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 人터뷰11 -최순호上] ] "86월드컵 이탈리아전 헤딩 도움 기억"
대한축구협회(KFA) 홈페이지에서는 DAUM과 공동 기획한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는 내년 6월까지 격주로 게재합니다.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과 대표팀 경기의 홍보를 위해 국내 최대 인터넷포털 운영사이자 KFA 공식후원사인 DAUM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하는 홍보 프로그램으로서 한국축구의 국민적 붐 조성을 꾀하고자 하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월드컵과 관련된 인물들이며, 현 대표팀 선수들을 비롯해 추억의 스타, KFA 행정인, 역대 월드컵대표팀 감독 등이 릴레이 인터뷰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특히 KFA 및 DAUM 홈페이지를 통해 축구팬들의 질문들도 수렴해 궁금한 점들을 해소시켜드립니다. 인터뷰는 KFA 홈페이지와 DAUM 홈페이지에 기사와 동영상으로 게재됩니다.
월드컵 특집 인터뷰 11번째 주자로 최순호 감독님을 인터뷰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일단 근황부터 묻겠습니다. 강원의 동계훈련에 여념이 없으실 것 같은데요.
1월 3일에 소집해서 4일 설악산 등반을 시작으로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5일부터 정상적인 훈련에 돌입했고, 계속해서 선수들과 같이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훈련을 소화하고 있어요.
곧바로 본격적인 질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처음 국제무대에 나선 것이 79년 U-20 월드컵이셨습니다. 당시 2살 어린 나이임에도 당당히 팀의 주전으로 3게임 모두 풀타임 출장하셨는데요.
모든 선수들이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이런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것을 꿈으로 삼고 시작하는데, 저는 당시만 해도 '청소년대표를 하겠다, 대표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꾸지는 않았어요. 그저 축구를 재미있게 했고, 즐겁게 했을 뿐이에요.(웃음)
그러다가 청소년대표 선발전에 나가게 됐는데, 1차 평가에서는 탈락했어요. 그런데 2차에서 발탁되면서 청주상고 3학년 때 일본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나가게 됐죠. 당시에도 세계무대에서의 활약보다는 그냥 내 생활이었고,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니까 즐겁게 한다는 생각만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처음 경험한 국제무대는 어떤 느낌이셨나요?
지금처럼 열광적인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서 했기 때문인지 그냥 차분한 느낌이었죠. 다만 관중들은 많이 왔고, 정돈이 잘 되어 있고, 짜임새 있게 운영을 한다는 느낌은 받았습니다.
이 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1980년에는 곧바로 성인 대표팀에 합류하셨고, 공식 A매치는 아니었지만, 보아비스타와의 평가전을 통해 대표팀에 데뷔하셨습니다. 당시 3차례 경기에서 모두 골을 기록하셨는데요. 충격적인 대표팀 데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 기억이 납니다. 1980년 초였는데, 당시 청주상고를 졸업하고 포항제철에 있었어요. 한홍기 감독님과 조윤옥 코치님이셨고, 이회택 부회장님도 선수로 잠시 같이 했었죠. 그 때 주위에서 제가 대표팀에 발탁된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던 것 같아요. 어떤 선배는 '아직 너무 어리다, 더 경험을 쌓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고, 반대로 '남자라면 한번 부딪혀봐야지'라면서 적극 추천해주신 선배도 계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5월에 대표팀에 발탁되었는데, 당시 대표팀은 중요한 시기였어요. 1979년에 모스크바 올림픽 아시아예선에서 말레이시아에게 지면서 세대교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왔고, 그러면서 80년 5월에 저를 비롯해 젊은 선수들이 대거 합류했죠. 저 외에도 이태호, 황석근, 장외룡 등을 비롯해 대학 1~2학년 선수들이 10명 정도 뽑혔으니 상당히 큰 규모의 교체였어요. 그렇게 대표팀에 새롭게 출범하면서 82년 스페인 월드컵 본선 진출과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막내로서 선배들의 귀여움도 받았을 것 같은데요.(웃음)
