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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人터뷰15 -하석주下] "98월드컵, 천국과 지옥을 오간 멕시코전"

정민건TV 2010. 3. 23. 05:42

 

[월드컵 人터뷰15 -하석주下] "98월드컵, 천국과 지옥을 오간 멕시코전"

 

98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에서 골을 넣고 환호하는 하석주 ⓒKFA 홍석균

-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는 일본과 명승부를 연출했습니다. '도쿄대첩' 당시에도 왼쪽에서 쉴 새 없는 왼쪽 침투와 크로스가 인상적이었는데요. 당시를 돌이켜보신다면.
사실 그 때 일본에 진출하기 위해서라도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눈도장을 찍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리고 한일전에서는 무조건 지면 안된다는 생각과 일본 원정에서 승리하면 월드컵 진출이 90% 이상 확정이라는 마음도 있었고요. 최종예선에서 홈 2연승을 하고, 일본전을 준비했기 때문에 부담도 적었고, 컨디션과 사기도 올라 있었습니다. 선제골을 허용한 뒤에 서정원과 이민성 선수가 골을 넣으면서 극적으로 역전승하고, 일본에 비수를 꽂았던 거죠. 선수들 모두가 컨디션이 좋았어요. 일본전 앞두고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아예 대표팀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시절이었죠.(웃음)

일본전을 앞두고 타워호텔에서 합숙을 하는데, 어느 노인 분이 오셔서 "하석주 선수, 일본전에 지면 살아 돌아올 생각을 말아야 해. 다른 팀에는 져도 일본에게는 지면 안 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 분들에게 얼마나 큰 한이 있으시길래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한일전을 앞두고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마련인데, 그 당시에는 마음 편하게 경기를 했었고, 그래서 역전승도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 98 프랑스 월드컵 역시 코치님께는 잊을 수 없는 대회였습니다. 멕시코전은 천당과 지옥을 오간 경기였는데요. 골을 기록했던 순간의 기쁨과 퇴장 당했을 때의 아픔이 이어졌죠.

축구 선수들이라면 누구나 오르막과 내리막 길이 있지만, 저만큼 왔다갔다했던 선수도 별로 없었을 거예요.(웃음) 98년이면 제 축구인생에서 황금기였어요.
멕시코와 1차전을 벌이는데, 해볼 만한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죠. 경기에 나갔을 때 컨디션도 좋았고, 프리킥 기회에서 상대 머리 맞고 들어가며 행운의 골도 넣었어요. 사실 골을 넣으면서 기분이 좋긴 했지만, 그렇게 흥분을 많이 한 상태는 아니었거든요. 다만 우리가 월드컵에서 선제골을 넣은 것이 처음이었고, 이길 확률이 보이자 에너지가 많이 발산된 상태였죠.

그런데 조금 있다가 백태클로 인해 퇴장을 당했어요. 제 생각에는 퇴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레드 카드가 나오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군요. 경기장에서 다리가 떨어지지 않고, 말문도 안 열렸어요. 진짜 운동장이 뒤집어지는 듯한 느낌이었죠. 백태클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고, 잠깐 설명을 들었을 뿐이었는데, 백태클로 퇴장을 당하니까...

멕시코전에서 퇴장 당한 후 동료들의 위로를 받는 모습 ⓒKFA 홍석균

벤치에도 앉을 수 없으니까 지하 라커룸으로 갔어요. 거기에서 혼자 앉아있는데 TV도 없었어요. 전반전이 1-0으로 끝나고 감독님이나 선수들이 들어왔고, 모두 괜찮다고 힘내라고 하더군요. 눈물이 났어요.

후반전이 시작되고, 저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 부처님, 세상의 모든 신께 간곡히 기도합니다. 제발 후반전을 1-0으로 마치게, 아니면 최소한 1골만 내주는 것으로 끝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어요.

