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 人터뷰11 -최순호下] "아름다운 축구를 꿈꿨다"
Q.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역시 16강 진출에 대한 희망이 컸던 대회였습니다. 아시아예선을 파죽지세로 통과했고, 최순호-김주성 콤비에 대한 기대도 컸죠. 팀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 80년대 중반에 주성이가 등장했고, 80년대 후반에는 선홍이가 새롭게 등장했죠. 그러면서 저를 포함해 3명을 중심으로 공격이 흘러갔고, 팀 균형도 새롭게 짜여졌습니다. 그리고 경기력도 좋았어요. 제가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주성이와 선홍이가 좋은 활약을 펼치며 88년 AFC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고요.
이후에 90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예선부터 제가 가담했는데,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는 두 선수가 주역이었고, 저는 조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무패 행진이었고, 거의 실점도 하지 않는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지었죠.
Q. 이 무렵부터인가요? 포철 시절에도 그렇고, 스트라이커가 아닌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경기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기 시작하셨어요. 미드필더 역할이 더 편하셨던 건가요?
- 축구 선수로서의 삶을 돌아보면 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최전방 스트라이커 역할을 수행했고,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공격수와 미드필더를 오가기 시작했어요. 70년대 중후반부터 이야기된 토탈사커를 우리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흔하지는 않지만 올라운드 플레이어에 대한 개념도 나타났죠. 그러면서 한홍기 선생님께서 그런 구상을 하셨던 것 같아요.
저에게 늘 요한 크루이프에 대해 이야기하셨고, 크루이프의 신장이나 플레이 스타일이 저와 비슷하다며 잘 연구해보라고 조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의도적으로 크루이프의 경기 비디오를 많이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 무렵에 등번호를 14번으로 바꿔단 것도 요한 크루이프의 영향 때문이었죠.(웃음) 그러다보니 제 플레이 스타일도 바뀌게 되었고, 사실 스스로에게 혼란이 올 때도 있었어요.
어떤 감독님은 저에게 공격수로서의 역할만 강하게 요구했고, 어떤 감독님은 공격수와 미드필더의 역할을 모두 요구했죠. 80년대 초반에는 주위에 좋은 선배들이 많아서 도움을 많이 받아 골도 많이 기록했는데, 80년대 중반 이후 대표팀에 변화가 생기고 선수들도 자주 바뀌면서 플레이가 잘 이뤄지지 않았고요. 그러면서 미묘하게 그 시기에 제 플레이 스타일이 바뀌기 시작한 겁니다.
최전방 1선보다는 2선에서 플레이하는 것을 좋아하게 됐죠. 오히려 84년 LA 올림픽 아시아예선에서는 거의 미드필더에 가까운 역할을 하면서 좋은 플레이를 펼치기도 했죠. 실제로 80년대 중반 들어서부터는 공격 역할보다는 게임을 만드는 역할이 더 재미있었고,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지 패스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동료들도 그런 부분을 인정해줬고, "네 패스는 정말 받기 좋다. 편하다"는 칭찬을 많이 해줬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 때문에 포철에서는 이회택 감독님과도 마찰이 있었어요. 팀을 맡은 감독과는 늘 문제가 되는 부분이기도 했어요. 반면 대표팀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소속팀에서는 제 고집을 피울 필요도 있지만, 대표팀에서는 감독들이 원하는 플레이를 했기 때문이에요.
Q. 아시아예선에서의 독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3연패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던 것 같나요?
- 그 시기만 해도 이후에 월드컵을 준비하고 치르는 과정과 비교했을 때 많이 부족했어요. 그것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문제였죠. 모두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네요.
Q. 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와 맞붙었는데, 당시 스타인 프란세스콜리와 감독님의 플레이는 매우 유사한 느낌이었어요. 직접 뛰시면서 그런 것을 느끼셨나요?
