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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人터뷰8 -황선홍上] 94월드컵 부진보다 98월드컵 좌절이 더 고통

정민건TV 2009. 12. 13. 04:17

 

월드컵 특집 인터뷰 8번째 주자로 황선홍 감독님을 인터뷰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시즌도 끝난 상황인데,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시즌이 끝나고, 드래프트 때문에 안산에 가서 대학축구도 봤고, 드래프트 끝난 이후에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다시 소집해서 내년 시즌에 대비한 훈련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바로 예전 이야기부터 들어가겠습니다. 감독님이 처음 대표팀에 데뷔했던 것이 건국대 시절인 1988년 아시안컵이었습니다. 당시 팀의 막내로서 대표팀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은 어떠셨나요?

얼떨떨했죠. 당시 대표팀에는 최순호 감독님, 변병주 감독님, 박경훈 감독님 등 엄청난 선배님들이 계셨어요. 저는 그 때까지만 해도 대학선발이나 대표 B팀 등을 한 두 번 경험한 것 외에는 없었거든요. 올림픽대표팀이나 국가대표팀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었죠. 한편으로는 굉장히 기쁘면서도 정신없이 보냈던 것 같아요. 갑작스런 발탁이라 당황하기도 했고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인데, 이회택 감독님이 대표팀에 발탁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회택 감독님이 한양대 감독님으로 계실 때 제가 있었던 용문고와 연습경기를 많이 했어요. 고등학교 때 저를 눈여겨보신 것 같고, 건국대 진학한 후에도 계속 관심을 가져 주셨어요. 제가 당시에 파워 면에서는 많이 떨어졌지만, 문전에서의 감각이나 축구 센스 등은 괜찮았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을 보고 감독님이 선택하지 않았나 싶네요.

 

공교롭게도 1988년에 아시안컵 일본전을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그 경기에서 골까지 넣으셨습니다. 당시를 기억하시나요?

예. 물론이죠. 그 때 경기 당일 아침에 감독님께서 부르시더라고요. 팀 닥터와 같이 갔더니 선발로 나가니까 마사지를 해주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대학 때는 마사지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마사지를 처음 받았을 때였는데, 그 다음부터는 긴장해서 낮잠도 잘 안 오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어요.(웃음)

준비하면서 '이번 경기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어떤 게 있을까'라고 고민을 했었는데, 실력으로 선배님들보다 잘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운이 좋아 골도 기록하고 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일본을 이길 수 있어서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대학생의 신분으로 90 이탈리아 월드컵 무대를 밟으셨습니다. 최종명단에 포함되리라고는 예상하셨는지요?

예. 그 때는 계속 경기를 나갔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했었죠. 무엇보다 월드컵에 나가서 득점을 하는 것이 제 어릴 적부터의 목표이고 꿈이었어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한국은 32년 동안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을 때라 월드컵에 나가고, 거기서 득점을 올리는 것은 최고 목표였습니다. 결국 이탈리아 월드컵에 나가면서 꿈을 이뤘지만, 득점을 올리지는 못했죠. 아쉬움이 남습니다.

 

벨기에와의 1차전에서 당당히 선발 출장을 하셔서 풀타임을 소화하셨습니다. 당시 세계적인 무대에 처음 서는 것이었는데, 본인 실력의 어느 정도까지 발휘했다고 생각하시나요?

60~70% 정도? 결정적인 기회는 없었어요. 제가 자신 있었던 부분은 헤딩이었는데, 코너킥 상황에서 헤딩슛을 넣을 수 있는 찬스가 한 번은 있었는데 제대로 못 맞췄죠. 그 기억이 아직 남아 있어요. 어쨌든 만족스럽게 제 능력을 다 발휘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 뿐만 아니라 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가진 능력을 100% 완전히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벨기에전은 상당히 무기력했던 경기로 기억합니다. 경기장에서 직접 뛰셨던 입장에서는 어떻게 느끼셨는지요?

당시까지만 해도 외국 팀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많이 부족했죠. 전력 분석이라든지, 시차적응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이 굉장히 미비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기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물 안 개구리였죠. 아시아권 내에서의 활동이 많았지만, 국제 대회 경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을 발휘하기에는 힘들었던 부분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 때보다 훨씬 정보를 많이 수집할 수 있기 때문에 경쟁력을 많이 갖췄다고 봐요.

