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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人터뷰5 -서정원上] "바르샤, 벤피카 진출 좌절이 가장 아쉬워"

정민건TV 2009. 10. 28. 10:02

 

[ⓜ 월드컵 人터뷰5 -서정원上] "바르샤, 벤피카 진출 좌절이 가장 아쉬워"

 

대한축구협회(KFA) 홈페이지에서는 DAUM과 공동 기획한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는 내년 6월까지 격주로 게재합니다.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과 대표팀 경기의 홍보를 위해 국내 최대 인터넷포털 운영사이자 KFA 공식후원사인 DAUM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하는 홍보 프로그램으로서 한국축구의 국민적 붐 조성을 꾀하고자 하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월드컵과 관련된 인물들이며, 현 대표팀 선수들을 비롯해 추억의 스타, KFA 행정인, 역대 월드컵대표팀 감독 등이 릴레이 인터뷰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특히 KFA 및 DAUM 홈페이지를 통해 축구팬들의 질문들도 수렴해 궁금한 점들을 해소시켜드립니다. 인터뷰는 KFA 홈페이지와 DAUM 홈페이지에 기사와 동영상으로 게재됩니다.

 

 

 

다섯 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90년대 한국축구 최고의 윙어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서정원 올림픽대표팀 코치(39)입니다. 서 코치는 각급 연령대 대표팀을 거친 뒤 1990년 7월 27일 다이너스티컵 일본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했습니다. A매치 통산 87경기에 출장해 16골을 기록했으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비롯해 1994년 미국 월드컵과 1996년 아시안컵,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참가했습니다.

1997년에는 프랑스 1부리그의 스트라스부르에 입단해 '세오'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이후 수원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K-리그와 AFC 클럽선수권, FA컵 등에서 여러 차례 우승컵을 들어올렸습니다. 또한 2005년부터는 오스트리아로 진출해 현역 생활을 이어가는 동시에 지도자로서의 경험을 쌓았으며, 올해부터 홍명보 감독을 보좌해 U-20 대표팀에 이어 올림픽대표팀의 코치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특집 인터뷰 5번째로 서정원 코치님을 모시게 됐습니다. 이집트에서 돌아오신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월드컵에 다녀온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지인들께 인사드리고 못 뵈었던 분들 만나고 있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아무래도 U-20 대표팀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예상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올렸어요. 느낌이 어떠신가요?

가기 전에는 걱정도 됐고, 관심이 적어 서운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관심이 적어) 마음이 편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쉬웠죠. 우리나라 축구의 기둥들인데, 사기가 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약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선수들과 83년에 이뤘던 4강 성적에 버금가는 성적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선수들에게는 영광이자 어떤 면에서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선수로서 한 번 올까말까 한 기회였기 때문에 의지도 대단했고, 준비도 잘 됐습니다. 돌아올 때는 갈 때와는 다르게 환영을 받았죠.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예선 통과를 기대했던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8강까지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선수들 중 스타플레이어들은 없었습니다. 기성용 선수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컸죠. 하지만 함께 못 가게 되는 등 여러 상황들이 있었음에도 선수들이 합숙에 임하는 태도도 좋았고, 열심히 했습니다. 선수들이 결과로써 그만한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초호화 코칭스태프로 화제를 모았어요. 그 점이 부담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는지요?

당연히 부담이 있었죠. 매스컴에서는 '선수보다 코칭스태프가 화려하다'는 이야기도 나왔으니까요. 우리 코칭스태프가 처음으로 나간 대회였기 때문에 부담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준비도 많이 했습니다.

'젊은 사람들끼리 나가서 잘 할 수 있겠느냐'라는 시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유럽에 있어봤지만, 30대 후반의 감독들이 많습니다. 프로팀에도 있고요. 반문하고 싶은 건 '그렇다면 언제 젊은 지도자를 키우겠느냐'라는 말입니다.

김태영 코치와 함께 어린 선수들을 상대로 완전히 망가지면서 분위기메이커 역할도 제대로 했다고 들었습니다.(웃음)

코칭스태프가 스타플레이어 출신이었기 때문에 다르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달랐습니다. 지도자로서의 첫 출발이었기 때문에, 선수도 우리도 함께 출발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 선수들에게 가장 큰 무기는 경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선수들의 나이 대에 처한 상황들을 떠올리며 선수들에게 조언을 했습니다.