글쎄요. 제 성격이 남에게 귀여움 받는 성격이 아니라서...(웃음)
젊을 때도 그랬어요. 동기 중에 가장 먼저 대표팀에 들어갔는데, 귀여움 받은 기억보다는 막내로서 볼에 바람 넣기, 짐 들고 다니기 등 여러 가지 잔일들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만 그 무렵에 룸메이트가 최종덕 선배이셨는데, 저보다 나이가 6년 정도 많으셨어요. 그런데 합숙할 때든 해외원정에서든 정말 잘 대해주셔서 편안한 마음으로 훈련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후 대통령배대회를 거쳐 공식 A매치 데뷔전은 80년 9월 16일 아시안컵 말레이시아전이셨습니다. 이 경기를 시작으로 카타르, 쿠웨이트, UAE와의 2,3,4차전에서 4경기 연속골을 터트리셨어요. 특히 UAE전에서는 해트트릭까지 기록하셨고요. 아시아 전체가 깜짝 놀랐을 것 같습니다.(웃음)
보아비스타와의 평가전을 마치고, 대통령배대회를 치르면서 국가대항전도 있었던 것 같은데, 공식 A매치로는 인정되지 않았나 보더군요. 그 뒤에 쿠웨이트에서 아시안컵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아시안컵이 엄청나게 큰 대회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어요. 단지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을 뿐이죠. 다만 대표팀으로 국제대회에 나가면서 사명감이 생겼고, 국가관도 정립되기 시작했어요.
그 때만 해도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이었고, '반공'을 강조했던 시절이었죠. 지금과 분위기도 많이 달랐는데, 경기 전에 태극기를 보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찡해지면서 국가관이 형성되었던 것 같아요. 다만 대회에 나가서는 승부나 결과보다는 즐기려고,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이 대회에서 7골로 이란의 파리바와 공동 득점왕이 되셨어요. 아시아 최고의 골잡이로 인정받은 셈인데요.
모든 경기를 다 치렀고, 우리는 결승전까지 갔죠. 7골 중에는 해트트릭도 있었고요. 공동득점왕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득점을 제일 많이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뭔가 상패를 받아왔던 기억도 있고요. 지금은 그 상패가 어디 갔는지 잘 모르겠네요.(웃음)
돌이켜보면 저는 고교 2학년 무렵부터 경기에 대한 흐름을 어느 정도 알게 된 것 같아요. 그 때부터 대학이나 실업 팀과 연습경기를 했고, 대표로 뛰면서도 상대를 의식하지는 않았죠. 단지 내가 즐겁게 하자는 생각만으로 축구를 해왔어요. 상대가 강하다, 약하다는 의식 없이 그냥 경기 자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제 주위에 좋은 선수들이 많았어요. 선배들이 지원을 잘 해주셨기 때문에 저는 전방에서 골 넣는 것에만 충실하면 됐죠. 그래서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최근 박주영, 이청용 등보다도 훨씬 충격적으로 대표팀 데뷔를 한 셈입니다. 신드롬도 있었나요?
시대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당시 환경이나 분위기를 따진다면 요즘의 몇 배 이상으로 컸다고 생각해요.
1981년에는 다시 U-20 월드컵에 나가셨습니다. 1차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2골을 뽑아내며 4-1 대승의 주역이 되셨죠. 당시를 회상해보신다면.
요즘 젊은 선수들 중에는 소속팀과 청소년대표와 올림픽대표, 국가대표에서 모두 뛰는 경우가 있잖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어린 선수를 너무 혹사시키는 것 아니냐고 걱정을 하셨죠. 그래도 제 나름대로 즐겁게 뛰었고, 모든 대회를 다 소화했습니다.
