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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人터뷰7 -안정환上] '이탈리아에서의 2년이 인생 바꿔'

정민건TV 2009. 12. 13. 04:11

 

대한축구협회(KFA) 홈페이지에서는 DAUM과 공동 기획한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는 내년 6월까지 격주로 게재합니다.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과 대표팀 경기의 홍보를 위해 국내 최대 인터넷포털 운영사이자 KFA 공식후원사인 DAUM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하는 홍보 프로그램으로서 한국축구의 국민적 붐 조성을 꾀하고자 하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월드컵과 관련된 인물들이며, 현 대표팀 선수들을 비롯해 추억의 스타, KFA 행정인, 역대 월드컵대표팀 감독 등이 릴레이 인터뷰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특히 KFA 및 DAUM 홈페이지를 통해 축구팬들의 질문들도 수렴해 궁금한 점들을 해소시켜드립니다. 인터뷰는 KFA 홈페이지와 DAUM 홈페이지에 기사와 동영상으로 게재됩니다.

 

 

 

 

일곱 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영원한 한국축구의 판타지스타' 안정환 선수(33, 다렌)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안정환 선수는 대림초와 남서울중, 서울공고, 아주대를 거쳐 1998년에 부산대우(현 부산)에 입단했습니다. 2000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이탈리아 세리에A에 진출해 AC페루자(2000~2002년)에서 2시즌을 보냈고, 이후 일본의 시미즈 S펄스(2002~03년)와 요코하마 마리노스(2004~05년)를 거쳤습니다. 2005년에는 다시 유럽으로 진출해 프랑스의 FC메스(2005~06년)와 독일의 뒤스부르크(2006년)에서 뛰었습니다. 2007년에 수원 유니폼을 입고 K-리그로 복귀했으며, 부산(2008년)을 거쳐 현재 중국의 다렌 스더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1997년 4월 23일 중국과의 정기전을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렀으며, 1999년 6월 12일 코리아컵 멕시코전에서 A매치 데뷔골을 터트렸습니다. A매치 통산 68경기에 출장해 17골을 기록 중이며, 2002 한일월드컵에서 미국전 동점골과 이탈리아전의 극적인 연장 결승골, 2006 독일월드컵 토고전 결승골 등 중요한 경기에서 값진 골들을 선물했었습니다.

K-리그에서도 총 139경기에 나서 55골-14도움을 기록했으며, 1999년 K-리그 MVP와 베스트11 수상 등의 성과를 올린 바 있습니다.


월드컵 특집 인터뷰 7번째 주자로 안정환 선수를 인터뷰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근황부터 물어보겠습니다. 중국에서의 시즌도 끝났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시즌 동안 많이 피곤했으니까 가족과 쉬고 있어요. 1시즌 동안 원정경기도 있고 해서 집을 많이 비웠는데, 지금은 이렇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친구들과도 자주 만나고 싶지만, 아이가 2명인데다가 둘째는 10개월이어서 가끔 보는 정도입니다.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죠.

사실 올 시즌을 앞두고 중국으로 진출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많은 분들이 놀랐습니다. 국내에서 더 뛰든지, 아니면 일본이나 유럽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유럽은 물론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나이도 있고 실력이나 컨디션 같은 것 때문에 어렵다는 판단이 섰고요. 일본의 경우는 J리그에서 뛰는 동안 우승도 해봤고 좋은 성과를 거뒀었어요. 중국리그가 물론 K-리그나 J리그보다 약할 수도 있지만 제 축구 인생에 있어서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정적으로 택하게 됐죠.

솔직히 안정환 선수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선수가 중국리그에 진출한다는 것에 대해 논란도 많았습니다. 스스로도 중국 진출에 대해 아쉬운 마음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예. '왜, 꼭, 굳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그러나 중국도 가보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운동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물론 더 좋은 리그를 경험해보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컨디션이나 여러 면에서 힘든 면이 있으니까요. 한국에서도 뛰었고, 일본에서도 뛰었으니까 동아시아 리그를 다 돌아보면 나중에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 결정했어요. 후회하지는 않았어요.

다렌의 적극적인 구애도 있었고, 일본에 있었을 때 AFC 챔피언스리그에서도 경기를 해본 팀이었어요. 그 때 좋은 팀이라는 인상을 받았었고, 또 중국에서는 명문이고, 우승도 가장 많이 했던 팀이었거든요. 그래서 결정하게 됐죠.

겪어본 중국리그는 어땠습니까? 다렌에서의 생활도 궁금하고요.