이제 런던 올림픽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각오와 목표가 생기셨을 것 같은데요.

20세 선수들이 이번 대회를 통해 한 단계 올라섰다고 봅니다. 저도 선수 때 큰 대회를 겪고 나면 한 단계 올라섰다는 걸 느꼈거든요. 하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도 많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을 더 발견하고 보충해 나간다면 올림픽에서도 지금까지 내지 못했던 좋은 성적을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예전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죠. 아무래도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팀을 통해 서정원 코치님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됐는데요. 처음 모였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당시 팀은 U-16 대표팀 때부터 쭉 함께 발을 맞춰 온 팀이었습니다. 때문에 팀의 조합은 좋은 편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조직력도 좋았고요. 하지만 아쉬웠던 점은 예선전에서 3무로 떨어졌다는 점입니다.

당시 올림픽대표팀은 역대 최고의 전력이라고 평가받고 있어요. 직접 뛴 입장에서도 동의하시나요?

세월이 흘러서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 당시 언론에서도 그렇고, 전문가 분들 모두 최강의 팀이라는 평가를 내렸거든요. 경기력도 좋았고요.

서 코치님이 평생의 은사로 꼽는 분 중에 하나가 당시 올림픽대표팀을 맡았던 크라머 감독님이신데요. 어떤 부분에서 영향을 많이 받으셨나요?

정말 저는 큰 영향을 받았어요.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선수들이 그랬을 겁니다. 크라머 감독님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신 후 과학적인 부분이 많이 도입됐다고 생각됩니다. 비타민, 마그네슘도 그때 저희가 처음 먹기 시작했거든요. 그 이후로 우리나라 프로팀에도 퍼지고요. 한국 축구의 전환점이었던 것 같네요. 당시 1991년이었는데, 당시부터 심리적인 부분도 관리를 잘 해주셨습니다. 심리학 박사 학위까지 가지고 계셨으니까요.

올림픽을 앞두고 크라머 감독님이 일선에서 물러나시게 됐었죠. 선수들 입장에서는 당황스런 상황이기도 했을 것 같네요.

그게 가장 마음이 아팠었어요. 선수들 전체적으로 가슴 아팠던 기억입니다.

결국 올림픽에서 3무로 탈락하고 맙니다. 서 코치님은 마지막 스웨덴 전에서 선제골을 넣기도 했었죠. 아쉬움이 컸을 것 같은데요. 네티즌 분도 '스웨덴 전에선 김귀화 선수의 절묘한 패스를 받아 선취골을 넣고 그대로 끝났으면 8강 진출인데, 동점골을 허용해서 좌절 되었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알고 싶어요'라고 묻네요. (아싸가오리님)

그때는 정말 이길 수 있었어요. 탈락하며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팀은 준비를 많이 했고, 출국 전에도 정말 좋은 경기를 했습니다. 나이 어린 팀이지만 프로팀과 비기는 등 좋은 경기력을 펼쳤거든요. (올림픽 결과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좀 컸죠.

사실 이 이야기는 많이 언급된 것이기는 한데요. 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끝나고 FC 바르셀로나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었다고 하던데, 그 비화를 자세히 공개해 주실 수 없나요? (이당윤님)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스웨덴전(3차전)이 끝나고 나서의 일인데, 경기 후 라커룸에 들어갔을 때 사진 기자 분들이 플래시를 막 터뜨리더라고요. 무슨 일인가 했는데, 당시 통역을 맡았던 유학생이 저보다 더 흥분하면서 말을 해주더군요. 바르셀로나의 스카우트를 담당하시는 분이 직접 나와서 저를 영입하겠다는 제안을 주셨다고.(웃음) 대회 후에는 우리 코칭스태프가 구단 측의 식사 초대를 받아 식사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제가 안양LG(現 FC서울)에 들어가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또 군대 문제 등 여러 가지 걸림돌이 있어 입단을 하지 못했죠.

축구 인생에 있어 경험적 전환점은 언제였나요?

1989년 대표팀에 처음 선발 됐거든요. 1990년도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에 예비 엔트리에 포함되어 제가 처음으로 세계 축구에 눈을 떴습니다. '축구가 이런 거구나'라는 걸 느꼈죠. 당시가 제 축구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었던 것 같네요.

