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 人터뷰15 -하석주上] "94WC 볼리비아전 충격, 1년 가까이..."
94월드컵 아시아 1차예선 홍콩전에서의 하석주 ⓒ베스트일레븐
대한축구협회(KFA) 홈페이지에서는 DAUM과 공동 기획한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는 내년 6월까지 격주로 게재합니다.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과 대표팀 경기의 홍보를 위해 국내 최대 인터넷포털 운영사이자 KFA 공식후원사인 DAUM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하는 홍보 프로그램으로서 한국축구의 국민적 붐 조성을 꾀하고자 하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월드컵과 관련된 인물들이며, 현 대표팀 선수들을 비롯해 추억의 스타, KFA 행정인, 역대 월드컵대표팀 감독 등이 릴레이 인터뷰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특히 KFA 및 DAUM 홈페이지를 통해 축구팬들의 질문들도 수렴해 궁금한 점들을 해소시켜드립니다. 인터뷰는 KFA 홈페이지와 DAUM 홈페이지에 기사와 동영상으로 게재됩니다.
15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90년대 '왼발의 스페셜리스트'로 명성을 떨쳤던 하석주 코치(42, 전남 수석코치)입니다. 아주대를 졸업한 하석주 코치는 1990년에 대우(현 부산)에 입단해 97년까지 활약했습니다. 대표팀에서는 1991년 6월 대통령배대회 몰타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해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전까지 11년 동안 활약을 펼쳤습니다.
A매치 통산 94경기에 출장해 22골을 기록했으며, 빠른 스피드와 정교한 왼발 킥 능력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왼발의 달인', '왼발의 스페셜리스트' 등의 별명으로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94년 미국 월드컵을 시작으로 96년 아틀랜타 올림픽과 UAE 아시안컵, 98년 프랑스 월드컵, 2000년 레바논 아시안컵 등에서 활약했습니다. 1998년에는 일본 J리그에 진출해 세레소 오사카와 빗셀 고베에서 2000년까지 활약했고,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와 2003년까지 포항에서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포항과 경남 코치를 거쳐 현재는 전남의 수석코치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월드컵 특집 인터뷰 15번째 주자로 인터뷰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요즘 리그가 시작되어 매우 바쁘실 것 같은데요. 어떻게 지내십니까?
우선 전남의 수석코치로 작년에 부임해서 1년간 새 팀에서 바쁘게 지냈어요. 다행히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4강까지 갔던 것에 대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나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열심히 하고 있죠.
- 포항과 경남 코치 시절을 지나 전남까지, 박항서 감독님과 계속 함께 하고 계신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웃음)
포항에 있을 때 박항서 감독님이 수석코치셨는데, 제가 선수로 뛰다가 코치로 함께 했었죠. 그 전에는 94 미국 월드컵 당시에 박 감독님이 트레이너로 계셨었고요. 다혈질의 성격이시지만 따뜻한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라 저에게 많이 신경을 써주셨어요. 제가 지도자로 발전해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경남 창단 때도 같이 일하자고 제의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전남으로 오시면서 한 번 더 도와달라고 말씀하셨고, 저로서도 어려운 상황이 있었지만 보답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었기에 전남에 왔어요. 서로 장단점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호흡을 맞춰올 수 있었던 것 같네요.
- 바로 예전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처음 A매치에 출전하셨던 것이 1991년 6월 대통령배대회 몰타전이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득점까지 기록하셨는데, 당시를 회상해보신다면.
지금이야 많은 선수들이 어린 나이에도 해외에서의 경험이 많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어요. 따라서 대표팀에 처음 발탁되어서 경기에 나설 때 긴장을 많이 했었죠. 선배들 틈에서 주눅도 들었고요. 그러나 선배님들, 특히 김주성 선배님이 대우(현 부산)에서도 같이 계셨기 때문에 많이 챙겨주셨어요. 룸메이트로 함께 하시면서 조언도 많이 해주셔서 경기장에서 마음 편하게 할 수 있었고, 골까지 넣을 수 있었죠.
- 당시 대표팀에는 어떤 선수들이 있었습니까?
최순호 감독님과 김주성 선배님이 계셨고, 홍명보나 (구)상범이 형, 정용환 선배 등이 있었던 것 같네요.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단계였지만, 그래도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선배들이 많이 계셨던 거 같습니다.
