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준희 샤우트풋볼247] 깡통 하나로 아쉬운 역사가 남은 독일의 대표 클럽!
- 최정상 밟지 못한 역사의 강호들 -
0. ‘밀란의 라이벌’ 마라도나의 나폴리
1. ‘판정에 울었던’ 돈 레비의 리즈 유나이티드
2. 로바노프스키의 ‘과학 축구’ 디나모 키에프
.
.
(지난 회에 이어...)
.
.
3. 보루시아 뮌헨글라트바흐
- 최고의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한 독일 축구 역사의 가장 대표적인 강호가 바로 70년대의 보루시아 뮌헨글라트바흐.
- 1970, 71 분데스리가 2연패, 1975, 76, 77 분데스리가 3연패. 1973 DFB 포칼 우승. 1975, 79 UEFA컵 우승. 1977 유러피언컵 준우승(대 리버풀).
- 당대 네덜란드에서 아약스와 페예노르트가 형성했던 라이벌 관계와도 유사하게 독일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극도로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 하지만 전설적인 바이에른 뮌헨보다도 더 화려하고 공격적이며 재미있는 축구를 구사함으로써 인기를 끌었던 팀이 바로 보루시아 뮌헨글라트바흐다. 두 팀의 경쟁 관계는 분데스리가의 수준과 흥미를 높이는 데에도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 다만 이 보루시아 뮌헨글라트바흐가 당대 1인자의 이미지를 지니지 못하는 것에는 역시 유러피언컵 트로피가 없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함. (대조적으로 뮌헨글라트바흐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 뮌헨의 최대 라이벌로 등장했던 함부르크 SV가 유러피언컵을 들어 올린 것에 비해 다소간 불운했다.) 또한 시기적으로 보루시아 뮌헨글라트바흐의 전성기 자체가 아약스, 바이에른 뮌헨, 리버풀과 같은 다른 역대 위대한 팀들의 전성기와 부분적으로 겹치고 있다는 사실도 1인자 이미지를 남기지 못하도록 하는 원인.
- 그러나 당대 뮌헨글라트바흐 선수들의 수준과 재능은 바이에른 뮌헨에 결코 뒤지지 않으며 유럽 전체를 고려하더라도 매우 뛰어난 선수단을 보유했던 팀이 바로 뮌헨글라트바흐다.
* 당대 뮌헨글라트바흐의 강력함을 잘 말해주는 명경기들.
= 1971년 4월 14일, 리그 우승이 걸린 중요한 길목에서 바이에른 뮌헨에 거둔 홈경기 3-1 승. 당대 유럽 최고 수준의 플레이메이커라 해도 좋을 귄터 네처가 위력을 떨친 경기.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파울 브라이트너, 제프 마이어, 한스 게오르그 슈바르첸벡이 뛰고 있었지만 뮌헨글라트바흐의 공격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경기는 분데스리가의 ‘스타워즈’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양 팀 통틀어 그라운드 위에서 활약한 국가대표 선수가 15명에 달했다(서독 12명, 덴마크 2명, 오스트리아 1명).
= 1971년 10월 20일, 유러피언컵 16강전 홈경기에서 인터밀란을 무려 7-1로 맹폭했던 전설적인 한 판. 귄터 네처, 유프 하인케스, 울릭 르 페브르가 모두 두 골씩을 터뜨렸다. 인터밀란은 산드로 마촐라, 지아친토 파케티, 로베르토 보닌세냐, 자이르, 마리오 코르소, 가브리엘레 오리알리 등을 포함한 팀이었다. 그러나 이 경기는 ‘전설’로만 남을 뿐 공식 경기가 되지는 못했다. 이 경기에서 인터의 보닌세냐가 음료수 깡통에 맞아 쓰러졌고 UEFA는 인터의 항의를 받아들여 경기 결과를 무효화하고 재시합을 치르게 했다. 재시합은 무승부로 마무리되었고 밀라노 원정에서 2-4로 패한 뮌헨글라트바흐는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인터가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음을 감안하면 뮌헨글라트바흐에겐 너무도 아쉬운 결과였다. 만약 이 때 뮌헨글라트바흐가 결승에 진출했더라면 세계 축구팬들은 ‘귄터 네처 대 요한 크라이프’의 역사적 승부를 보게 됐을지도 모른다. 인터밀란 전을 직접 관전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매트 버스비는 “전율의 경기였다. 뮌헨글라트바흐를 상대할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평했을 정도였다.
= 1971년 10월 23일, 인터밀란을 7-1로 맹폭한지 3일 후에 치렀던 분데스리가 경기에서 뮌헨글라트바흐는 샬케를 상대로 다시 한 번 7골을 터뜨린다(7-0 승). 하인케스, 네처, 르 페브르가 역시 두골씩을 잡아냈다. 샬케는 71/72시즌 2위에 오르게 되는 팀이며 전설적 스트라이커 클라우스 피셔를 보유했던 팀이기도 하다.
- 쇼트 패스, 롱 패스, 스루 패스에 모두 능했으며 드리블 능력, 예술적인 슈팅력과 프리킥 능력까지 보유했던 플레이메이커 귄터 네처를 위시해, 네처의 패스를 골로 바꿔놓는 공격수 유프 하인케스, 역동성과 수비력을 지닌 네처의 파트너 허버트 빔머, 독일 수비의 대명사 베르티 포그츠, 강력한 중거리포의 라이너 본호프, 덴마크의 기술적 윙어 울릭 르 페브르 등이 뮌헨글라트바흐의 초기 전성기를 이끌었다.
- 1973년 네처는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지만(레알의 네처 영입은 바르셀로나가 크라이프를 영입한 것에 대한 대응), 포그츠, 하인케스, 빔머가 계속해서 팀을 지탱하고 이들보다 젊은 알란 시몬센(훗날 바르셀로나 진출), 울리 슈틸리케(훗날 레알 마드리드 진출)와 같은 선수들이 가세해 뮌헨글라트바흐의 좋은 시절을 지속시켰다. 민첩하고 다부지며 기술적인 공격수 시몬센은 피터 슈마이켈, 미카엘 라우드럽과 더불어 덴마크 축구사의 역대 최고 3인방으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로서 1977년 발롱도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시몬센이 발롱도르 1위에 올랐을 때 2위는 케빈 키건, 3위가 미셸 플라티니였다).
- 독일 축구의 두 전설적 명장 헤네스 바이스바일러(1964-1975)와 우도 라텍(1975-1979)이 연이어 팀을 이끌었다. 라텍은 뮌헨글라트바흐의 경쟁 세력 바이에른 뮌헨으로부터 뮌헨글라트바흐로 옮겨와 그의 트로피 사냥을 계속 이어갔다.
'♡ 스포츠영상발전소 > 한준희 영상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준희 샤우트풋볼249] 상승세 꺾인 여자축구의 현 주소! (0) | 2011.11.08 |
---|---|
[ⓜ 한준희 샤우트풋볼248] 스웨덴 영웅이 지휘했던 AS로마의 전성기! (0) | 2011.10.29 |
[ⓜ 한준희 샤우트풋볼246] 올시즌 K리그 외국인 선수들의 성적표는? (0) | 2011.10.24 |
[ⓜ 한준희 샤우트풋볼245] 레알 꺾고 바르샤 추격하는 레반테! (0) | 2011.10.21 |
[ⓜ 한준희 샤우트풋볼244] 시대를 풍미한 디나모 키에프의 슈퍼스타! (0) | 2011.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