그렇게 혼자 있는데 경기장에서 환호성이 세번 나왔어요. 선수들이 들어올 때 보니까 전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더군요. 당시 제가 고참급이었는데, 너무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저 하나로 인해 팀 분위기를 다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한 이래 공식경기에서 퇴장 당한 것은 그 경기가 처음이었어요.

정말 괴로웠죠. 언론에서도 '하석주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밥만 먹고 방에 들어간다'고 보도했어요. 맞는 이야기였죠. 다음 날 아침에 빵으로 식사를 하는데, 속이 울렁거려서 빵이 먹히지 않는 거예요.

빵 3~4개를 주머니에 넣어서 숙소로 돌아오는데, 근처에 조그마한 호수가 여럿 있었거든요. 주사바늘을 하나 가져가서 빵을 껴서 물고기를 낚았어요. 물고기 한 마리가 낚여서 올라오는데, 잡혀 올라오는 물고기 눈이 꼭 나를 보는 듯 하더라고요. 죽음을 앞둔 애처로운 눈 같은 것이었죠. 내 심정과 똑같았어요. 그래서 물고기를 놔주면서 '우리 모두 참 고달픈 삶이다. 이것을 헤쳐 나가야 하는데 나에게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풀어줄테니까 열심히 헤엄쳐 다녀라'하고 당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퇴장으로 인해 네덜란드와의 2차전은 벤치에 앉지 못하고, 관중석에서 (황)선홍이와 같이 보게 됐어요. 선홍이도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죠. 원래 곧바로 퇴장 당한 경우 2경기 출장 정지인데, 제 경우에는 징계위원회에서 회의를 해서 고의성이 없었고 심판의 미숙함도 있었다고 해서 1경기 출장 정지로 완화된 상태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네덜란드는 강팀이니까 비기기라도 해서 벨기에전에 승부를 볼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0-5로 지니까 가슴이 더 아픈 거예요. 저 때문에 분위기가 이렇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죠. 더군다나 차범근 감독님까지 경질되셨고요. 후배들 얼굴도 못 보고, 축구팬들에게도 얼굴을 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국하면 대표팀에서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 전에 마지막 벨기에전은 몸이 으스러지더라도 한 번 해보자는 각오를 했습니다. 이대로 쉽게 물러서면 안 된다, 월드컵에 도전할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뛰었어요. 그 와중에 이임생 선수의 붕대 투혼도 있었고, 근육 경련을 일으킨 선수들도 있었죠. 저도 유상철 선수의 골을 어시스트했고요.

1-1로 비겼지만,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경기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벨기에전을 이겼으면 그나마 마음의 짐을 조금 덜 수 있었는데, 이기지 못해 아쉽더군요. 목이 메었어요.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에게 정말 미안했고, 그런 마음 때문에 갑자기 눈물도 나더라고요.

벨기에전 투혼 때문인지 언론이나 팬들도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했다고 마무리를 해줬어요. 저는 국내에 돌아와서 대표팀을 은퇴한다는 결심을 하면서 모든 것을 정리했죠.

- 말씀하셨지만, 패배의 주역으로 몰리면서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셨어요. 심리적으로 많이 흔들렸을 것 같은데요. 판정에 대한 억울한 마음도 들었을 것 같고요.

처음에는 심판이 원망스러웠죠. 하지만 내가 퇴장의 빌미를 줬기 때문에 받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나중에는 심판에 대한 원망보다는 겸허히 받아들이자는 생각을 하게 됐죠.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가 더 힘들기도 했고요. 그것을 받아들이니까 조금 편해지더군요.

무엇보다 저로 인해 가족이 힘들어하는 것이 가장 괴로웠습니다. 저 혼자면 괜찮은데, 아내와 아이들까지 힘들어질 것을 생각하면 말이죠. 주위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났어요.
그리고 인터넷을 보니 팬들이 반으로 나뉘어서 저를 죽이니 살리니 그러시더군요. 그것을 보고 저는 오히려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를 감싸는 팬들이 반 정도는 있었으니까요. 그 팬들은 심판의 미숙함도 탓하고, 또 제가 대표팀에서 열심히 했던 선수라면서 옹호해주셨어요.