 

스페인과의 2차전은 결장하고 3차전 우루과이전에서 전반 43분에 변병주 감독님을 대신해 투입되셨습니다. 경기 내용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이미 2연패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3연패를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이기겠다는 열망이 강했는데, 0-0으로 가다가 막판에 세트피스로 실점을 내주면서 0-1로 졌죠.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이전 월드컵도 그렇고, 이후에도 그랬고...1차전과 2차전은 상당히 안 좋았다가 마지막 경기부터 서서히 흐름을 타는 경우가 많았죠. 이탈리아에서도 그런 사이클이 아니었나 싶어요.

 

90 이탈리아 월드컵은 감독님으로서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세계축구였습니다. 직접 경기를 치르면서 느꼈던 차이는 무엇이었나요?

그 당시에는 제 체격이 지금처럼 체중이 많이 안 나가고 말랐었죠. 키는 182~3cm에, 체중이 71~2kg 나갔을 무렵이라 파워를 더 붙여야 세계 축구에 대한 경쟁력이 생기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도 느꼈어요.

 

홍명보 감독님과 함께 유이한 대학생 선수로 출장했고, 이후 한국축구의 쌍두마차로 함께 해왔습니다. 아무래도 이 무렵에 팀의 막내로서 두 선수만의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됐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월드컵에 나가기 전에 방을 같이 쓸 때도 있었고, 그 당시에는 장비 담당이 없으니까 볼을 비롯해, 하물며 고추장 통, 김치 통 같은 것도 우리가 관리하고 갖고 다니고 그랬어요. 거의 붙어 다녔다고 할 수 있죠.(웃음)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드래프트제에 반발하시면서 독일행을 결정하셨습니다. 개인이 큰 조직을 상대로 맞선 셈인데,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것 같은데요.

첫 번째는 우리가 가고 싶은 팀을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이 제일 컸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가치를 틀에 얽매여서 폄하 받는 것이 상당히 불만족스러웠죠. 틀림없이 이런 것들이 우리 후배들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욕을 먹을 수도 있는 것이고, 제재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결정을 하게 됐습니다. 홍명보 감독과 함께 의기투합을 해서 실행했고, 결국은 2~3년 후에 드래프트가 없어졌으니까 우리가 해야 될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반발하셨던 드래프트제가 현재 다시 부활한 상태입니다. 지금은 지도자이기에 당시와는 입장이 다른 상황이신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시장 경제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다시 드래프트를 하고 있지만, 이런 부분들은 없어져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대에 역행하는 것은 상당히 좋지 않다고 봐요. 임시방편일 뿐인데, 결국은 축구가 지금 1~2년 하고 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발전적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에서 보낸 2년은 어떠셨나요? 레버쿠젠 아마추어와 2부리그의 부퍼탈에서 활약했는데, 독일에서의 2년이 감독님께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좋은 영향은 아니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분데스리가는 지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보다 유럽에서 더 인정받는 최고 권위의 리그 중 하나였죠. 만약에 독일에서의 생활이 긍정적으로 제 축구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면 거기에서 성공해서 계속 유럽에서 활동을 하고 있지 않겠어요.

은퇴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저를 괴롭혔던 부분 중 하나도 그 당시에 입었던 부상이었죠. 그것 때문에 선수 생활 내내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었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경험을 얻은 셈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부상이 치명적이었습니다. 어쨌든 독일에서 입었던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결국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골과 관련된 좋은 기록들은 모두 갖고 싶은데, 2년 동안 K-리그를 뛰지 못하면서 그만큼 손해를 봤고, 신인왕 문제도 마찬가지였고요. 도전 자체는 상당히 좋았지만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않다고 봐야죠.

 

당시 부상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좋은 활약을 했고, 상위리그로 갈 수 있는 계기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드래프트에 반발하고 포항과 3년을 약속하고 독일에 갔어요. 당시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통역도 없고 밥도 혼자 해먹었어요. 차범근 감독님처럼 되겠다고 어린 나이에 밥통까지 들고 갔을 정도니까요.(웃음) 첫 해에는 레버쿠젠 아마추어 팀, 즉 2군에서 플레이하면서 좋은 경험을 쌓았고요. 다음 해 분데스리가 2부리그 팀인 부퍼탈에 가서 스타트가 상당히 좋았죠. 5경기에서 3골-2도움을 기록했으니까요. 굉장히 이슈도 되었던 때인데, 부상을 당했어요. 지금도 '그 때 다치지 않고 기회가 더 있었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까'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굉장히 아쉬운 순간 중 하나였죠.