월드컵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1994 월드컵 1차전이었던 스페인전은 잊지 못할 경기였습니다. 당시 후반 14분에 김주성 선수를 대신해 교체 투입되었는데요. 0-2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의 투입이라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것 같습니다.

굉장히 좋았어요. 우리 팀이 지고 있었지만, 저로서는 제 스스로가 컨디션이 좋다는 걸 느꼈습니다. 나가기만 하면 사고 칠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웃음) 경기가 열렸던 댈러스가 굉장히 더웠지만, 그래도 좋은 결과가 나왔죠.

후반 막판으로 가면서도 만회골이 터지지 않았어요. 뛰는 입장에서 초조함을 많이 느꼈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그런 게 있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제가 너무 욕심을 많이 부렸어요. 자신있다 보니까.(웃음) 슈팅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많이 시도했던 기억도 나네요.

홍명보 선수의 만회골에 이어 후반 45분에 서정원 코치님의 동점골이 터졌습니다. 골을 넣었을 때의 상황이 아직도 생생하실 것 같은데요. 많은 네티즌들이 관련 질문을 했네요. 그 때 홍명보 감독님으로부터 패스가 들어왔을 때 골이 되리라고 예상을 하셨는가요? (신경섭님 코리아님 in time님 only화백님 2004-2004님 터프가이팩님)

첫 터치를 했을 때 감이 왔어요. 선수라면 그런 감이 있거든요. 골문 앞에서의 득점 가능성에 대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골이 될 거란 느낌이 있으니 자신감도 있었고요. 때문에 그 상황에서도 자신감이 넘치다 보니 골키퍼와 머리싸움도 했어요. 보통 먼 쪽 골문을 향하는데, 가까운 쪽 골문을 향해 넣었거든요. 침착히 성공시켰던 것 같습니다.

당시 서 코치님이 골을 넣고 포효하는 영상과 사진은 아직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그 장면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웃음)

'이상하게 왜 저런 세리머니를 했을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웃음) 요즘에는 선수들이 골 세리머니를 생각하고 나가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 저는 나도 모르게 본능에 의한 제스처를 했던 것 같아요.

볼리비아와의 2차전에서는 주전으로 도약했습니다. 그런데 풀타임을 뛰지는 못하고, 후반 19분에 하석주 선수와 교체되었어요. 역시 폭염으로 인한 체력적인 문제였나요?

당시 근육이 약간 이상했어요. 후반에 너무 아파서 제가 교체해 달라고 했어요. 너무 아쉬웠죠.

저번 인터뷰 대상자였던 김주성 부장님도 볼리비아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었죠. 서 코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저희가 승부수를 띄운 경기였어요. 모든 걸 쏟아 부은 경기였고 기회도 많았기 때문에 무승부 결과가 너무 아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전도 스페인전과 비슷한 부분이 있네요. 전반에 0-3으로 끌려갔고, 후반에 서 코치님이 투입되었고, 2-3으로 따라붙었습니다. 팀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투입된 선수였던 건가요?(웃음)

당시 상당히 더웠어요. 때문에 당시 김호 감독님이 후반전에 승부를 띄우는 작전을 내세웠습니다. 작전에 의한 투입이었습니다.

미국 월드컵을 경험하고 가장 많이 느끼고 배웠던 부분은 무엇이었는지요?

기술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자신감을 많이 얻었던 것 같아요. 스페인이나 독일 같은 세계적인 팀과 맞붙었던 상황에서도 '해볼 만하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미국 월드컵이 끝난 뒤에는 해외 구단에서의 스카우트 제의는 없었나요?

있었죠.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라면 누구나 다 이적에 대한 사연이 많죠. 당시 저는 군인이었습니다.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쉬웠던 부분이죠.

1997년에 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을 앞두고 포르투갈 명문 벤피카에 진출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당시 이야기를 해주세요. (Warmer님)