- 예. 저 역시 그런 스타일이었죠. 처음에 대표팀 뽑혔을 때는 완전히 타겟형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많이 했고, 그래도 주위에 좋은 선수들이 많아 다득점을 기록할 수 있었어요. 그 이후에는 좀 더 자유스럽게 플레이를 했죠. 대체적으로 외국의 특별한 선수들을 보면 자유스럽게 움직이잖아요. 감독도 그것을 허용하고요.
프란세스콜리의 경우 실제 경기를 해봤지만, 역시 우수한 선수였어요. '나도 저런 플레이를 원하고 있는데, 저 선수는 그렇게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Q. 사실 감독님의 현역 시절 플레이를 보면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베르캄프나 베르바토프 등의 모습도 연상되고요.
- 저로서는 기분 좋은 이야기입니다.(웃음) 저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으니까요.
우선 경직되지 않고, 재미있고 즐겁게, 이왕이면 좀 더 멋있게, 부드럽게, 때로는 다이내믹하게...지금도 제가 추구하는 축구이죠.
축구는 그런 균형이 잘 이뤄져야 합니다. 리듬에 템포가 있어야 하고, 섬세하고 세밀해야 하고, 강력함과 다이내믹한 면도 있어야 하죠. 이런 것들이 조화를 이뤄야만 아름답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도 그림의 폭이 서로 균형을 이뤄야 아름답잖아요. 사람은 작은데 나무는 크다, 또는 나무는 작은데 사람이 크다, 이러면 균형이 맞지 않죠.
지금도 그렇지만, 선수 시절에는 가능한 멋있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폼생폼사라고도 하지만 제가 폼을 중시했어요. 요즘 골프도 하지만, 그것도 스코어보다는 폼이 멋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죠.(웃음)
월드컵이 끝나고, 91년에 다시 친정팀인 포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다시 포항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88시즌에 럭키금성(현 서울)으로 갔을 때는 사실 축구에 대한 회의를 많이 느끼고 은퇴까지도 생각했다가 선배들의 조언으로 계속 했었습니다. 당시 여러 팀에서 저를 원했는데, 럭키금성이 청주를 연고로 했었고, 제가 그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선택했죠. 세 시즌 동안 뛰면서 나중에는 다른 계획을 많이 세웠어요. 좀 더 일찍 은퇴해서 외국에 나가 지도자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었죠.
그런데 포철에서 다시 한번 와서 해보자는 이야기를 했어요. 옛 정도 있고, 미련도 있어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91시즌을 소화했는데, 그 때 계획적으로 통산 100경기에 출장하고 쉬었어요. 그래서 프로축구 통산 기록이 딱 100경기로 나옵니다.(웃음)
Q. 은퇴 후에 프랑스로 건너가셔서 2년간 선수 생활을 하시면서 지도자 공부도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떤 계기로 가게 되신 건지요?
91년 중반 쯤부터 준비를 하기 시작했어요. 92년부터는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처음에는 4년 정도 공부할 계획을 잡았죠. 프랑스와 영국, 독일 중 하나를 선택하려고 했고, 사전답사도 했어요. 다 괜찮았는데, 당시 98 월드컵이 프랑스로 결정 나는 시기였고, 개인적으로는 프랑스가 유로대회에서는 좋은 성적을 내면서 세계대회에서는 조금 약한 느낌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죠.
결국 프랑스를 선택해서 가족들과 같이 갔는데, 축구에 관심이 많은 교민 한 분이 이런 저런 팀들에게 연락해서 한국 선수가 프랑스에서 오는데 기회가 없냐고 수소문했더라고요. 그래서 한 팀이 보자고 해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 남부의 로데스라는 2부리그 팀에 가서 테스트를 받게 됐죠. 당시만 해도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었을 때였고, 1경기 뛰고 나서 1경기 더 해보자고 하더니 바로 계약이 되었어요.