98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에 나선 선발 라인업 ⓒKFA 홍석균

- 프로 세계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98시즌을 앞두고 일본으로 이적했습니다. 새로운 도전에 나선 셈인데요.
당시에 고정운 선배와 (홍)명보가 일본에 진출했었는데, 저에게도 2~3개 구단에서 제의가 왔었어요. 그 중에서 세레소 오사카를 선택했는데, 고정운 선배가 있었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도 대도시에 교민들이 많은 오사카를 선호한 것이죠.

그런데 그 무렵에는 한국축구 자체가 3-5-2 시스템을 선호했고, 반면 일본은 4백(Back 4) 시스템을 선호했어요. 세레소 역시 4백이었죠. 3백과 4백은 차이가 크거든요. 그 때문에 처음에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어요. 얼마 전에 박원재 선수가 일본에 갔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온 이유 중에 하나도 이 때문일 거예요. 개념이 다르거든요.

그리고 감독과의 마찰도 있었어요. 당시 세레소에는 저와 황선홍, 고정운, 마니치(전 부산 대우)에 브라질 선수도 한 명 왔었죠. 5명의 외국인 선수 중에 3명이 나가기 때문에 로테이션으로 출장했어요. 그런 부분에서 마찰이 일어나면서 불화가 있었죠.

그렇게 한 시즌을 보낸 와중에 빗셀 고베에서 제의가 들어왔던 겁니다. 마침 (김)도훈이도 있으니까 팀을 옮겼죠. 고베에서는 제가 세레소 시절에 하지 못했던 것을 보여줬고, 도훈이와 호흡을 잘 맞춰 '오야붕' 소리를 들으면서 선수들을 리드했어요. 팀은 약했지만, 2부리그로 떨어지지 않고 2년간 재미있게 축구를 하고 마무리했죠.

- 고베에서 김도훈, 최성용 선수와 함께 한국인 3총사로 이름을 떨치셨죠. 한국인 3명이 뭉쳐서 두려울 게 없으셨을 것 같은데요.(웃음)

도훈이와 제가 고베에 가면서 좋은 활약을 보였죠. 고베라는 팀은 우승권보다는 항상 중하위권에 있던 팀이었어요. 따라서 2부리그로 떨어지지 않고, 중위권에만 가면 되는 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서 팀을 8위까지 올려놨어요. 그래서 (최)성용이도 와서 한국인이 3명이 되었죠.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고베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5경기 정도를 남겨놨던 시점이에요. 5경기에서 3승 정도는 해야 2부리그로 떨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죠. 그 시점에서 제가 헤딩 경합을 벌이다가 팔꿈치에 맞아서 광대뼈가 골절됐었습니다. 바로 실려 나갔죠. 그 때 수요일과 토요일에 연속으로 5경기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경기를 다 마무리하고 수술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3일 정도 지나면 뼈가 굳어버리기 때문에 수술을 해야 한다고 그러더군요.

수술을 하면 3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하고, 1주일 뒤에나 조깅하고 마스크를 쓰고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2경기 정도는 뛰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가장 빠른 방법이 뭐냐고 물었더니 마취를 하지 않고 수술을 하면 하루 만에 퇴원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3일째는 경기를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본인이 판단하라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마취 없이 수술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죠.(웃음)

왜냐하면 팀에 한국인 선수가 3명 있는데, 2부리그로 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저 이후에도 한국 선수들이 진출해야 하는데, 그리고 2부리그로 떨어지면 지금 뛰고 있는 한국 선수들도 다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또한 제가 팀의 제일 고참으로서 책임감도 있었고요. 제가 그렇게 복귀해서 마스크 쓰고 뛴다고 더 잘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정말 하고 싶었습니다.