유럽 못지않게 관중은 정말 많은 것 같아요. 물론 인구가 많아서 그렇겠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열정이 좋은 것 같아요. K-리그보다 경기력이 약간 떨어지는 느낌을 받은 것은 사실인데, 그래도 상위팀들은 지금 K-리그의 상위팀과 견줘도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중국리그는 더 많은 발전을 해야 하는 상태이고, 아직까지는 한국과 차이가 있죠.

다렌에서의 생활을 말한다면 축구 도시라서 그런지 배려나 대우도 좋고, 많이 사랑해주시는 점이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외국 생활을 많이 해봤는데, 다렌에서도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워낙 시민들이 축구를 좋아해서요.

'다렌의 왕'이라고 칭해진다고 들었어요. 부인 이혜원 씨에 대한 관심도 엄청나다고 들었고요. 부담스럽지는 않습니까?

아무래도 부담이 있죠. 많이 사랑해주시고 관심이 있으니까 그만큼 축구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는 것 같아요. 받은 만큼 꼭 운동장에서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앞서 말했지만, 관중이 많으니까 분위기가 유럽 못지않아요. 축구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한국보다 관중이 훨씬 많은 점이 다소 아쉽긴 하더군요. 한국도 관중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한국에서 뛰었을 때 지금 다렌 축구팬들처럼 많이 사랑해줬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도 남고요. 그런 점은 부럽더군요.

첫 시즌 6골-2도움을 기록했습니다. 팀은 리그 8위를 차지했고. 어느 정도 만족하시나요?

갑자기 중국리그를 선택했기 때문에 준비를 많이 못하고 시즌을 임했는데, 첫 시즌 치고는 개인적으로는 중간 정도는 했다고 생각해요. 내년 시즌에 좀 더 좋은 성적을 내는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내년 시즌도 다렌에서 뛰는 것인가요? 사실 많은 팬들이 K-리그 복귀를 원하고 있거든요. (YellOw님 FIGO님 등)

네. 내년 시즌도 다렌에서 뛸 것 같습니다. 계약 기간도 남아있고요.

이제 본격적으로 예전 이야기들을 해보겠습니다. 아주대 시절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예선을 앞두고 처음 대표팀에 발탁되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 때는 굉장히 아마추어였죠. 대학생이었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좋은 경험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당시 월드컵 대표팀에는 워낙 대선배님들이 많이 계셨어요. 제가 어린 나이에 들어가서 예선까지 뛰고 두 달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차범근 감독님께서 저를 잘 봐주시고 인정을 해주셔서 뽑힐 수 있었죠. 물론 98 프랑스 월드컵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훈련하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저에게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안정환 선수의 미모(?)와 기량을 이미 알고 있었던 아마추어 축구 팬들이 '이제 안정환의 등장으로 한국축구계가 들썩거리겠구나'라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그 때는 나이도 어린 상황에서 과도한 인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당시에는 어떤 부분에서 얼마나 힘들게 나에게 다가왔는지 잘 인식하지는 못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내가 그때 많이 힘들었구나'라는 걸 느껴요. 축구보다도 다른 쪽으로 부각이 많이 됐었기 때문에 제 스스로는 축구로 더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말씀대로 98년 부산에 데뷔해서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98 프랑스 월드컵 출전은 좌절됐죠. 큰 기대를 안했다고 해도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을 것 같은데요.

어린 나이에 자극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부족하긴 많이 부족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선배님들 보면서 '내가 저렇게까지 하려면 더 많이 노력을 해야겠구나'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98 월드컵은 못 갔지만 K-리그에 더 전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해에 골도 많이 넣을 수 있었고, 더 열심히 하다보니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빼어난 외모와 화려한 플레이, 같은 부산 소속 등. 선배인 김주성 선수와 많이 비교가 되기도 했었어요.

데뷔했을 때부터 김주성 선배님에게서 많이 배웠고 말씀도 많이 해주셨어요. 그런 것이 저에게는 좋은 자극제가 되었죠. 선배님은 모든 것을 이루셨고 최고셨잖아요. 저도 처음에 김주성 선배님을 모델로 삼고 운동했기 때문에 같은 팀에서 함께 뛸 수 있다는 것이 영광이었죠. 축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98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뒤, K-리그에서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어요. 어떻게 보면 그 시절이 인기 면에서는 최고였던 시절 아닌가요?(웃음)

나이가 어리니까 소녀 팬들도 많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많이 사랑해주셨죠. 당시 부산의 축구 열기는 정말 대단했으니까요. 제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이동국-고종수 선수와 함께 '트로이카'로 칭해지면서 많은 매체에서 항상 3명을 비교하곤 했었습니다. 그런 경쟁구도에 대해 부담감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크게 신경 쓴 것 같지는 않아요. 워낙 셋이 친했고, 경쟁구도보다는 팀이 이겨야지만 사람도 많이 오고 더 인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경기에만 집중했던 것 같아요. 개인적인 목표 그런 것보다도 팀 승리에 집중했죠. 또 워낙 서로의 스타일이 달랐잖아요. 동국이는 동국이만의 색깔이 있는 축구를 하고, 종수는 미드필더로서 저와는 색깔이 달랐고요.