당시 아시아 청소년 무대에서는 상대가 없었고, 결국 81년 호주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나가게 됐죠. 어떻게 보면 팀 전력 면에서 79년 도쿄 월드컵 때보다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제 경우에는 전 대회에서 뛰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도움이 됐어요. 저는 팀에서 유일하게 U-20 월드컵을 경험했고, 주장을 맡으면서 선수들과 제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훈련 자체도 더 조직적으로 했고요.
물론 전력적으로는 같은 조의 이탈리아나 브라질, 루마니아에 비해 약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경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요. 특히 이탈리아와의 첫 경기는 정말 환상적인 플레이를 펼쳤죠. 저 스스로도 놀랐습니다.(웃음) 호주나 세계 축구팬들이 모두 우리 팀을 주목했고, 많은 이의 관심 대상이 되었죠.
그러나 이탈리아전 승리 이후 루마니아와 브라질에게 연패를 당하며 8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원인이 무엇이었나요?
그것이 전력이 약한 팀들의 핸디캡이었어요. 우리는 정말 최선을 다했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컨디션 사이클이 첫 경기에 맞춰져 있었어요. 첫 경기의 내용이나 마무리는 좋았는데, 두 번째 경기부터는 1차전 선전에 대한 부담이 커졌는지 컨디션 난조가 보였고, 비교적 약체였던 루마니아에 0-1로 지고 말았죠.
그리고 브라질과의 3차전은 확실히 전력의 차이가 컸어요. 브라질은 역시 세계최강이었죠. 전반에는 상대가 조심스런 경기 운영을 하면서 0-0으로 비겼지만, 후반 들어 브라질 특유의 실력이 나오면서 3실점을 하고 말았어요.
이런 점들을 보면 역시 팀은 밸런스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경기 잘한다고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에요. 세 경기를 꾸준히 잘 치러야만 목표를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앞서 포항제철에 1980년에 입단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고교 졸업 후에 곧바로 입단하신 거네요? 광운대에도 입학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히 상황을 설명해주신다면.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데, 저는 청주상고를 1980년 2월에 졸업했고, 바로 포철에 입단했어요. 포철과는 이미 78년말에 입단 약속을 했었죠. 당시 조윤옥 선생님이 포철 코치로 계셨는데, 여러 경로를 통해 제 이야기를 들으셨나 봐요. 청주로 포철이 경기하러 왔고, 경기를 해보고 나서 좋은 선수라는 평가를 내려주셨죠. 그 때부터는 조윤옥 선생님과 감독이셨던 한홍기 선생님께서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고, 그 속에서 좋은 축구를 익힐 수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저는 원래 대학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좋은 실업팀, 좋은 지도자 밑에 가서 훈련해야만 더 좋은 축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대학보다는 실업에 더 관심이 많았고, 결국 그렇게 해서 포철에 간 것이에요.
아마 광운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포철에 입단하면서 동시에 광운대 야간부에 들어갔기 때문일 거예요. 또 4학년이었던 83년에 광운대에서 요청이 있어서 1년간 활동을 하고 졸업한 일은 있습니다.
1983년에 슈퍼리그라는 이름으로 프로축구가 출범하면서 포철 소속으로 뛰셨습니다. 그런데 84년에 24경기에 나서 14골-6도움을 기록한 것 외에는 프로 무대에서는 경기 출장 자체가 많지 않았습니다. 대표 차출이 워낙 많으셨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죠. 당시 경기 참가율이 낮았던 것은 전적으로 대표팀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소속팀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팀 경기가 우선이었죠. 소속팀에 있다가 대표팀에 차출된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태릉선수촌에 있다가 소속팀 경기에 나가는 개념이었을 정도니까요.(웃음) 저 뿐 아니라 그 무렵 활동했던 모든 대표 선수들이 마찬가지였습니다.