이후에 1년 더 고베에 있고 싶었는데, 가족 때문에 돌아왔어요. 사실 아이들이 아토피가 있어서 먼저 한국으로 갔었거든요. 1년간 가족과 떨어져서 살았던 거예요.

- 최근 들어 K-리그를 거치지 않고 어린 나이에 바로 일본으로 진출하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선수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어떻게 보면 K-리그는 항상 위기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제가 선수 생활할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무엇보다 K-리그를 등한시하는 선수들이 너무 많습니다. 선수들도 일본에서 유혹이 있으면 바로 가죠. 물론 일본에 가서 좋은 점도 있어요. 다만 K-리그에 좀 더 정을 주고, 우리 리그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면 해요. K-리그에서 신인왕, 득점왕, 대표팀 발탁 등을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뛰다가 자연스럽게 해외로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선수를 위한 대우도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구단 사정도 있지만, 프로로서 받을 수 있는 대우는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또 선수가 어느 팀에서 출장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경우, 자연스럽게 다른 팀으로 임대를 보내준다든지, 이적 시장을 좀 더 활성화시킨다든지 해서 공생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부분을 위해 현역 시절에 선수 노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결국 하지 못했어요. 우리 선배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그것을 하지 못한 괴로움은 있어요.

2000년 일본과의 친선전에서 결승골을 넣고 환호하는 하석주 ⓒKFA 홍석균

- 2000년 아시안컵은 사실상 대표 선수로서의 마지막 국제대회였습니다. 세대교체가 진행되는 상황이었는데,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상황에 대해 만감이 교차하셨을 것 같아요.
세대교체는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름만으로 대표팀에 있겠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죠. 은퇴 시기 등을 잘 판단하고 정리해서 준비해야 하는데, 사람이 욕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시기를 놓치다보면 조금 쓸쓸하게 은퇴하는 경우도 생기죠. 아직 좋을 때 과감하게 후배들을 위해 물러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한 마디 더 하자면 대부분의 감독들이 새로운 모험을 하고 싶어도 여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어요. 대표팀을 누가 맡든지 그 사람을 믿고 기다려줄 수 있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감독이 구상하는 것을 좀 더 기다려줘야 해요. 그 속에서 세대교체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고, 또 대표팀에 발탁되어서 성장하는 선수들도 나오게 되거든요. 그 선수들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기다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 이후 히딩크 감독님이 오신 이후에 다시 대표팀에 뽑히셨는데요. 2002 월드컵에 대한 욕심이 다시 생기시지 않았나요?

히딩크 감독님 밑에서 두 달간 훈련하고, 이집트 4개국 대회에서도 우승했어요. 그리고 컨페더레이션스컵에도 출전했죠. 사람이란 누구나 욕심이 있기 마련이라 저도 한국에서 하는 월드컵에 나가고 싶은 생각은 있었어요. 그런데 좋은 후배들이 많이 나왔고, 결정적으로 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98 월드컵에서 퇴장 당한 기억이 제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는 거예요. 자신이 없었던 거죠.

나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몸 상태가 좋다 해도 제가 좋은 모습을 보인다는 보장이 없었어요. 이 기회는 후배들이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히딩크 감독님과 면담을 하고 "더 이상 대표팀에 있기 힘들 것 같습니다. 여기서 그만두는 것이 부담도 적고, 후배들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계기도 될 것입니다. 저를 불러준 것은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고 말씀드렸어요.

제가 끝까지 남아있었다 해도 경쟁에서 이겨 2002 월드컵에 나갈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어쨌든 저로서는 98 월드컵 멕시코전 퇴장의 악몽이 항상 무거운 짐이었어요.

- 잠깐 언급하셨지만, 2001년 컨페드컵 프랑스와의 1차전이 마지막 A매치였습니다. 96번째 A매치였는데, 센츄리클럽 가입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셨나요?

