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스타人터뷰] 철인 김기동 "은퇴 종용 분위기, 아주 짜증났다"
그라운드의 철인, 김기동 축구 히스토리!
K리그의 살아있는 신화이자 최고령 미드플레이어, 포항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대들보, 수비형과 공격형 미드필더를 겸하는 백전노장, 이름없는 영웅에서 그라운드의 철인까지 모두 김기동(40) 선수를 수식하는 말이다. 1972년에 태어나 올해로 꼭 마흔인 그는 1991년부터 20년 이상 몸담아온 K리그에서 장장 500경기 출전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필드플레이어로서는 최초의 기록이다. 앞으로 그가 그라운드를 밟는 매 순간 새로운 기록이 세워진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이다.
◆ 어린 시절 - 센터포드로 활약하던 ‘작은 거인’
* 기동 = 기동력?
‘동녘 동’에 ‘터 기’를 쓴다. 포항에 입단해서 본의 아니게 유공에 갔다 왔는데 누가 그러더라. 너는 천상 포항에 있어야 한다고. 이사를 할 때도 꼭 동쪽으로 가라고 하더라.
* 센터포드로 6골을!
그 때는 시골에서 동네에서 뛰어노는 정도였다. 체육 선생님이 가르치는 수준의 축구였고, 전문적인 코치가 없었다. 그런데 4학년 때 우리 학교가 도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했다. 그러고 나니 당진 축구가 갑자기 주목받았다. 나는 어릴 때도 키가 상당히 작았지만 센터포드를 맡았다. 대회를 치르면서 여섯 골을 넣었다. 우리팀 골을 내가 혼자 다 넣었다.
* 부모님의 반대
힘들다고, 하지 말라고 처음엔 반대도 많이 하셨다. 친척들이 쟤는 키도 작은데 해봐야 얼마나 하겠냐고, 남들보다 특출난 것 같지도 않은데, 이러면서 부모님을 말렸다. 저는 워낙 그런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오기가 생겼다. 그래? 그럼 한 번 해보자! 그렇게 시작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당시에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프로로 가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부분 대학을 갔다가 프로로 입단했다. 대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감독님이 부르셨다. 대학교에 티오가 한 자리 밖에 없다는 거다. ‘네가 대학을 가면, 다른 선수 한 명이 갈 데가 없다. 너는 포항에서 제의가 왔으니 거길 가면 어떻겠느냐.’ 이러셔서 ‘그럼 친구한테 티오를 주십시오’ 그랬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 포항에 적을 두었던 것이 잘했다 싶다.
◆ 포항의 2군 연습생 - “울면서 뛰고, 뛰면서 울었다.”
김기동은 1991년 포항아톰즈의 연습생이 되었다. 입단 첫 해 체력테스트에서 꼴찌를 할 정도로 체력이 약했다. 2년 동안 단 한 차례도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집근처 산을 뛰고 다리에 쥐가 나면 바늘로 찌르면서 2년 만에 체력테스트의 상위권에 진입했다. 철저한 자기관리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 체력테스트는 항상 꼴찌!
일단 힘이 안되니까 너무 힘이 들었다. 체력 테스트를 받으면 항상 꼴찌였다. 당시에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오는 선수들이 별로 없었다. 대단한 선배들도 많이 있었고. 실력도 딸리고, 체력도 딸리고, 뭐든 딸리니까 자신감을 많이 잃었다. 너무 나약해지더라. 그럴 때였다.
* 바늘로 수없이 찔러가며...
제일 먼저 체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구력을 높이려고 개인적으로도 산을 많이 뛰었다. 체력이 얼마나 약했는지, 고등학교 때까지 전반전 뛰고 나면 종아리에 쥐가 났다. 그 때는 쥐가 날 때 바늘로 찌르면 된다고 해서 수도 없이 바늘로 찔러댔다. 바늘로 찌른다고 쥐가 안나는건 아닌데 (웃음) 그 때는 왜 그리 찔렀는지 모르겠다. 하하.
* 울면서 뛰고, 뛰면서 울고...
2년 동안 이를 악물었다. 울면서 뛰고, 뛰면서 울었다.
사람이 정말 힘들 때는 다 놓고 싶지 않나. 뛰다보면 걷고 싶은데, 나는 울면서도 계속 뛰었다. 지금 포기하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뭘 할 수 있겠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뛰었다. 걷더라도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걸었다. 걷는 속도에 맞춰서 계속 뛰는 거다.
그 때의 처절한 경험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서, 그걸 바탕으로 지금까지 견디고 버텨왔다.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그 때를 잊지 못할 것이다.
◆ 유공의 날개 - “넌 이제 죽었다, 그랬는데 하나도 안 힘들어요!”
1993년 유공-부천SK로 적을 옮긴 김기동은 그해 7경기에 출전하며 가능성을 알렸고 10년 동안 활약한다. 1995년부터 새롭게 부임한 니폼니시 감독과 만나 재능을 꽃피우며 최고의 미드필더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 하마터면 백수될 뻔
92년도에 포항에서 감원을 했는데 저는 포항이랑 유공 어느쪽에도 계약을 한 상태가 아니었다. 유공이랑 계약을 한 게 아니고, 그냥 가서 한 달 동안 테스트 기간을 가졌다. 두 경기 정도 연습게임을 했는데 부상을 당했다. 계약은 해야 되는데 내측 인대를 다쳐서 한 달을 쉬게 되었다. 다행히 유공에서 저를 받겠다고 사인을 해주었다.