- 대회 결승전인 이집트전에서도 2골을 넣는 등 이 대회에서 MVP 및 득점왕에 올랐어요. 대표팀에 처음 뽑힌 신예로서는 엄청난 활약이었는데요.
사실 대통령배 개막전을 앞두고 몸이 상당히 좋았어요. 당시 고재욱 감독님이셨는데, 경기 전날 저를 부르셔서 방으로 갔죠. 당연히 어린 마음에 출전 기회를 얻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감독님이 내일 엔트리 18명에서 빠지게 됐으니까 다음 경기에 대비해 운동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웃음)
방에 와서 울었을 정도였어요. 의욕은 앞서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까 하루 아침에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진 느낌이었죠.
그 이후부터는 계속 교체로 투입되면서 골도 넣고 그랬어요. 그리고 이집트와의 결승전에서는 대선배인 최순호 감독님 대신 선발 멤버로 뛰게 됐죠. 신예였기 때문에 전반에 나가서 못하면 교체 1순위라는 생각을 했고, 무조건 전반에 좋은 활약을 펼쳐야 한다는 각오로 나섰어요. 다행히 전반에 골을 넣으면서 편하게 플레이를 할 수 있었죠. 얼마 전에도 고재욱 감독님이 광양 오셨을 때 그 때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웃음)
K-리그 부산 대우에서 활약하던 시절(오른쪽) ⓒ부산아이파크
- 조금 시간을 앞당겨보면 전년도인 90년부터 대우에 입단해 프로 생활을 시작하셨는데요. 당시 워낙 화려한 멤버를 보유한 팀이라 주전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그 속에서 24경기를 출전하시면서 입지를 굳혔는데,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우선 저는 상황을 피해가는 것을 싫어해요. 예를 들어 그 팀에 대표 선수가 많고, 포지션에 겹치는 선수가 있다고 해도 그런 팀에서 경기를 뛰는 것이 진정한 승부라고 생각해요.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런 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었죠.
사실 주위에서는 말렸어요. 왜 '대우로 가느냐, 좀 더 전력이 약하고 경기에 나설 수 있는 팀으로 가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었죠. 그러나 저는 대우에 가서 승부를 걸어보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입단했을 때는 독일의 엥겔 감독님이 새로 오셨어요. 아무래도 외국인이시다보니 모든 선수를 똑같은 상황에서 비교하게 되잖아요. 사실 당시 대우에는 이태호, 김종부, 정해원 선배님 같이 대표팀에서 활약하시던 분들이 많았어요. 저에게 기회가 오기 힘들었죠.
그런데 엥겔 감독님은 동등한 기준에서 봤고, 그 와중에 저를 좋게 보셨어요. 어떻게 보면 행운아였죠. 처음에는 3분도 뛰고, 15분도 뛰고 그러다가 5경기 정도 치른 후에 선발 멤버가 되었습니다. 외국인 감독님이 오신 것이 저에게는 상당히 큰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 91년에는 K-리그 우승도 차지하셨습니다. 프로에서 맛본 첫 번째 우승이었는데, 당시를 회상하신다면.
당시에 21경기 무패를 기록하면서 우승을 했어요.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부산이란 도시를 처음 갔었는데, 1년을 지내면서 프로를 경험했고, 경기에서도 골을 넣고 언론에 나오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죠. 즐거웠고, 시간이 정말 빨리 가는 기분이었어요.
그 와중에 우승까지 했죠. 솔직히 우승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21경기 무패라는 것은 거의 지는 경기가 없었다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승해서 기쁜 것보다도 이 팀에서 제가 주전을 차지했다는 것이 더 비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92년 부산 대우 동료들과 함께(아래줄 왼쪽이 하석주) ⓒ월간축구
- 94 미국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도 맹활약을 펼치셨어요. 1차 예선에서는 6게임 연속 골을 기록하셨죠. 아직도 A매치 최다 연속골로 남아있는 대기록인데요.