제가 96년 올림픽에 나갔을 때 아시안컵 예선에 있었어요. 올림픽 대신 거기에 나갔다면 센츄리 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죠. 그런데 사람이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는 없잖아요.

무엇보다 98 월드컵 멕시코전 퇴장의 짐이 저를 너무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대표팀은 항상 부담스러웠어요. 욕심으로는 100경기를 채우고 싶었지만, 힘들고 괴로웠던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빨리 결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 지난 선수 생활을 돌이켜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축구를 시작한 이래, 축구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축구를 시작해서 은퇴할 때까지 퇴장을 당한 것은 98 월드컵 멕시코전이 처음이었죠. 그 무거운 짐이 대표 선수로 11년 활동했던 것보다도 더 컸어요. 그 죄책감은 평생 제 가슴 속에서 따라다니는 것 같아요. 빨리 짐을 덜어버리고 싶었는데, 잘 안되더군요.

그 짐을 언제 조금 벗었냐면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후배들이 4강에 진출했을 때였어요. 아직도 대표팀 경기를 보면서 퇴장 당하는 선수들이 나오면 제 심장이 뛰더군요.(웃음) 그래서 저는 대표팀에서 퇴장 당한 선수를 질타해 본 적이 없어요. 그보다는 '나와 같은 상처를 입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축구팬들이 많은데, 제가 지금까지도 갖고 있는 짐들에 대해 용서해주셨으면 해요. 물론 그 전에 용서해주신 분들도 계시지만, 어쨌든 11년간 대표팀에서 활동하는 등 한국축구를 위해서 열심히 했던 것도 있기 때문에 용서해주시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저 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역적이 되는 경우가 나올 수 있지만, 그런 선수들을 포용할 수 있는 팬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는 이제 '선수 하석주'가 아니라 '지도자 하석주'로서 정상에 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후배들에게 조언도 많이 해주고, 한국축구를 위해 힘쓸 수 있는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 앞으로의 목표나 계획이 있으시다면.

저는 사람이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단 K-리그 팀의 감독을 맡아보고 싶죠. 우승 전력이 아닌 팀이지만, 선수들이 100% 이상 쏟아 부을 수 있는 팀을, 정말 저 팀과는 경기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팀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적도 좋아야 하지만, 관중들이 정말 즐거워하고, 하석주 축구는 재미있고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축구를 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는 대표팀 감독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2000년 일본과의 경기에서 ⓒKFA 홍석균

- 이제부터 팬들의 질문을 몇 가지 받아보겠습니다. 아주대 출신들은 대우에 대한 동경이 크다고 들었는데, 90년에 대우에 입단했을 때의 느낌은 어떠셨는지 물으시네요.
그 당시 아주대는 대우 계열의 팀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지원 받았어요. 그래서 아주대의 환경은 상당히 좋았죠. 당연히 대우에 가고 싶었고, 제가 꿈에 그리던 스타 형님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 들뜨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대우라는 팀 자체가 화려한 멤버와 구단의 좋은 지원 등으로 최고의 평가를 받았으니까요.

물론 한편으로는 주위 염려대로 저 선수들 틈에서 경기를 뛸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있긴 했어요. 1년 후에 방출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도 했었죠.(웃음)

그러나 확실히 운동을 성실하게, 열심히 하면 좋은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준비하고 있으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아요.

-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와 골을 3개씩 꼽아주세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94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 북한전이었죠. 사실 그 경기 자체보다는 극적으로 월드컵에 진출할 수 있었던 과정이 기억에 남는 거죠. 그리고 94 월드컵 볼리비아전과 98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도 잊을 수 없어요.

기억에 남는 골은 일단 1991년 처음 대표팀에 뽑혀서 대통령배 결승전 이집트전에서의 다이빙 헤딩 결승골입니다. 당시 MVP도 받았죠.(웃음) 그리고 잠실에서 열린 마라도나 초청 보카 주니어스와의 친선경기에서 역시 다이빙 헤딩골을 넣었어요. 8만 관중 앞에서의 골이라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98 월드컵 멕시코전에서의 프리킥 골이죠. 악몽의 경기이지만 그 골은 기억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악몽을 조금이나마 풀어준 2000년 잠실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골대 맞고 들어간 중거리슛 골도 기억이 나네요.