* 개인훈련의 성과
유공으로 갈 때 선배들이 하나같이 ‘너 이제 죽었다, 유공에서 체력훈련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아냐’ 이랬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막상 운동을 시작하는데 안힘든거다! 포항에 있을 때보다 60%, 70%밖에 안힘들더라. 그래서... 너무 좋았다. 하하하~
* 기회의 땅 유공의 니폼니시 감독
내 인생을 바꿔놓으신 분. 니폼니시 감독이 오면서 한국 축구도 많이 바뀌었고, 팀플레이도 바뀌었고. 패스플레이를 하면서 저를 많이 중용을 했다. 제 장점이 부각되었고 주전으로 확실하게 발돋움했던 기회가 되었다.
◆ 무릎부상, 실명위기 - “실명하는 줄 알았죠. 깜깜하기만 하고 빛이 안보였어요.”
1997년 4월, 경기중에 왼쪽 무릎이 밟혀서 실려나갔다. 4개월의 재활 끝에 복귀. 2004년, 무릎 수술을 다시 한 번 받아야 했다. ‘은퇴하는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4개월 재활 이후 죽기 살기로 뛰어 건재함을 과시했다. 2006년 오른쪽 눈썹 위가 찢어졌다. 30바늘을 꿰맸다. 2007년에는 실명의 위기도 겪었다. 2008년에는 발가락이 부러졌다. 언제나 강인한 의지로 부상을 이겨냈다.
* 두 번의 무릎 수술
1997년에 무릎을 크게 다쳐서 수술을 했었는데, 오래 쓰다보니까 염증이 생겼다. 2004년에 독일로 수술을 하러갔다. 큰 수술이 아니었는데 나이가 있다보니 주위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
2003년부터 포항에서 뛰었는데 2005년까지 3년 계약을 했었다. 계약 기간이 짧았다면 그 때 은퇴를 했을지도 모른다. (웃음) 2005년에 파리아스 감독이 왔다. 감독이 구단에서 프로필을 받아보니, 나이도 있겠다, 수술도 했겠다, 별로였을 거다. 그것 때문에 파리아스 감독과 첫 시즌을 치루면서 미팅도 많이 하고 부대꼈다. 그 때 좀 힘들었다.
* 은퇴를 종용하는 분위기
주위에서는 나이가 있으니까 무릎 수술받고 재기를 못하면 은퇴할지도 모른다고 걱정들이 많았다. 나는 걱정이 별로 없었다. 수술만 잘 되면 충분히 더 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정작 본인은 크게 걱정을 안하는데, 하도 주위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아주 짜증났다. (웃음)
* 자신과의 싸움, 재활 훈련
진짜 힘들었다. 재활은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라 자기와의 싸움이니까. 자기랑 자꾸 타협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타협을 하면 재기에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적어진다.
재활훈련이나 개인훈련도 마찬가지인데, 혼자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힘들다. 오늘 10바퀴를 뛰어야겠다고 운동장에 나갔다가 8바퀴를 돌고나서 그만 뛸까, 그런 마음이 든다. 9바퀴 뛰면 남은 한 바퀴는 그냥 걷고 싶어진다.
* 실명의 위기!
2007년도에 포항이 K리그에서 우승한 다음에 컵대회 2차전을 나갔는데 퍽! 맞았다. 나는 공에 맞은 줄도 몰랐다. 팔꿈치에 맞은 줄 알았다.
눈이 안보였다. 이상하다, 싶었다. 보통 주먹으로 맞으면 두 개로도 보였다가, 별도 보였다가 한다는데, 그런가보다 하고 일단 교체를 해서 나왔다.
일요일이라서 포항 안과가 다 문을 닫았다. 앰뷸런스를 타고 대구까지 갔다. 가는 동안 후레시를 눈에 비추는데 그 밝은 빛도 안보이더라. 그냥 깜깜했다. 빛이 안보였다. 실명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옆에 있던 아내는 자기 눈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더라.
대구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각막 뒤쪽의 망막에 출혈이 생겼다고 했다. 누워서 자면 피가 굳어서 실명이 될 수 있다면서 열흘 정도 앉아서 자라고 했다. 다행히 공에 맞은지 여섯 시간 지나고 나니까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그 바로 다음 날 서울에서 윈저 어워드 대상 시상식이 있었다. 집에 오니까 밤 12신데 시상식에 안갈 수도 없고, 아내가 운전을 해서 서울로 올라오니까 새벽 4시 반이었다. 밤을 거의 샜다. 호텔에서도 3시간 정도 앉아서 자다가 시상식 장에 갔다.
시상식 장에서도 꾸벅꾸벅 졸았다. 연예인들이 앞에서 왔다갔다 했다는데 기억이 안난다. 누가 탁! 치길래 그 때 일어났다. 김기동! 이름 불러서 상 받고 왔다. 며칠 동안 앉아서 자느라 고생이 심했다.
* 98월드컵 예선, 한일전 출전
국가대표로 총 3경기를 뛰었다. 좀 아쉬웠던 부분은 국가대표 마지막 경기인 98 월드컵 예선 한일전!
본선 확정 후 명보형이 경기에 나가지 못하면서 그 대체자로 일본전에 선발 되었는데 당시 언론에서 말이 많았다. 사실 97년에 무릎 수술을 하며 쉬다 97년 8월에 재기해서 9월에 바로 대표팀에 발탁되었는데 다른 선수들과 연습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동료 선수들을 알고, 감독이 원하는 부분을 알았다면 경기를 잘 준비 했었을텐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당시 경기 후 소속팀에 복귀 했을때 니폼니시 감독이 '니가 잘 못한게 아니다. 선수들이 풀어져 있었다.'라며 위로를 해줬다.
국민들의 이목을 받고 나라를 대표해서 국가대표로 뛴다는 것은 영광인데 많이 못해본 것이 아쉽다.
※ 한 눈에 보는 김기동의 축구 인생, 하편에 계속...
(인터뷰 : 배나영 / 영상 : 정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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