그러고 보면 스타일상 안정환 선수는 이동국 선수와 고종수 선수의 중간 형태라고 보여지네요. 포지션으로도 쉐도우 스트라이커나 공격형 미드필더가 적격이고요.

예. 그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타겟형 스트라이커로 가기에는 신체적으로 약했었고, 미드필더로 가기에는 당시 제 수비력이 떨어졌어요. 쉐도우 스트라이커가 잘 맞았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아요. 이탈리아에 있을 때도 그렇고, 지금 중국에서도 그 위치에서 뛰고 있죠.

2000년 7월, 시즌 중반에 이탈리아 페루자행을 단행합니다. 페루자행이 성사되기까지 여러 난관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국내에서 너무 주위의 관심도 많고, 주변 환경도 운동할 수 있는 여건으로는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외국에 꼭 한 번 나가서 볼을 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알아보는 와중에 이탈리아 쪽과도 연결되었는데, 당시에는 이탈리아리그가 최고의 리그였기 때문에 꼭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그 과정에서 갈등이 많았죠. 저는 나가고 싶고, 부산은 저를 잡아야 하니까요. 그런 여러 가지 서로의 입장 차이가 있었는데, 결국은 나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제 인생도 많이 바뀐 것 같아요.

페루자에서는 아마도 나카타의 성공을 통해 아시아 선수의 가능성을 본 듯 싶은데요. 도착했을 때 그들의 기대감은 어땠나요?

아무래도 그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는 마케팅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페루자에게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되었죠. 그러나 한국은 아직까지 그런 것이 안됐어요. 페루자에서는 저를 마케팅 쪽으로도 많이 기대했는데, 저는 그런 부분에서는 도움이 안 되니까 실력으로 승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점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잘 모르는 나라에서 온 동양인 선수에 대해 감독이나 선수들은 불신의 눈초리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처음 외국에 나간 것이었고, 그들이 그때 당시 나를 생각했을 때는 '변방 국가에서 온 그냥 선수구나'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처음 6개월 정도는 고생을 했었죠.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웠고요. 그런데 계속 같이 지내면서 나중에는 좋아해줬던 것 같아요. 다른 부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었죠.

나중에는 팀 동료들도 그런 부분을 인정해줬어요. 몇몇과는 지금도 연락하고, 월드컵 때는 와서 응원도 해주기도 했어요. 좋은 친구가 되었죠. 처음 시작할 단계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였으니까요.

팀 동료들에게 실력으로 인정받게 된 특별한 계기는 있었나요?

사실 실력은 거기서 뛰는 선수들보다 부족했죠. 그래도 일단 열심히 했어요. 게임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먼저 나가서 개인 운동도 하고 그랬어요. 끝나는 날까지 좋은 이미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런 부분에 대해서 팀 동료들이 '얘는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해줬고, 높이 평가해줬던 것 같아요. 그런 점 때문에 선수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배울 수 있었죠.

관련해서 안정환 선수의 열성팬이 질문을 올려주셨네요. 이탈리아 진출 초반이었을 겁니다. 몸싸움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교체해달라고 사인을 보내는 등 소극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줬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유벤투스와 같은 강팀을 만나서도 큰 자신감을 보여주며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이것을 이겨냈는지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치밀한전략님)

에피소드라기보다는 처음에 리그 흐름을 적응하는데 6개월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팀이 움직이는데 나만 처져있고 그랬어요. 팀 밸런스를 맞추는 것에 있어서 아시아 축구와는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그 흐름을 배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경기를 뛰다보면 혼자 바보처럼 서있고, 팀과 제대로 맞지 않고 그랬죠. 팀 동료들이 " 너는 항상 톱니바퀴 속에서 혼자 빠져나와 있으니까 빨리 맞춰라 " 고 약 올리곤 했죠.(웃음) 그러면서 많이 가르쳐주고 그랬던 거 같아요. 감독님과도 계속 미팅을 하면서 배웠고요. 그 무렵에 '축구가 이렇게 많이 다르구나'라는 것을 많이 느꼈었죠.