월드컵 1차 예선의 경우 상대가 강팀들이 아니어서 골을 넣을 기회가 많은 편이에요. 골 감각도 좋았고, 찬스도 많이 왔고, 주위 동료들도 많이 도와줬죠. 그러나 4~5경기 연속골을 성공시킨 다음에는 부담감이 상당히 컸습니다. 매스컴에서도 기록이라고 그랬거든요. 일단 당시에는 기록을 의식하지 않고, 대표팀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번에 확실히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뛰었어요. 그래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죠. 아직도 기록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기분이 좋습니다.(웃음)
- 94 월드컵 최종예선은 '도하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극적이었습니다. 당시 무릎 부상으로 최종예선 참가가 불투명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과정이 궁금합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월드컵 최종예선을 앞두고 강도 높은 훈련을 하다보니까 무릎이 아프더군요. 그래서 운동을 조금 쉬었는데도 여전히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연골이 약간 찢어져서 손상을 입었다고 했어요.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고요.
최종예선은 보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언론에서는 저를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나왔죠. 저로서는 걱정이 많이 됐죠. 지금까지 고생했던 것도 떠오르고, 최종에선에서 뭔가 보여줘 이름을 알리겠다는 기대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김호 감독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네가 선택해라. 괜찮다면 너를 데려가고 싶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도 "수술을 하지 않겠습니다. 10분을 뛰든, 1분을 뛰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꼭 가고 싶어요"하고 말씀드렸었죠.
결국은 감독님이 언론으로부터 좋지 않은 소리를 들으시면서 저를 데려갔어요. 당시 최종예선이 열리는 카타르 도하에 들어가기 1주일 전쯤에 독일에서 전지훈련을 했는데, 그 때부터 처음으로 운동을 시작했죠. 3주 정도 쉬다가 훈련했는데, 무릎도 아프지 않고 컨디션이 너무 좋았어요. 독일 잔디가 물렁물렁해서 충격도 없었고요.
제 컨디션이 너무 좋으니까 이란과의 1차전에 선발로 뛰게 되었죠. 많은 부담이 있었지만, 제가 골도 넣었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나자 무릎이 굉장히 아프더군요. 통증이 심해서 다음 경기부터는 교체로 조금씩 뛰기 시작했어요. 여러모로 우여곡절 끝에 카타르까지 갔었죠.(웃음)
- 일본전에서 패하면서 월드컵 본선행이 불투명해졌습니다. 당시 일본과 같은 호텔을 쓰셨다면서요. 양 팀의 분위기가 극과 극이었을 것 같네요.(웃음)
이라크전에서 2-1로 이기다가 2-2로 비겼고, 사우디 아라비아전에서도 1-0으로 이기다가 막판에 1골을 내줘 비겼어요. 여기에 일본전에서도 지면서 쉽게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 급반전됐죠. 사실 일본전을 치르기 전까지만 해도 같은 호텔을 쓰면서도 우리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던 반면, 일본 선수들은 침울했었거든요.
그런데 일본에게 지면서 우리는 자력으로는 월드컵에 올라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후에 우리는 호텔과 식당만을 오가는 상황이 됐고, 반대로 일본 선수들은 호텔 로비에서 마치 월드컵을 통과한 것처럼 언론들과 인터뷰를 하더군요. 여자 친구들도 찾아오고 말이죠. 여기에 '한국에 돌아올 생각하지 말아라, 보호용 헬멧을 준비하라'는 이야기까지 나와서 너무 힘든 상황이었어요.
- 그런 상황이었기에 마지막 북한전을 앞둔 팀 분위기도 상당히 비장했을 것 같은데요.
북한전과 동시에 사우디-이란전, 이라크-일본전이 열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경기 전에 김호 감독님께서 "북한전에서 대량 득점으로 이기고 다른 두 경기에서 기적을 바라자.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강조하셨어요.
북한전에 들어가서 고정운 선배와 황선홍이 1골씩 넣을 때까지만 해도 벤치에서 좋아했었죠. 무전기로 타구장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제가 3번째 골을 넣을 때는 벤치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요. 그것을 보고 다른 경기 결과가 좋지 않구나라고 생각했었죠.
결국 3-0으로 이겼음에도 다들 고개 숙이고 인사하고 있는데, 갑자기 벤치 쪽에서 환호성이 들리는 거예요. 사우디-이란전은 이미 사우디의 승리로 결정됐는데, 이라크-일본전에서 추가시간에 이라크가 동점골을 넣었다더군요. 결국 우리가 통과하고 일본이 탈락하게 됐죠. 모두들 껴안고 울고 난리가 아니었어요.(웃음) 축구를 시작한 이래 가장 극적인 상황이 아니었나 싶어요.