나도 잘됐다고 생각했죠. 이것도 생생한 공부가 될 테니까요. 프랑스 2부리그면 약하지도 않고, 훈련도 하면서 경기 통해 경험도 쌓고, 훈련과정도 지켜볼 수 있고요. 또 계약하면서 약속했던 것이 지도자 연수 등이 있으면 보내주겠다고도 했거든요. 그 때를 돌이켜보면 92년 6월에 유럽으로 가서 스웨덴 유로92를 보고, 프랑스로 들어가 준비하다가 2부리그 선수로 등록이 되어 활동했네요.
프랑스 2부리그는 18개 팀이 34경기를 치렀는데, 제가 25~26경기 정도 뛰면서 골도 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에서는 여러 포지션을 다 소화했어요. 미드필더, 공격수, 심지어 중앙수비수로 리베로 역할도 했습니다.(웃음)
어쨌든 거기서 훈련과정도 보고, 실전도 경험하고, 팀 스케줄을 어떻게 짜는 지도 지켜봤죠.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지도자 연수도 병행했어요. 1년 후에는 파리로 와서 주로 파리 생제르망, 그리고 옥세르의 훈련 과정과 팀 운영, 훈련 방법, 선수관리, 유소년 육성 등을 관찰했습니다. 당시의 경험들이 지금 지도자를 하면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그것을 토대로 많은 계획을 세웠고, 우리 실정에 맞춰 변화도 주고 있죠.
포항에서 1년을 뛰고 은퇴하셨는데, 아직 한창 뛰실 수 있는 나이였어요. 축구팬 Kalbili님도 비슷한 질문을 하셨는데요. 더 뛸 수 있었고, 센츄리 클럽 가입도 몇 경기 남겨놓고 있지 않았던 상황입니다. 왜 그렇게 빨리 선수 생활을 접으셨는지요?
결론적으로는 후회가 됩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선수들이 오랜 기간 운동하는 분위기가 많이 만들어졌어요. 감독들도 그런 부분에 대한 배려가 많아졌고요. 그러나 당시에는 30세를 넘기면 감독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웃음) 조금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나이가 들었다고 하고, 바로 교체하면서 출전도 시키지 않고 그랬죠.
또한 선수들도 적응이 안 되어 있었어요. 과거에 날리던 선수들이니까 밀려나는 것을 참지 못한 거죠. 저를 포함해서 최상국, 이흥실, 박경훈 이런 선수들이 다 마찬가지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좋은 시기인데도 그만둔 선수가 많았습니다. 다들 더러운 꼴 보기 싫으니까, 자존심 상하니까 그만둔 것이죠. 그것만큼은 후회가 됩니다. 그 때 그걸 견뎌냈어야 하는데, 어떤 형태로든 좀 더 축구를 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조금 변명을 하자면 뛸 수 있는 환경이 조금은 만들어져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A매치의 경우에도 그런 것에 특별히 관심을 갖거나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사실 90년대 초반에 FIFA 쪽에서 102경기에 출장했다고 인정을 받았어요. 그런데 이후에 몇 경기들이 삭제가 되면서 100경기를 채우지 못하게 됐죠.
은퇴 후에 한동안 지도자 생활을 하시지 않고, 고향 청주에서 축구교실 등을 하셨었는데요.
원래 프랑스에서 4년 정도 있을 목표로 갔었어요. 프랑스로 갈 때에는 포철 코치로 계약되어 있어서 팀의 지원으로 연수를 갔는데, 팀에 변화가 생기면서 포철의 요청으로 계약을 해지했죠. 그러면서 나머지 1년은 제가 비용을 충당했고요. 그 이후에 청주로 돌아와서 예전에 만들어놨던 어린이축구교실을 하면서 지내다가 99년에 포항 코치로 컴백하게 됐습니다.
말씀하셨다시피 99년에 친정팀 포항의 코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선수로 뛰는 것과 지도자로 팀을 이끄는 것, 비교를 한다면 어떤 차이가 있나요? 아무래도 지도자는 스트레스도 많이 받을 것 같은데요.