86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일본과 2연전을 벌였죠. 당시 잠실에서 열린 2차전에서 감독님의 슛이 골대 맞고 나오자 허정무 감독님이 넣으시면서 1-0으로 승리했었는데요. 팔짝팔짝 뛰며 좋아하셨던 장면이 기억납니다.(웃음)
결과적으로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서 한국축구의 숙원이었던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에 성공했죠. 그러나 2년 정도의 과정을 돌아보면 굉장히 어려움이 많았어요. 저는 그 현장의 중심에 있었고요. 83~84년을 지나면서 LA 올림픽 아시아예선에서도 탈락했고, 아시안컵에서도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어요. 그 와중에 몇 차례 감독이 바뀌었고, 선수들도 자주 바뀌면서 혼란의 시기였죠.
그렇게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다가 85년 무렵이 되면서 서서히 안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당시에 김정남 감독님이 몇 번에 걸쳐 하차하셨다가 다시 맡으셨는데, 그 때부터 조직이 잘 다져져서 좋은 성과로 본선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선수들이나 감독, 코치 모두 스트레스에 많이 시달렸어요. 저도 항상 축구를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시절만큼은 가장 많은 압박을 받았고, 스트레스를 받았었죠. 그로 인해 돌출행위를 했던 기억도 납니다. 어쨌든 중요한 시기에는 모두 하나가 되었고, 그것이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86 멕시코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차범근 감독님이 독일에서 합류하셨습니다. 당시 최순호-차범근의 공격 호흡에 대한 기대가 정말 컸었죠. 직접 호흡을 맞춰보셨을 때의 느낌은 어떠셨나요?
당시에 저는 아시아예선을 치르면서 좋은 경기를 보여줬지만, 월드컵 본선에서는 더 좋은 플레이를 해야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본선에서는 차범근 선배가 참가하길 바랐죠. 분명히 우리의 전력이 배가될 것이니까요.
결국 차 선배가 함께 하게 됐는데, 처음 함께 훈련했던 것은 독일 전지훈련을 갔을 때였어요. 현지에서 합류해서 같이 호흡을 맞췄고, 이어서 미국 콜로라도와 LA에서 1달 동안 전지훈련을 했죠. 그리고 멕시코로 입성했는데, 역시 훌륭한 선수였어요.
차 선배랑 같이 훈련하고 경기를 치르면서 대체로 투톱으로 나섰지만, 저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보다는 쉐도우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하려고 애를 썼어요. 우선 제가 패스에 대해 자신이 있었던 것도 있었고, 차 선배의 움직임은 확실히 다른 선수들과는 달랐죠. 저도 가능하면 거기에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했고요. 경기하면서 '정말 움직임이 좋다, 좋은 움직임이 있으니까 내 패스가 더 사는구나'라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좋은 파트너였다고 생각해요.
다만 함께 호흡을 맞췄던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좀 더 좋은 경기를 하지 못한 점이 조금 아쉽죠.
월드컵이 시작되었고, 첫 상대는 우승후보 아르헨티나였습니다. 월드컵 무대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의 느낌이 기억나시나요?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나가서 현장에서 느껴봤는데, 멕시코가 축구의 나라여서 그런지 몰라도 굉장했어요. 우리가 그 동안 한국에서, 그리고 축구가 성행했던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경기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광적이었죠. 정말 축구잔치구나, 큰 무대구나라고 느꼈죠.
당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3골을 허용했습니다. 피치에서 직접 상대해본 느낌은 어떠셨나요?
우리 나름대로는 준비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많은 부분에서 부족했죠.
개인적으로는 제 성격상 강팀과 경기한다고 긴장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아르헨티나는 저도 모르게 큰 벽이라는 느낌을 받게 됐어요. 선수들의 볼 컨트롤 기술이나 움직임, 도와주는 플레이 등을 보면서 '정말 잘한다, 우리는 저렇게 하지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에서 보여지듯이 실력 차이는 분명했습니다. 고교생이 대표 선수와 경기하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죠.
그래도 감독님이 2명의 수비수를 제치고 연결해준 패스를 받아 박창선 선수가 만회골을 터트려 영패를 모면했었습니다. 당시를 돌이켜보신다면.