호텔에 가서도 파티를 열고, 강강수월래를 하고, 기차놀이도 하고 그랬어요.(웃음) 반면 일본 선수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죠. 상황이 다시 반전된 겁니다. 지옥과 천당을 오갔었죠. 이게 축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1993년 미국 월드컵 예선전에서의 하석주(16번) ⓒ월간축구
- 94 미국 월드컵은 사실상 세계와 맞선 첫 번째 무대였습니다. 월드컵에 나선 느낌은 어떠셨나요?
당시 우리는 해외 경험이 많지 않았어요. 외국 팀들도 항상 국내에 불러서 경기를 했는데, 정예멤버가 오는 경우가 별로 없고, 경기도 성의 없게 하기 때문에 쉽게 이기는 경기가 대부분이었죠. 그런데 월드컵에 나가 스페인, 독일 같은 팀들과 붙으려니까 긴장도 많이 되고, 위축되기도 하더군요.
그렇지만 월드컵 첫 승이나 16강에 갈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많았던 대회가 미국 월드컵이 아니었나 싶어요. 날씨가 너무나 더웠죠. 37~38도까지 올라가는데, 유럽 선수들은 그런 더위에서 경기해본 적이 없었을 거예요. 그래도 우리는 견딜 수 있고, 체력적으로 자신 있었죠. 아마 긴장을 덜 하고, 경험만 조금 더 있었다면 충분히 1승과 16강 진출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경험이 없다보니 그냥 아쉬운 대회로 끝났던 것 같네요.
- 2차전 볼리비아전을 평생 잊지 못하실 것 같아요. 후반 추가시간에 황선홍 감독님의 힐패스로 결정적인 기회를 잡으셨잖아요.
그렇죠. 볼리비아와의 2차전 추가시간에 굉장히 좋은 기회를 잡았거든요. 황선홍과 월패스를 주고받으며, 골키퍼와 1:1로 맞서는 찬스를 잡았죠. 그것만 넣었으면 월드컵 첫 승과 함께 16강에 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기회를 놓치면서 결국 2무 1패로 대회를 마감하고, 16강 진출도 실패했죠. 경험 부족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경기 끝나고 선배들이 "그 골을 넣었으면 너는 영웅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아파트 한 채가 날아갔다"고도 하시고...(웃음)
어쨌든 저는 너무 가슴이 아픈 상태였고, 결국 독일전을 하루 앞두고 감독님을 찾아가서 "내일 경기는 도저히 못 나가겠습니다. 자신이 없습니다"하고 말씀드렸어요. 제 스스로 너무 충격을 받은 상태였거든요. 위안이 되지 않고 볼리비아전 슛이 계속 머리에 맴돌아서 축구를 할 수가 없더군요. 주위에서는 계속 그 이야기를 하지, 어린 마음에 충격이 컸어요.
-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보면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는 교체 투입되어 피치를 밟았습니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의 투입이었는데, 투입될 때 어떤 마음이셨나요? 홍명보 감독님의 프리킥 골 상황을 만드는 파울을 유도하시기도 했는데요.
밖에서 워밍업할 때 선수들의 몸놀림을 보니까 우리 선수들은 열심히 하는데, 스페인 선수들은 더우니까 힘들어하더군요. 들어가면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막상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니까 엄청 더웠어요.(웃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 어린 선수들은 다양한 경험을 했고, 외국에 진출한 경우도 많기 때문에 A매치를 여유 있게 치르죠. 그것을 보고 우리 선수들이 많이 올라섰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당시에도 우리에게 이런 경험이 있었다면 저 역시 긴장하지 않고 좀 더 여유 있게 경기를 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 볼리비아전 득점 실패로 인한 마음의 짐은 언제 벗어날 수 있었나요?
한국에 돌아와서 팀에 복귀해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볼리비아전 이야기를 하더군요.
후반 추가 시간에 있었던 기회였고, 넣었으면 16강을 진출할 수 있었으니까요. 저도 가슴에 상처로 안고 있는데, 사람마다 그 이야기를 하니까 잊을 수가 없었죠. 거의 1년 가까이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 이후에야 사람들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되었죠.
94월드컵에 참가했던 한국대표팀(맨 아랫줄 12번이 하석주) ⓒ월간축구
- 96 아틀랜타 올림픽에서는 비쇼베츠 감독의 요청으로 와일드카드에 선발되었습니다. 이 과정도 매우 복잡했었는데요. 결국 한 달 전에야 합류하셨었죠?