제가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은 아닌데, 굉장히 어려운 면은 있었어요. 다만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지도자의 덕망이나 자격요건 등에 대한 부분을 많이 생각했고, 단순한 감독이 아닌 매니저의 개념, 결국 팀은 비즈니스 차원에서 운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분도 느꼈죠. 그리고 구단과 감독간의 관계, 감독과 선수간의 관계, 훈련 방법 등에 대해서도 정립할 수 있었고요.
무엇보다 이런 부분들이 복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 감독이 중심이 되어 여러 사람들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힘들다는 것 등을 실제로 부딪치면서 알게 됐습니다. 포항 시절을 통해 감독이라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됐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감독님을 유심히 지켜봤던 입장에서 보면 포항에서의 축구와 강원에서의 축구는 많이 다릅니다. 솔직히 강원에서의 축구가 훨씬 다이내믹한 면이 있는데요. 축구가 이렇게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습니다. 선수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똑같아요. 다만 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과의 차이였어요.
두 가지 측면인데, 하나는 축구입니다. 선수들에게 같은 요구를 했지만, 당시에는 더 완벽하게 강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관대했어요. '프로 선수들이니까 이 정도로 해주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이 포항 시절이었고, 지금은 '프로 선수들이라고 해도 할 것은 해야 한다, 꼭 필요한 것은 시켜야 한다'라고 바뀐 것이죠. 포항 시절에는 무엇을 이야기한다 해도 설익은 모습이었다면, 강원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보완되어 아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짜여 지니까 외부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스스로 좀 더 냉정해졌다는 것이죠. 예전에 관대했다는 것은 너무 너그러웠다는 것인데, 잘한 건 잘했다,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야 했어요. 그 때는 잘했다는 이야기만 했지, 잘못했다는 이야기는 별로 안했었죠. 지금은 방법은 조금 다르지만, 잘한 것은 더 칭찬하고, 바뀌어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예전보다 강한 어조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Q. 내셔널리그에서의 경험은 감독님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요?
저는 도전을 즐기는 사람이고, 울산미포조선을 맡는 것은 저에게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짧은 시간에 고민해서 결정한 것입니다. 포항 이후에 새로운 구상을 하면서 제가 만들어보고 싶었던 모든 구상이 표현되었던 팀이 울산미포조선이었어요. 선수 자원은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경기내용에서는 프로팀 이상으로 보여줬다고 자부합니다.
무엇보다 이 시절부터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선수들을 '경기의 승리자'로 만드는 것보다 '인생에서의 승리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축구에서의 승리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자꾸 냉정해지고, 각박해지고, 선수들과의 대화 폭도 줄어들었어요. 우리가 축구 선수이고, 감독이고, 팀이지만, 또 승부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이지만, 원초적인 목표는 '인생에서의 성공'이고, 축구는 작은 부분의 하나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선수들과 미팅을 할 때에도 축구에 대한 미팅과 외적인 미팅을 구분해서 했어요. 하루는 축구에 대한 미팅이었다면, 어떤 날은 인생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죠. 1주일에 1~2번 정도 할 때도 있었는데, 선수들이 많이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축구를 육체적인 경기라고 말하고, 실제로 우리는 육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이이에요. 그러다보니 정신적인 면을 사용하는 것이 부족해 균형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신적인 측면을 채워주기 위해 많이 노력했죠.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책을 많이 봐야 하고, 자료를 수집해야 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울산미포조선 시절에는 선수들과 축구 이야기보다는 인생 이야기를 더 많이 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러니까 선수들이 훨씬 더 즐겁게 축구를 할 수 있었죠. 아마 제 축구 인생에 있어서 울산미포조선 시절만큼 좋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팀은 없을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을 모두 해봤으니까요.
지금 강원 선수들에게도 똑같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체계적으로, 단계적으로 승계되는 것이죠. 경기에 대한 승리보다는 인생에서의 승리자가 되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제 목표입니다.