- 하 코치님의 왼발 크로스를 가장 잘 받아먹었던(?) 선수는 누구인가요?(웃음)

일단 최용수 선수가 생각나는군요. 제가 측면에서 올려주면 용수가 중앙에서 많이 받아 먹었죠.(웃음) 그리고 (유)상철이의 경우는 세트피스 기회가 나면 "형, 제 머리 쪽으로 꼭 올려주세요"하고 부탁하곤 했어요. 제가 그 정도로 킥이 정교한 것은 아닌데, 선수들은 제가 누구한테 차면 거기로 간다고 생각했나 봐요.(웃음)

- 자신을 제외한 왼발의 스페셜리스트 중에서 인상적인 선수를 꼽아주세요. 그리고 그 선수를 하 코치님과 비교한다면 어떤가요

?
저는 고종수 선수가 왼발을 가장 잘 쓴다고 생각해요. 종수가 저보다 좋았던 것 같아요.
같은 왼발잡이지만, 볼 컨트롤과 패스, 킥의 정교함은 종수가 더 나았죠. 반면 저는 드리블과 크로스, 스피드가 더 좋았고요.

그리고 종수의 경우 소속팀(수원)에 좋은 공격수가 많아서 파울을 많이 얻어 프리킥을 찰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제 경우는 1경기에 한 번도 기회가 없을 때도 있었죠. 그런 면에서는 종수가 킥을 많이 찼고, 감각적으로 유리한 면도 있었죠.

- 일본에서 돌아오셨을 때 왜 부산이 아니라 포항으로 가셨는지요?

사실 가장 먼저 제의를 한 곳은 조광래 감독님이 계셨던 안양(현 서울)이었어요. 그 당시 부산 쪽에서는 별다른 제의를 하지 않았죠. 금액을 맞춰주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한국에 들어올 때는 돈 때문이 아니라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던 것이거든요.

부산에서 8년간 선수 생활을 했으니 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죠. 그런데 대우가 없어지면서 부산 아이콘스로 바뀌었고, 제가 알던 분들도 전부 그만둔 상태였어요. 거기에 당시 포항의 최순호 감독님이 정말 적극적으로 영입 의사를 보이셨죠.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대우에 대한 마음은 여전했고, 미안함도 있었어요. 팬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때가 대우 시절이었으니까요.

- 포항과 경남, 전남 코치로 활동하셨는데, 지도했던 선수 중에서 재능이 뛰어나고 기대가 되는 선수가 있다면.

포항에 있을 때는 오범석과 황진성이 대표 선수로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범석이가 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고, 진성이 역시 팀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죠. 경남에 있을 때는 김동찬을 굉장히 아꼈습니다. 애정을 많이 갖고 지도했던 선수였죠. 그래도 생각했던 선수들이 전부 잘 된 것 같아요. 전남에 와서는 지동원을 꼽고 싶어요. 한국축구의 스트라이커 계보를 이어갈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 긴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지도자로서도 멋진 모습 보여주시길 기원 드립니다.

공식질문1. 축구는 (꿈이자 전쟁)이다.

축구는 모든 사람들의 꿈일 수도 있고, 전쟁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피해를 줄 수도 있죠. 어떻게 보면 즐겁고, 달리 보면 무서운 것이 축구인 것 같습니다.

공식질문2. 월드컵은 (축제) 이다.

월드컵으로 인해 모두 축제처럼 즐기죠. 자책골을 넣는 선수도 있고, 저처럼 퇴장 당하는 선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월드컵을 축제로 즐길 수 있는 마음을 갖고 경기를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이상헌/정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