 

결국 원하시던 포항 유니폼을 입고 K-리그로 복귀했습니다. 국내에 복귀한 느낌은 어떠셨어요?

독일에서 십자인대와 연골 수술까지, 두 번의 수술을 했기 때문에 국내에 들어와서 바로 경기를 뛰지는 못했어요. 6개월 정도 재활하고, 대표팀에도 합류해서 경기를 뛰고, 그 다음 시즌부터 나왔어요. K-리그를 뛰는데 있어서 독일에서의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되긴 했어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경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94 미국 월드컵은 감독님에게는 잊지 못할 대회였을 겁니다. 1차전 스페인전에서 풀타임을 소화했는데, 0-2의 순간과 2-2 동점의 순간을 모두 맛보셨습니다. 스페인전을 돌이켜본다면 어떠신가요?

사실 그 때 (김)주성이 형이나 홍명보 감독과도 전반전에 0-0으로 비긴데다가 상대 선수 1명이 퇴장 당한 상황이라 첫 승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입을 모아서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런데 본의 아니게 2실점을 하면서 패색이 짙었는데, 홍 감독이 한 골을 만회하고, 마지막에 서정원 코치가 골을 넣어서 2-2로 비겼죠. 스페인과 비기면서 볼리비아를 꺾으면 16강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물론 첫 경기를 이기지 못해 아쉽기는 했지만, 다음 기회가 있으니까 볼리비아를 이기면 올라가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2차전 볼리비아전은 감독님의 안티팬들이 항상 이야기하는 경기입니다.(웃음) 당시 여러 차례 좋은 기회를 놓치면서 팬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었죠. 당시 심리적으로 많이 쫓겼던 탓이었나요?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만.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어요. 미국 월드컵 가기 전에 준비를 많이 했었거든요. 사실 잘 해보려고 타워호텔에서 합숙할 때는 하루도 안 빼놓고 남산 팔각정까지 아침에 뛰어 올라갔다 내려올 정도로 열정을 많이 가지고 했었어요.

물론 볼리비아전에서 여러 차례 슈팅이 빗나갔지만 선택에 대해서는 전혀 부끄럼이 없어요. 제가 결정을 하고 운동장 안에서 판단을 했던 것이기 때문이죠. 슛 미스를 할 수는 있어도 그 판단에 있어서는 제가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심적으로는 많이 힘들었던 시기죠. 그렇지만 팬들의 질타 때문에 더 오기도 생기고, '더 잘해야겠다, 내가 갖고 있는 능력을 확실히 인식시켜야겠다'는 목표 의식도 생겼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이가 젊었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어요.

 

관련해서 축구팬의 질문입니다. 볼리비아전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셨고, 그 이후 리그에서도 골문 50cm 정도에서도 기회를 날릴 만큼 심적으로 상당한 부담과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94년 당시 느꼈을 심적 부담의 정도와 이런 심적 부담을 날릴 계기나 원동력이 있었는지요? (서울베어스님)

확실히 부담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사실 슈팅을 열 번 시도해서 그것이 골대 안으로 다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인데, 당시에는 '혹시나 이 볼이 뜨면 어떻게 할까'라는 부담이 상당히 많았어요. 사실 슈팅하다보면 뜰 수도 있잖아요. 결국은 자신감인데, '볼이 뜨면 어쩌나'라는 부담감 때문에 타이밍을 놓친다든가, 볼이 제대로 안 맞는다든가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부분은 시간이 걸려서야 해결이 됐어요. 당장 없어질 수는 없었죠.

 

여러 축구팬들이 독일전 골에 대한 질문을 해오셨는데요. 독일전에서 고대했던 골이 터졌지만, 골 세레머니 속에 기쁨보다는 울분이 담겨져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세레머니는 어떤 심정으로 나오게 되었는지요? (청노루님, sori님, 란마님)

맞습니다. 그 분이 정확히 보셨어요. 앞서 말했지만, 제가 선수를 하면서 첫 번째 목표가 월드컵에 나가서 골을 넣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독일전에서의 골은 기쁨보다는 울분이 더 많았죠. 진작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 '왜 이제 터졌냐'하는 마음이 훨씬 강했어요. 골을 넣고도 별로 기분이 안 좋았던 것은 그 때가 처음이 아닌가 싶어요.