당시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비쇼베츠 감독님이 사령탑을 맡으시면서 저를 잘 보셨던 것 같아요. 아마 외국 감독님들이 성실하고 열심히 하고, 스피드가 빠른 선수들을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어쨌든 저를 높게 평가하셨고, 올림픽 와일드카드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구단에서는 K-리그 때문에 보내주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 와중에 제가 무릎을 조금 다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도 저를 와일드카드로 선발한 거예요. 구단에서는 방법이 없으니까 기브스를 해서 보냈죠. 올림픽이 1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다시 소속팀으로 돌아갈 줄 알았어요.
그런데 비쇼베츠 감독님이 갑자기 기브스를 다 풀어서 KFA의 지정병원에 보내서 검사를 다시 받아보라고 하는 거예요. 결국 검사를 받았는데, 크게 다친 것이 아니라서 재활을 하면 충분히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1달의 기간이 남았으니까 가능하다는 것이었죠. 바로 기브스 풀고 합류했고, 1주일 쉬고 조깅을 시작했어요. 이후에 평가전을 뛰고 아틀랜타에 입성했죠.
당시 대우의 경우 감독님도 그렇고, 구단에서도 리그 성적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올림픽이란 무대가 크긴 했지만, 와일드카드로 보내줄 여유가 없었던 것이죠. 다른 구단들도 상황은 비슷해서 와일드카드 없이 가라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올림픽에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그렇다고 제가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요.
- 당시에 같이 올림픽 본선에 진출한 일본의 경우 와일드카드를 쓰지 않았어요. 과연 와일드카드가 효과적이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쟁거리인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분명히 와일드카드를 써서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이 있죠. 어린 선수들이 오랜 시간 준비를 했는데, 와일드카드는 1~2달 앞두고 합류하는 상황이잖아요. 미안한 마음이 들죠. 그리고 선배가 합류하게 되니까 후배들이 부담을 느낄 수도 있고요. 또 선배 입장에서도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일단 와일드카드를 선발할 때 후배들이 어려워하지 않고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선수를 선발해야 합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와일드카드는 없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계속 같이 고생했던 선수들이 가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싶어요.
- 아틀란타 올림픽에서 3경기를 모두 뛰셨는데요. 94 월드컵과 비교했을 때 상대의 능력, 그리고 스스로의 플레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세요?
우선 선배 입장이었기 때문에 후배들을 잘 이끌고 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어요. 그러나 월드컵을 치러봤기에 긴장감은 별로 없었습니다. 우승후보였던 가나와의 1차전에서 1-0으로 이기고, 멕시코와 0-0으로 비겼죠. 마지막 경기가 2패였던 이탈리아전이어서 당연히 올라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1-2로 졌어요. 아쉬움이 컸습니다.
돌이켜보면 와일드카드로 합류했던 (이)임생이와 (황)선홍이가 가나전 이후에 부상을 당해서 2-3차전에 뛰지 못한 것이 큰 악재였어요. 그리고 임생이의 부상으로 이경춘 선배가 급히 대체요원으로 합류했는데, 이탈리아전 하루 전에 도착해서 다음날 바로 경기에 나갔죠. 이것은 당시 비쇼베츠 감독님의 미스였지 않았나 싶어요. 한국에서 이탈리아에 막 도착한 선수를 다음 날 경기에 뛰게 한 것은 너무 무리였죠. 기존에 있던 선수들로 가는 것이 맞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전술적으로도 변화가 조금 있었어요. 제가 2경기 연속 수비를 보다가 이탈리아전에서는 공격적인 역할을 맡았거든요. 제 자리에는 최성용이 들어오고요. 그런 변화가 조금 미스였지 않았나 싶어요. 무엇보다 우리가 너무 쉽게 골을 허용했어요. 이탈리아가 이미 2패로 탈락이 확정되었기에 제대로 힘을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력이 있는 팀이더군요.
- 올림픽이 끝난 뒤에는 12월에 아시안컵에 참가하셨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이란전 대패로 기억되는 대회인데요. 뛰었던 선수 입장에서도 잊을 수 없는 대회였을 것 같네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이었나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대회가 5~6월에 열리면 최상의 컨디션에서 나설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죠. 반면 시즌을 다 마치고 12월에 중동에 가서 경기를 하면 정상적인 경기를 하기가 힘들어요. 1년간 리그를 치르느라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남들은 쉴 때 무더운 중동에 가서 경기를 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아무래도 나태해지는 경우가 생기죠.