역시 경기 템포 등에서 많이 달랐던 건가요? 그리고 이탈리아리그가 전술적으로는 가장 발전된 리그라고도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템포도 빠르고, 스피드도 빠르고, 힘도 좋고, 무엇보다 머리가 워낙 좋아서 교묘한 파울도 잘하고, 수비도 강해요. 그래서 공격하기가 힘들었죠. 그리고 말씀하셨듯이 전술적인 면에서는 확실히 이탈리아리그가 제일 강한 것 같아요.

비슷한 이야기이겠지만, 쿠엘류 감독 시절에 당시 박성화 수석코치님이 " 국내에서는 안정환이 많이 안 뛰는 공격수로 인식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가장 많이 뛰는 공격수 중 하나이다. 이탈리아에서 많이 배운 것 같다 " 라는 이야기였어요.

확실히 이탈리아에 가서 체력적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발전했던 것 같아요. 뛰는 양이나 몸싸움, 헤딩 등이 많이 늘었죠. 당시 페루자의 코치나 선수들에게 부족한 것을 많이 배웠어요. 저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는 선수들에게 배우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그리고 다른 팀과 경기를 하면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으니까 눈으로만 봐도 배울 수 있겠더라고요. 그 때가 23~24세 무렵이었으니까요.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유벤투스전에서의 플레이는 정말 대단했었습니다. 당시를 기억하세요?

예. 굉장히 부담이 많이 가는 경기였죠. 당시 유벤투스는 세계에서 잘하는 선수가 다 있었기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그 선수들 축구화만 쳐다봐도 빛이 나는 것 같았었거든요.(웃음) 지단, 다비즈, 델 피에로, 트레제게까지 훌륭한 선수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도 '어차피 나는 배우러 왔고, 도전하러 온 것이니까 한번 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뛰었죠. 경기가 끝나고 나서는 거의 탈진할 정도였어요. 너무 힘들어서 집에 누워있었던 것 같네요.(웃음) 팀에서도 그 경기로 인해서 더 인정을 해줬죠.

이탈리아에서는 바죠, 델 피에로 등과 같은 유형의 판타지스타에 대해 강한 동경을 갖고 있습니다. 안정환 선수 역시 판타지스타의 면모를 갖고 있는 선수인데요. 현지에서도 그런 부분에 대한 반응이 있었나요?

예. 스타일이 거의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해줬어요. 저도 어렸을 때 로베르토 바죠 같은 선수의 비디오를 봤고, 델 피에로를 TV에서 보면서 그 선수들의 볼 터치 등을 배우려고 노력했었거든요. 제가 배우려고 하다 보니 스타일이 더 비슷해지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안정환 선수의 볼 터치나 반 박자 빠른 타이밍의 슈팅 등은 독보적이었어요. 특별한 비결이 있나요?

중-고등학교 때 그런 연습을 많이 했었습니다. 반 박자 빨리 슈팅을 하는 훈련 프로그램이 있거든요. 그 때는 축구가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했죠. 그런 훈련은 팀 훈련으로는 안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많이 했어요. 빨리 습득할 수 있는 어린 나이에 그런 연습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제 몸에 배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어요.

생각해보면 페루자 시절 동료들이 훗날 빅 클럽으로 많이 이적했어요. 부러운 마음도 들었을 것 같은데요.

굉장히 부러웠죠. 당시 주장이 마테라치(현 인터 밀란 소속)였고, 그 외에도 유벤투스나 인터 밀란 등으로 간 동료들이 많았죠. 너무 좋은 선수들이었고, 전부 빅 클럽으로 갔어요. (당시 팀 동료였던 바이오코는 유벤투스, 리베라니는 라치오로 이적했었다. 또한 그로소는 인터 밀란과 리옹을 거쳐 현재 유벤투스에서 뛰고 있다. -편집자 주)

이탈리아에서의 2년은 안정환 선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축구 인생이나 제 삶이나 다 바꿔놓은 것 같아요. 거기에 가서 축구를 정말 많이 배웠고, 노력을 해서 2002 한일월드컵 때 골을 넣을 수 있었죠. 그리고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고, 제가 거기에 일조할 수 있었고요. 또 한편으로는 2002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제가 골을 넣어서 제 축구 인생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요. 어쨌든 기쁨과 슬픔을 전부 안겨줬던 리그였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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