뚜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제가 오른쪽 터치라인에서 볼을 갖고 돌아서면서 2명을 제치고 가운데로 치고 들어갔죠. 사실은 제가 볼을 더 가져가려고 하는 상황이었는데, 박창선 선배가 볼을 가로챘어요.(웃음) 저는 그 앞을 그냥 지나갔고, 거기서 박창선 선배가 한번 더 치고 들어간 후에 중거리 슛을 시도한 것이 골이 됐죠. 그런 좋은 장면들은 늘 기억이 납니다. 다만 그런 장면들이 하나로 엮어지지 않고, 전체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약했던 것이죠.
불가리아와의 2차전에서는 출장하지 못하셨습니다. 폭우로 인한 수중전이었기 때문인가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출장하지 못해서 벤치에 앉아있었는데, 특별히 아쉬움은 없었어요. 감독님의 판단에 의해 제외시킨 것이고, 이의를 제기할 만한 것도 아니었죠. 후보 명단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벤치에서 담담히 있었습니다.
청소년대표 시절부터 유독 이탈리아를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이탈리아와의 3차전에서도 대포알 같은 오른발 중거리 슛으로 1-1 동점을 만드셨고, 종료 직전 허정무 감독님의 골도 헤딩으로 어시스트를 하셨죠.
저도 그 부분을 이해 못하겠더군요. 그 경기들 외에 82년 인도 캘거타 국제대회에서도 이탈리아를 상대로 2골을 넣은 기억이 있어요. 66년 월드컵에서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기도 하고, 2002년에는 우리가 이탈리아를 이겼었죠. 이탈리아에는 강한가 봅니다.(웃음)
저 역시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는 좀 더 좋은 플레이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별히 이탈리아 축구 스타일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좋은 성과를 거뒀죠.
어쨌든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리가 이탈리아와 비겼다면 좋은 기회가 왔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제가 득점했던 장면보다는 허정무 선배에게 헤딩으로 어시스트했던 장면을 더 칭찬하고 싶어요. 2번째 골의 연결과정은 정말 정교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제가 골 넣은 장면보다 더 좋은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멕시코 월드컵이 끝난 뒤, 가장 크게 느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딱 두 가지였어요. 축구는 기술과 전술이다.
첫 번째로 기술이 완벽해야만 경기를 더 잘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이고, 두 번째로 그 기술을 전술적으로 얼마나 잘 조화시키느냐에 따라 성과를 올리는 것이죠. 멕시코 월드컵을 마친 뒤에 한국축구도 기술적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절대로 올라서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은퇴 후에 제가 자랐던 청주에 바로 유소년축구교실을 열었던 것도 그런 것 때문이었죠.
이런 부분들에 대해 차범근 선배는 독일에 계셨었기 때문에 더 많이 느끼셨을 거예요. 그래서 가장 먼저 유소년 축구교실을 시작했던 것이고,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하고 계시고요. 어쨌든 개인기술과 팀 전술, 이 두 가지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축구팬들도 궁금해하는 질문인데요. 이 무렵 유벤투스에서 감독님을 영입하려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유벤투스 외의 팀들에서도 제의가 있었다면서요? (이당윤님, 대한민국이여-님)
그랬을 겁니다. 그 때가 가장 활발하게 해외진출 이야기가 나왔으니까요.
사실 첫 번째 제의는 80년 보아비스타와의 3연전을 치르고 나서였어요. 보아비스타 관계자가 찾아와서 포르투갈로 가자고 했고, 실제로 금액까지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81년 U-20 월드컵을 마치고 나서 인터 밀란에서 관심을 보인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86 멕시코 월드컵 이후에 이탈리아 유벤투스 뿐 아니라 벨기에, 독일 등의 클럽들이 제의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 생각이었어요. 제 성격 자체가 즐기는 스타일이라 그런지 해외 진출에 대해 꼭 나가야겠다는 절박함이 없었죠. 그리고 무엇보다 병역 문제가 걸렸고요. 당시에는 병역 혜택을 받으면 5년간 국내에서 활동을 해야만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해외에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는 부분도 있었죠.
