볼이 들어오기만 하면 뭔가 될 것 같은데 약간씩 어긋나니 정말 아쉬웠죠.

프랑크푸르트의 예를 들어보면 제가 본능적으로 움직이면 거기에 맞춰 미드필드에서 정말 날카로운 패스가 들어왔어요. 당시 프랑크푸르트에는 휠첸바인과 그라보브스키가 미드필드에 있었는데, 둘 다 월드컵까지 나갔던 대단한 선수들이었습니다. 제가 움직이려고 하면 자로 잰 듯이 뛰는 앞으로 딱딱 맞춰 패스가 들어왔어요. 아무래도 제가 분데스리가에서의 패스 타이밍에 움직이다 보니 대표팀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패스 타이밍이 늦어 오프사이드가 걸려던 것 같아요. 굉장히 아쉬웠죠.

- 당시 최순호 감독님과 전방에서 호흡을 맞추었는데요. 예전에 최순호 감독님과 인터뷰할 때 “차범근 선배는 확실히 움직임이 다른 선수들과 달랐다. 좋은 움직임이 있으니까 내 패스도 더 사는 느낌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아요. 최순호 감독은 그 때 보니까 기술과 스피드도 있고, 주위를 보는 눈도 빨랐어요. 특별하더군요. 저와 감이 아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제가 움직이는 타이밍에 맞출 수 있는 선수가 최순호 감독이었어요. 당시에도 아주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었죠. 호흡을 더 맞췄다면 더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전(왼쪽에서 세번째가 차범근) ⓒ FIFA
- 이후 1989년에 현역에서 은퇴를 하셨을 때, 독일에서도 여러 가지 제의가 있었던 터라 굳이 한국으로 오지 않아도 세계축구의 중심에서 계속 활동하실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한 망설임은 없으셨는지요?

없었습니다. 독일에서 지도자 코스를 ‘후스발레러’라고 하는데, A와 B자격을 이미 딴 상태였어요. 그리고 마지막 해였던 1989년에 리누스 미셸 감독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 과정을 이수했죠. 그 과정들을 공부한 것은 한국에 돌아와 지도자를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제가 독일로 갈 때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제 스스로 많은 사랑을 입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제 성격상 말을 바꾸는 것을 못하기 때문에 이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프랑크푸르트로부터 2년 제의를 받았는데, 가족들은 모두 남길 원했어요. 아마 남았다면 가족들에게는 좋을 수 있었겠죠. 사실 저도 한 때 동요하기도 했어요. 독일에서 7년 이상 거주한 사람들에게는 영구 체류할 수 있는 비자가 나왔는데, 그거 받는 것이 쉬운 게 아니었거든요. 그러나 결국은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한국으로 가겠다고 결심했죠. 계획하고 있었던 축구교실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 축구교실만이라도 주말리그를 해서 활성화시키겠다는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지도자하면서 몇년 지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돌아왔고, 90년에 축구교실을 열게 된 것이죠. 서울 용산구와 은평구, 구로구청장을 찾아가서 제 꿈과 비전을 설명하고 축구교실을 열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거기서 30만원씩 지원해줘서 코치 하나씩 두고, 제가 돌아다니면서 활성화를 시켰고요. 또 정몽규 회장님(현대산업개발 회장,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이 현대에 계실 때 지원해주시기도 했죠. 그런 도움 덕택에 축구교실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전혀 후회가 없고, 지금도 제가 잘한 일 중에 2가지를 꼽는다면 축구교실과 차범근 축구상을 만든 것,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 유럽에 대한 마음의 벽을 허문 것을 꼽고 싶어요. 제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럽지 않은 일들이었습니다.

- 현역 시절을 돌이켜보셨을 때 한국과 독일에서 각각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선수를 꼽아보신다면.

한국에서는 김진국, 박이천, 김재한, 이차만, 고재욱 선배 등과 호흡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시절 니켈과 그라보브스키가 제가 움직이면 아주 칼날처럼 패스를 연결해줬죠. 그리고 레버쿠젠에서는 전방에서 같이 투톱을 봤던 바스와의 호흡이 아주 좋았고 위력적이었죠.