Q. 지도자로서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가 있으시다면.
- 예전에 현역에서 은퇴하고 목표로 삼았던 것이 좋은 클럽을 한번 만들어보는 것이었어요.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기존 클럽이든 새로운 클럽이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아스널 같은 팀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전체적인 틀이 그런 클럽들과 준하는, 축구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고, 재미있고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팀을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 꿈이에요.
주위의 몇몇 분들은 대표팀 감독 등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만, 저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비정기적으로 모이는 팀으로는 제가 추구하는 목표를 이룰 수 없어요. 저는 단 한 가지, 좋은 클럽을 만들어보고 싶을 뿐입니다.
사실 이를 위해서는 외국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주어져야 해요. 전체적인 분위기나 환경, 선수 자원 등이 외국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이죠. 시간만 주어진다면 저는 자신 있어요.
제가 선수로 뛰었던 포항은 선수로서나 지도자로서 좋은 추억을 갖고 있는 팀으로 마무리되었어요. 울산미포조선은 몇 번에 걸쳐 프로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기회를 잃어버렸고요. 강원은 창단팀으로서 저에게 기회와 도전을 제공했고, 여기서 한번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강원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롤 모델이 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는 팀이 되도록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제 축구 인생의 마지막을 여기서 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일단 작년에는 제 생각보다 더 빨리 선수들이 적응했는데, 올해는 그것보다는 좀 더 세밀해져야 해요. 내년에는 좀 더 빨라져야 하고요. 작년보다 더 세밀하고 빨라진다면 만족스런 경기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이제부터 팬들의 질문을 몇 가지 받아보겠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공격수 출신이신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현재 최고의 공격수는 누구입니까? 국내외 모두 (kcwoo1129님)
- 공격수도 좀 더 정확히 구분해야 하는데, 스트라이커냐, 포워드냐의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한국에서는 역시 이동국이죠. 논란의 대상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좋은 공격수 중 하나라고 봐요. 세계적으로 봤을 때는 리오넬 메시인 것 같고요. 개념상 이동국은 스트라이커라고 할 수 있고, 메시는 포워드라고 할 수 있죠. 메시의 경우는 조금 스타일이 다른 호날두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화려하죠. 물론 다이내믹한 면은 호날두가 더 낫지만...
이동국의 경우 요즘은 한 팀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다만 동국이를 데리고 있는 감독님(최강희 감독)께서 부지런했다고 하더군요. 그 분께서 "동국이를 게으르다고 하는데, 부지런해졌다"라고 하시던데, 실제로 제가 데리고 있을 때는 게을렀어요.(웃음) 그 부분 때문에 불만도 있었고요. 변했다니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Q. 선배인 정해원 선수가 부인을 소개해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해주세요. (포스굿님)
- 맞는 말입니다. 정해원 선배 부부가 소개해줬어요. 정해원 선배는 대표팀에서 저와 가장 친했는데, 해원 선배와 형수님이 결혼하기 직전에 우리 부부를 만나게 해줬어요. 형수님의 같은 과 후배여서 자연스럽게 소개해줬죠. 첫 인상은 제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만나면서 호감을 갖게 됐습니다.(웃음)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이라 좋은 인연이 되었어요.
몇 년 전에 청주지역에 K-리그 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요? (오홍홍님)
K-리그는 아니고, 내셔널리그 수준의 팀을 만들려고 했어요. 포항 감독을 그만두고 2년 정도 공부도 하면서 당시 신앙 쪽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어 선교활동도 다녔죠.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요. 그러는 와중에 청주 정도 되면 당장 프로팀은 힘들어도 내셔널리그 팀을 만들고 육성해서 나중에 프로로 전환하는 것도 좋겠다는 구상을 했어요.