그 때 접촉했던 해외 클럽 관계자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이해가 안 가고 어렵다. 한국 선수에게 관심이 있어도 접촉 자체가 힘들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웃음)
지금 생각하셨을 때 해외 진출에 대한 후회는 없으신가요?
아쉬움이 조금 남긴 해요. '내가 한창 전성기 시절에 그 곳에 가서 그 선수들과 경기를 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하죠. 그렇다고 크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잠시 국내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1987년을 끝으로 포철에서 럭키금성으로 이적하게 되셨습니다. 당시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가요?
80년부터 87년까지 포철의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그 시기에 포철은 변화가 있었어요. 팀 체질이 개선됐고, 선수단의 변화도 있었죠. 그러면서 제 느낌으로는 팀의 중심에서 제가 조금 멀어져 있었어요. 팀은 항상 그렇죠. 시기에 따라 분위기를 쇄신하고 새롭게 변화해야 하고, 또 한 선수가 늘 중심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 상황에서 여기 계속 있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고, 당시 이회택 감독님께도 이야기 드렸습니다. 오래 정들었던 팀이고, 은퇴도 여기서 한다는 생각으로 뛰었던 팀에서 떠난다는 자체가 괴로웠기 때문에 그 때 감정으로는 은퇴 생각도 했었어요. 그러나 마지막에 조율이 잘 되어서 팀을 옮겼죠.
어떻게 보면 이런 경험이 지금 감독을 하면서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당시 제가 이회택 감독님이 추구하는 축구와 맞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까 떠나야 했던 것이거든요. 그러나 그 때는 한 팀에서 끝까지 있어야 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감독님들도 자신의 색깔과 다른 선수들에게 명확히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감독을 하면서 선수들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방식과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이 맞지 않으면 "네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추구하는 축구와 맞지 않다. 서로 좋은 길을 가야 한다"라고 명확히 말하죠. 이것은 감독의 선택, 선수의 선택이 서로 존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홈에서 열린 88년 서울 올림픽을 위해 많은 준비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조 예선 통과에 대한 기대도 컸고요. 소련과 비기면서 희망에 부풀었지만, 결국 아르헨티나에게 1-2로 지며 탈락했습니다. 아쉬움이 컸을 것 같은데요.
80년부터 91년까지 대표 생활을 했습니다. 가장 오래 대표팀에 몸담았던 사람 중 하나인데, 돌이켜보면 아쉬운 순간들이 참 많아요. 전체적으로 보면 중요한 시기마다 감독이나 선수 교체가 많았는데, 이런 부분들이 한국축구가 좀 더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을 저해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88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얼마 남기지 않고 감독이 교체되었어요. 가만 생각해보면 '이 대회는 이 분이 감독이었으면, 저 대회는 저 분이 감독이었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이게 바뀌다보니까 오히려 결과도 좋지 못한 면이 있었고, 이런 부분이 반복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시 서울 올림픽을 돌아보면 그 무렵에는 저도 고참이 되었어요.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는데, 중간 중간에 악재가 터졌죠. 그러나 1차전인 소련전에서는 선전을 했어요. 우리는 열심히 뛰면서 대체적으로 좋은 플레이를 펼친 반면, 소련은 첫 경기라 그런지 경기력이 저조한 면이 있었죠. 결국 0-0으로 비기면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그런데 이겨야할 미국과의 2차전에서 비기면서 침체되었어요. 그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 했고, 만약 승리했다면 8강 진출을 할 수 있었죠. 마지막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도 비기기만 해도 올라가는데, 결국 1-2로 지고 말았어요. 사실 결과보다는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들에 있어 좀 더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 > 2편에 계속...
인터뷰=이상헌, 영상=정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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