사실 독일전에서의 골은 쉽지 않은 골이었어요. 굉장히 움직임이 좋았고, 볼이 들어오는 것도 좋았고, 감각적으로 골키퍼를 제치고 골을 넣는 동작까지,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골이었죠.

 

그런 시련을 겪은 후 K-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치셨습니다. 2번의 월드컵, 특히 미국 월드컵이 선수로서의 잠재력을 끌어냈다고 봐야할까요?

그렇죠. 개인적으로는 제가 갖고 있는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을 했어요. 월드컵도 마찬가지고, 월드컵을 다녀온 이후 K-리그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다가 비로소 제가 운동장에서 표출할 수 있는 기술적인 면이나 체력적인 면, 컨디션 등이 조금씩 갖춰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95년과 96년에 상당히 좋았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93년에 수술하고 나서 몸의 밸런스나 여러 가지가 좋지 않았었거든요. 아직 젊고 주위에 기대하는 분들이 많으니까 의욕은 앞선 상황이었지만, 세부적으로는 뭔가 마음이 급하고, 몸의 균형은 깨져있어 전체적으로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에는 제 페이스를 찾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거예요. 없던 실력이 갑자기 느는 것은 아니고, 제가 갖고 있던 페이스를 찾지 않았나 생각해요.

 

특히 95년에 8경기 연속골을 터트리셨는데요. 그 순간은 감각이 절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팀도 후기리그에 우승을 했으니까 팀이나 저 개인적으로나 최고조였던 것 같아요. 볼 감각도 그렇고요.

 

98 프랑스 월드컵은 감독님에게는 최고의 전성기에 맞이한, 최고의 무대가 될 수 있는 대회였습니다. 차범근 감독님 역시 대표팀 전술의 핵을 황 감독님에게 맞춘 상황이었고요. 그런 면에서 부상을 당했던 중국전은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실 것 같은데요.

속이 많이 상했죠. 사실 94 월드컵 때 팬들의 질타를 받았을 때보다도 더 힘들었던 때가 아닌가 싶네요. 당시를 돌이켜보면 97년에 또 한 번의 무릎 수술을 해서 1년 4개월 정도 재활훈련을 하고 비로소 대표팀에 합류했어요. 98 월드컵에 제 모든 것을 다 걸 정도였죠. 94 월드컵에서의 아쉬움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런 것을 만회하고 싶었고, 제가 갖고 있는 능력을 다 표출해내기 위해서 힘든 재활훈련도 다 참아냈습니다. 그런데 월드컵을 앞두고 중국전에서 불행하게 다치는 바람에 경기에 나설 수 없었으니 많이 힘들었을 수밖에 없었죠.

 

당시 차범근 감독님은 출장이 불투명한 상태임에도 황 감독님을 최종명단에 포함시키면서 어떻게 해서든 나중에라도 투입시키려고 노력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황 감독님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갖고 있으셨나요?

있었죠. 마지막 벨기에전을 앞두고 차 감독님이 부르셔서 방에 갔었어요. 저도 마지막 게임이라도 뛰기 위해 진통제도 6번 정도 맞았었으니까요. 단 10분이 되더라도 뛰려고 했었죠.

그런데 그 날이 감독님이 경질되는 날이었어요. 벨기에와 경기하기 전에 부르셔서 " 마지막 경기 뛸 수 있겠냐 " 고 물어보시더라고요. " 힘들 것 같다 " 고 말씀드리는 와중에 전화가 걸려 왔는데, 사모님이셨던 것 같아요. 통화 도중에 감독님이 " 그러면 들어가야지 " 라고 말씀하시는데 느낌이 안 좋더라고요. 내려가서 미팅을 하는데 그 소식을 접했죠. 그 자리에 제가 있었던 겁니다.

저도 그렇고, 차 감독님도 그렇고, 상당히 안 좋은 기억으로 남는 대회였던 것 같아요. 아쉬움도 많이 남고요.

 

사실 당시 대표팀 자체도 황 감독님을 공격의 중심으로 감안하고 모든 시스템을 만들어갔는데, 그것이 어긋나니까 모든 것이 잘 안 풀리게 된 것 같아서 팬들도 답답했었습니다.

저도 당연히 답답했어요. 나이도 당시에 31세(만 30세)였으니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해보려고 했던 건데 안타깝죠.