그래서 평소 생각했던 부분들을 메모해서 청주 지역 축구단체들과 시장님, 의회 의원들을 만나서 설명해줬죠. 그런데 대부분의 반응이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것이었어요. 시의회까지 올라가긴 했지만, 예산 통과가 안 됐죠. 2년 정도 접촉하면서 노력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창단 방법에 대한 정보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했고, 최근에 다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 것으로 봐서 새로운 생각을 갖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Q. 현역 시절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3경기 뽑아주신다면.
첫 번째로는 역시 대표팀으로서 첫 대회였던 80년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북한과 대결했던 경기입니다. 시대적으로 이 때가 냉전의 마지막 시기였고, 이전에는 북한과 접촉이 없다가 처음 접촉하는 것이었어요. 경기도 치열했고, 내용도 좋았죠. 무엇보다 감정적으로 기억에 남아요. 같은 민족 간에 다른 국가가 되어서 대결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우리가 0-1로 지고 있다가 80분을 넘어서면서 2골을 넣어 역전승을 했거든요. 당시 쿠웨이트 스타디움에는 1만 5천명 정도의 관중들이 왔는데, 대부분이 한국인 노동자들이었어요.
이들의 응원 구호가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이었죠. 경기 막판에 이런 구호가 터져 나오자 갑자기 북한 선수들이 경직되더라고요. 공교롭게 그 이후에 2골을 넣으면서 역전승을 거뒀죠. 북한 선수들이 그 구호를 듣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아, 이런 것이 인간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죠. 축구 외적으로 기억에 남는 경기였습니다.
두 번째 경기는 아무래도 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전이죠. 제 인생에서 여러 장면들이 있지만, 그 경기에서 좋은 득점과 도움을 했어요.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의 활동상이니까 기억에 남죠.
세 번째는 국내 경기인데, 88년 전국축구선수권(현 FA컵) 결승전을 동대문운동장에서 대우(현 부산)와 했었어요. 그런데 중간에 경기가 중단되어서 재경기를 통해 우승했던 기억이 납니다. 골 논란 등이 있으면서 인위적으로 중단되었는데, 지도자가 되고 보니까 정말 안 좋은 장면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경기는 있어서는 안 됐죠. 이후에는 가능한 항의를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어쨌든 요즘 들어서는 제가 선수 시절, 그리고 지도자를 하면서 어떤 경기를 했는지 많이 생각하게 되네요.
긴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올해도 재미있는 축구를 보여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공식질문 1. 축구는 (예술)이다.
예전에 펠레도 이 말을 했을 거예요. 그 사람 수준이 이미 축구가 예술로 표현되었던 겁니다. 보통 아름다운 축구, 멋있는 축구를 하겠다고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이런 표현은 예술에 있어서도 많이 쓰죠. 그리고 관련해서 축구 감독도 예술가죠. 감독이 예술가가 되어야만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겁니다. 감독이 지도자로서의 입장만 생각하면 아름다움은 나오지 않죠.
공식질문 2. 월드컵은 (꿈)이다.
선수들은 당연하고, 감독들도 꿈처럼 보여져요. 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남녀노소 불문하고 동경하잖아요. 우리가 월드컵에 출전했을 때보다 지금은 훨씬 더 커졌어요. 전세계인들에게 꿈이고,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가 월드컵이죠.
인터뷰=이상헌, 영상=정민건
'♡ 스포츠영상발전소 > 국가대표축구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월드컵 人터뷰12 -이근호下] "월드컵, 후회 없이 부딪치고파" (0) | 2010.02.09 |
---|---|
[ⓜ 월드컵 人터뷰12 -이근호上] “하루 빨리 유럽의 분위기 느끼고 싶어” (0) | 2010.02.03 |
[ⓜ 월드컵 人터뷰11 -최순호上] "86월드컵 이탈리아전 헤딩 도움 기억" (0) | 2010.01.19 |
[ⓜ 월드컵 人터뷰10 -조중연下] "2010년은 월드컵의 해" (0) | 2010.01.13 |
[ⓜ 월드컵 人터뷰10 -조중연上] "각급 대표팀 성적..초중고리그제 성과" (0) | 2010.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