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훈련 중인 대표팀과 차범근 감독 ⓒ KFA 홍석균
- 다시 월드컵과 인연을 맺은 것은 98 프랑스 월드컵이었습니다. 월드컵 아시아예선의 경우, 그야말로 파죽지세였죠. 그러나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황선홍 선수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감독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요.(웃음)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완벽하게 통과를 했는데, 본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프로 선수들이다 보니 매번 불러서 합숙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6개월여 동안 어린 선수들을 더 찾아서 합류시켰는데, 이것은 미래를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어서 굉장히 어려웠어요. 처음에는 그 선수들을 데리고 킹스컵도 우승하면서 괜찮았는데, 이후에 호주 친선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고, 다이너스티컵에서 3월 1일 일본전에서 패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죠.

그래서 그 타이밍에 네덜란드 전력 분석을 위해 유럽에 가려고 했던 계획이 발목이 잡혀서 4월 1일 일본과의 리턴매치에 힘을 쏟아야 했어요. 결국 그 경기는 이겼죠. 그리고 오랜 기간 부상으로 고생하던 황선홍 선수가 회복한 상황이었는데,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다치면서 결정적으로 우리 무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월드컵 본선에서도 아주 치명적으로 작용했죠. 공격의 핵을 잃어버린 것이니까요. 결국 멕시코와 네덜란드에 패하면서 도중에 감독직에서 내려와야 하는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 네덜란드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객관적인 팀 전력의 차이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경기였어요. 선수들 역시 “차원이 달랐다, 패스하는 속도와 움직임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고 이야기들을 하더군요.

확실히 그랬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렇게 좋은 선수들이 경기를 끌어간다면 한국이 아니라 유럽 팀들도 네덜란드를 상대하기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경험도 부족했었죠.

일단 멕시코와의 1차전에서 우리가 골을 넣고 바로 퇴장을 당하는 악재가 발생했고, 그것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어려운 경기로 흘러갔어요. 만약 그 때 퇴장이 없었고, 그 경기를 계속 유리하게 끌고 갔다면 이후 경기들도 다른 상황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때 사기가 꺾이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고, 이런 것이 부정적으로 팀에 영향을 미쳤죠.

98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와의 경기전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 ⓒ 한국사진기자회
- 선수로서 월드컵에 나가셨지만, 감독으로 나가는 느낌은 어떠셨어요?

아무래도 다르죠. 선수 때는 자기만 잘하면 되는 것이지만, 감독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니까요. 감독은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98 프랑스 월드컵은 감독으로서는 처음 나가는 월드컵이었고, 긴장을 많이 했죠. 그것만이라면 괜찮은데, 언론 같은 곳에서 팀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까 그런 것들도 다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그 때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2002 월드컵과 2006 월드컵은 해설가로서 참가하셨어요. 전문적이고 깊이가 있으면서 시청자들이 편하게 들을 수 있는 해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팬처럼 즐기는 모습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앞서 이야기한대로 저는 어떻게 하면 팬들에게 축구를 가깝게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합니다. 저도 팬의 입장에서 축구를 보는데, 거기에 아무래도 축구를 한 사람이 축구 현장을 가장 잘 알잖아요. 팬들에게 거부감 없이 현장을 잘 설명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만 현장을 이론적으로만 설명하면 딱딱해요. 사람들이 축구를 어렵게 느낄 수 있죠. 해설이란 것은 쉽게 설명해야지, 그것을 어렵게 설명하면 듣는 사람들은 잘 모르죠. TV를 보는 사람들은 축구를 아는 분들도 계시지만, 잘 모르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저는 가급적 쉽게 우리 축구의 상황을 팬의 입장에서 설명해주기 위해, 그리고 이왕이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야기해주려고 애썼어요.

무엇보다 선수들이 제 해설로 상처입지 않도록 신경 썼습니다. 선수들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었죠. 그것을 꺾는다면 제가 잘못하는 것이에요. 그런 마음으로 했더니 다행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고마운 일이었죠.(웃음)

제가 특별히 잘했다기보다는 축구에 대한 애정을 갖고, 우리 선수들을, 우리 축구를 설명해줬을 때, 그리고 팬들이 현장에서 잘 모르는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잘 설명할 때, 그런 것들이 팬들의 가슴에 와 닿지 않았나 싶어요.