물론 선수들은 국가대표라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하겠다고 각오를 다지지만, 몸이 잘 따라오지 않아요. 여기에 합숙을 하고 그러다보니까 조금 빡빡하게 대회를 준비했고, 컨디션 저하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전반에는 팽팽한 경기를 펼쳤는데, 후반에 갑자기 무너져버렸죠. 몸 상태 자체가 급격히 다운이 되었어요. 비슷한 전력의 팀들끼리 4~5골이 나오는 경우가 드문데, 그 때는 이란이 슈팅하면 골이었습니다. 최악의 순간이었죠. 몸과 마음이 다 안 따라주는 상태였고, 상대는 최상의 컨디션이었고...
- 97년은 K-리그에서 3관왕을 달성한 해였고, 하 코치님 개인적으로도 20-20 클럽을 달성하셨던 해입니다. 특별한 기억도 많으실 것 같은데요.
K-리그에서 3관왕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사실 96년 말에 팀과 연봉 협상을 했었어요. 당시 안종복 사무국장님(현 인천 사장)과 협상을 하는데, 원래 6년이 지나면 다시 계약금을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리 선배 때부터 그게 없어졌어요. 그래서 제가 6년차 대접을 해주지 못하겠다면, 대신 내년에 3개 대회 중에 하나라도 우승하면 일본으로 갈 수 있게 풀어달라고 이야기했죠. 당시에 대우가 멤버가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국장님도 승낙했고요.
그런데 우리가 3관왕을 해버린 거예요. 당연히 97년에 일본에서 입단 제의가 왔고, 가려고 하는 상황이었죠. 그 상황에서 갑자기 김우중 회장님이 안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IMF가 터진 상황이었는데, 사람들 인식이 IMF 때문에 선수를 판다는 소리가 나올까봐 그러셨던 겁니다. 그것 때문에 한 달 반 정도 진통을 겪었고, 결국 공항까지 가서 김우중 회장님을 만나 제가 돈을 벌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선수 생활 말년에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 일본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 대표팀에서도 엄청난 활약을 보이셨어요. 97년에만 A매치에서 3골-8도움을 기록했고, 그 중 2골-6도움이 세트 피스 상황에서 얻은 것이었죠. 왼발의 감각이 최절정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97년에 K-리그에서도 3관왕을 차지하면서 프리킥으로만 4골을 넣었어요. 대표팀에서도 코리아컵(대통령배)에서 도움 4개를 기록하면서 MVP를 받았고요. 코리아컵에서 MVP 2번 받은 선수도 제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어쨌든 대표팀에서도 프리킥으로 공격 포인트를 많이 기록했어요. 그러다보니 언론에서 '왼발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만들어줬죠.
기분 좋은 별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부담도 많이 되었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훈련도 많이 했죠. 원래부터 왼발을 오른발보다 95% 이상 많이 쓰는데, 더 열심히 해서 한 단계 올라서자는 마음이었어요. 특히 왼발 프리킥의 감각을 위해 팀 훈련이 끝난 뒤에 항상 50~100개씩 차곤 했습니다. 발가락에 멍이 들 정도였죠.
그렇게 연습을 많이 하다보니까 자신감이 생기고, 골이 쉽게 들어가고 주위에서 잘 찬다고 해주니까 스스로 더 동기부여가 많이 되곤 했어요. 그래서 당시에는 왼발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준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97년을 기억해주는 이유이기도 하죠.
- 어떻게 보면 역대 최고의 왼발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정교한 왼발 킥을 구사할 수 있었던 노하우를 조금 공개해주세요.(웃음)
사실 지금도 왼발잡이 선수가 흔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왼발이 좋은 고종수나 염기훈, 김치우 등의 선수들을 보면 폼이 조금 특이하죠. 왼발잡이만의 특성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노하우를 공개할 것은 없습니다. 언론에서 저를 너무 과하게 칭찬을 하면서 명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더 열심히 노력했던 것밖에 없죠. 기회가 오면 제가 차야 하니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왼발에 더 많은 신경을 썼어요.
지금은 공도 많이 좋아지고, 선수들의 기술도 더 좋아졌기 때문에 우리 때보다 왼발을 잘 쓰는 선수들이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 > 2편에서 계속...
인터뷰=이상헌/정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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