 

부상을 입힌 중국 선수에 대한 원망도 정말 대단하셨을 것 같은데요. 제 주위에도 '황새 팬클럽'이었던 분들이 있는데, 그 중국 선수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고도 말합니다.(웃음)

그렇지는 않았어요. 사실 그 선수가 고의적으로 깊은 태클을 해서 다쳤으면 그런 마음도 있었겠지만, 축구를 하다보면 일부러 나를 해하려고 한 건지 아닌지는 알거든요. 그 상황은 그런 건 아니었어요. 축구를 하다보니까 부딪힐 수밖에 없었는데, 그 선수가 나중에 공식적으로 미안하다고 언론에 사과도 하고 그래서 원망하는 마음은 별로 없었어요.

 

그렇게 월드컵이 좌절된 후 일본 진출을 단행하셨습니다. 일본 진출을 결정하신 배경은 무엇인지요?

사실 심적으로 한국에서 버티기가 상당히 어려웠었습니다. 98 월드컵을 잘 치러내고 한 번 더 유럽에 대한 기회를 갖고 싶은 마음이 굉장히 컸었는데, 그것도 좌절되었고요. 국내에서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것 같고, 94 월드컵보다 더 많이 힘들었었죠. 축구팬들께서는 '또 못할까봐 아프다고 핑계 대고 안나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저로서는 상당히 힘들었던 시기였죠. 돌파구가 필요했고, 분위기 전환도 필요했고...그래서 선택한 것이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뛰자마자 바로 다음 시즌에 득점왕에 오르셨습니다. 해외에서의 적응이란 것이 쉽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적응하셨는지요?

사실 축구라는 것이 제가 좋아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시작했던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 저에게 삶의 어려움으로 다가왔었어요. 엄청난 무게감이 저를 짓누르고 억압하고, 제가 좋아서 하는 것임에도 축구로 인해서 제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상당히 컸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죠. 어차피 해도 1~2년이라고 생각했고, 2002 월드컵까지는 생각하지도 않았었으니까요. 제가 좋아해서 시작한 것이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하는 것이니까 이왕 하는 거 재미있고 즐겁게 1~2년만이라도 하자는 생각이 많았어요.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축구를 하니까 오히려 그 동안의 경직되었던 여러 가지 것들에게서 탈피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좋은 결과를 얻어냈던 것 같습니다.

 

원래는 2002 월드컵을 생각하지 않으셨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어느 시점에 2002 월드컵에 대한 생각을 하셨나요?

99년도에 J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이후였던 것 같아요. 2002 월드컵까지 2년 6개월 정도니까 자신감이 많이 생기더군요. 대표팀에도 합류해서 계속 경기를 해보니까 '아직은 충분히 할 수 있겠다. 내가 몸 관리를 잘하면 2002년에 기회를 가질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즉 2000년부터는 2002 월드컵으로 모든 초점을 맞췄죠.

 

2002 한일 월드컵은 감독님의 마지막 월드컵이었고, 그만큼 훈련할 때나 경기에서나 비장함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당연하죠. 워낙 월드컵에서 굴곡이 심했고, 응어리졌던 것이 많잖아요. 제일 속상했던 것은 축구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인정을 못 받는 것이었습니다. J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고, K-리그에서 연속골을 넣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죠. 정말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했어요.

우리가 그 전까지 월드컵에서 1승도 하지 못했는데, 대표팀에서 14년 가까이 최전방을 책임졌던 공격수로서 월드컵에서 1승도 못하고 은퇴한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획을 긋는 전환을 마련해보고 싶어서 비장하게 준비를 했죠.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2002 월드컵 폴란드전은 축구팬들에게도, 감독님에게도 잊지 못할 경기였을 텐데요. 선제골을 터트리셨을 때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실 것 같습니다. 감독님의 안티팬들이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했고요.(웃음)

그렇죠.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너무 기다렸던 순간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팀이 이겨서 월드컵 첫 승을 했기 때문에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죠.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단 한 경기로 모든 것을 평가받는다는 것 자체가 조금 아이러니했죠. 깊이가 없는 부분들이 아쉬웠어요. 제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좋지만, 폴란드전에서의 그 한 골만으로 제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골을 넣었을 때는 제가 워낙 골에 대한 절실함이 컸기 때문에 너무 기분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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