- 말씀하신대로 해설을 하실 때 보면 선수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 나오십니다. 지적보다는 잘한 점을 찾아 칭찬해주시려고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예를 들어 저 상황에서 왜 이렇게 못했느냐가 아니라,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저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느낌의 해설이셨죠.

우리 축구를 팬들에게 좀 더 거부감 없이 전달하려고 노력했어요. 저 선수가 왜 저렇게 했는지를 팬들은 잘 모를 수 있어요. 축구라는 것이 저도 해봤지만, 보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기계처럼 움직일 수 없거든요. 축구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실수가 있는 스포츠입니다. 그래서 실수를 하더라도 뭔가 이해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시청자들에게 설명했을 때 거부감이 훨씬 더 줄어들게 되죠.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 최고의 선수들이거든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실수였는지, 반복되는 실수였는지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만약 반복되는 실수라면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뭔가 다른 쪽에서 지적이 필요한 것이죠.

그러나 저 상황에서 저 선수의 저런 플레이가 최선을 다한 상황이라면 그것은 이해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서 더 높은 것을 원한다면 세계적 선수도 맞출 수가 없어요. 그리고 팬들은 영원히 우리 선수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그런 현장을 팬들에게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제가 해설하면서 하고 싶었던 것이에요.

실수를 했을 때 자꾸 그 이야기를 하면 긴장해서 더 못하기 마련입니다. 계속 칭찬을 하면 잘하기 마련이고요. 우리 팬들도 선수들이 실수했을 때 좀 더 격려해줄 필요가 있어요. 선수들이 흥이 나고, 기가 꺾이지 않게 말이에요. 저 역시 그런 해설을 하고 싶은 것이고요.

2005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한국축구의 영웅들' 출판기념회에서 ⓒ KFA 홍석균
- 2006 독일 월드컵 TV 해설을 하실때 차두리 선수와의 호흡은 엄청난 화제였습니다. 그런데 보고 있자면 차두리 선수가 같이 해설하는 것이 조금 불안한 듯한 모습도 보이셨는데.(웃음)

그렇죠. 우리 아들은 경기장에 나가서 뛰고 있어야 하는데 거기 앉아 있으니까 아버지로서 불만이었던 것이고요. 또 해설이란 것이 한두 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을 상대로 하는 것이잖아요. 따라서 말 하나, 행동 하나 하나가 파장이 커요. 그렇잖아도 부자가 앉아 있는데,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그것은 씻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아들은 선수이고, 젊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잘 느끼지 못하니 아슬아슬했죠.(웃음)

그런 상황에서 스위스전에서 “이건 사기입니다!” 이런 말을 두리가 하니까 저는 완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군요.(웃음) 다행히 반응은 좋았지만, 어쨌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계석 저쪽 끝에 앉아있으니까 어떻게 할 수도 없었고요.(웃음)

- 이번 월드컵에는 TV 방송사간의 문제로 해설을 못하실 듯 싶은데, 아쉽지는 않으신가요?(웃음)

뭐 해설을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국민들이 원한다면 축구를 위해서 해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여러 상황 상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군요.

-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죄송합니다. 재미있는 인터뷰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축구팬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제가 19세에 처음 국가대표가 되어서 지금까지 여러분들의 많은 사랑 속에서 축구 인생을 걸어왔습니다. 어려울 때도, 고통스러웠을 때도, 좋았을 때도, 자랑스러웠을 때도 있었어요. 여러분의 사랑이 고마워서 더 잘해야겠다, 더 좋은 축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은퇴하면 후진을 양성해야겠다고도 생각했고요.

여러분들의 사랑이 고마워서 지금도 축구 현장에서 이렇게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저를 사랑해주셔서 큰 선수로 만들어주신 것처럼 더 많은 후배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격려해주셔서 훌륭한 선수들이 더 많이 배출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희망을 주고 삶의 에너지를 만들어줄 수 있는 그런 선수들이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한국축구가 세계무대에서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을, 그래서 기뻐하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꼭 보고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한국축구와 선수들을 사랑해주세요.


공식질문1. 축구는 (나의 삶)이다.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네요.

공식질문2. 월드컵은 (우리의 꿈) 이다.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의 가치를 갖고 있는 꿈이죠. 국민들에게도 굉장히 생산적인 에너지를 만들어줘요.


인터뷰= 이상헌 / 영상= 정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