1997년 당시 벤피카에 가서 동계훈련도 같이 하고, 배번도 받았습니다. 팀의 단체 사진도 촬영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죠. 당시 팀이 2부 리그로 떨어질 위기였던 상황인데다 반 시즌만이 남아있어서 저에게 '월드컵 예선에 참가하지 말라'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팀으로서는 중요한 시기였거든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또 그렇지 않잖아요.(웃음) 정말 너무 가슴 아팠어요. 집에 당시 받은 유니폼도 그대로 있어요. 하하. 당시 함께 했던 유세비오가 저를 기억한다고 하더라고요. 많은 기억들이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크라머(전 올림픽 대표팀 감독) 감독님이 저를 굉장히 좋아해주셨어요. 91년에 동계 훈련을 독일에서 했는데, 한 달의 훈련이 다 끝나는 날 독일에서 뛸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셨어요. 당시 독일 분데스리가는 차범근 (수원 감독) 선배님도 계시고, 중계도 많이 했기 때문에 꼭 뛰고 싶었죠. 당시 크라머 감독님이 '연습 경기 때 구단 관계자들을 불렀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4팀에서 제의가 들어왔는데, 항상 군대 문제가 걸렸죠. 우리나라 선수들 모두의 문제였죠.(웃음) 의무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국 축구가 많은 발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치게 됐다고 생각되네요.

우여곡절 끝에 1997년에 결국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이적했습니다.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시즌은 서 코치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앞서 말했다시피 1994년 월드컵을 통해 자신감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또 한 번 도전을 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앞서 여러 번 해외진출이 좌절된 기억이 있어 마음이 아팠었죠.

처음 프랑스에 갔을 때 제가 가려했던 팀은 스트라스부르가 아니었어요. 릴 구단으로 가기로 했는데, 막상 알고 보니 릴은 2부 리그 팀이었습니다. 그래서 릴 구단 매니저의 소개를 받아 테스트도 없이 1부 리그의 스트라스부르로 이적했습니다. 릴 구단과 만난 바로 다음날 계약했죠.

잘 모르는 아시아 선수였음에도 현지 팬들의 호응이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였고, 그렇게 팬들이 좋아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세요?

당시 저는 (해외 진출에 대한) 한이 맺혀있던 때였어요. 하지만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첫 경기였던 리옹전에서 첫 골을 넣은데다 다음 경기인 옥세르전에서도 또 골을 넣었어요. 당시 프랑스리그에는 유명한 선수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데도 시작하자마자 잘해서 팬들이 많이 좋아해줬습니다. 경기장에 가면 태극기도 있고, '쎄오(Seo)'라고 외치면서 응원도 많이 해줬고요.

이와 관련해서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씁쓸한 농담을 하셨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역시 프랑스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주영 선수에 대한 관심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지금 박주영 선수의 경기력은 굉장히 좋습니다. FC 서울에 있을 때보다도 더 좋아진 것 같아요. 박주영 선수가 한국에 있을 때도 경기를 보면, 정말 프랑스 가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거든요. 지금 너무나 잘하고 있고, 적응도 잘하고 있어 아주 보기 좋습니다.

네티즌의 관련 질문입니다. 첫 시즌 '세오' 열풍을 일으켰지만, 감독이 바뀐 뒤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 전의 활약을 보고 다른 팀이나 다른 리그에서도 제의가 들어왔을 것 같은데요. 너무 어렵게 유럽에 진출한 것에 비해 너무 빨리 돌아온 것이 아닌가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라고 묻는군요. (ksi79님 SHYGUY님)

당시 경기를 굉장히 잘했어요. 경기 내용도 좋았고요. 제가 반 시즌을 뛰면서 중위권으로 올라왔는데, 시즌이 끝날 시점에서는 시내 광고판에 제 얼굴도 많았고, 구단 홍보에 제 사진이 참 많이 이용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시즌 후 감독이 바뀌었습니다. 새 감독님이 오면서 선수를 많이 데려왔습니다. 새로운 선수들이 많이 오면서 선수 구성이 많이 바뀌었어요. 그 와중에도 저와 프랑스 대표팀에서 뛰던 한 선수는 계속 경기에 뛰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를 벤치에 앉혀놓으시더라고요. 저는 너무 이해가 안됐습니다. 제가 경기를 몇 번이고 돌려봐도 (벤치에 앉아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도 저는 좀 더 뛰었어요. 사실상 그건 감독이 경기에 내보낸 게 아니라 팬들이 경기에 내보낸 거였어요. 제가 벤치에 있을 때 2~3만 관중들이 내 이름을 계속 불러 줘 경기장에 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웃음)

98 프랑스 월드컵은 서 코치님이 뛰고 있는 그 무대에서 열리는 만큼 주위의 기대도 컸습니다. 본인 스스로는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플레이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스러우셨나요?

저는 정말 만족 못했어요. 스스로가 매우 안타까웠던 점이, 프랑스에 가기 며칠 전 수두에 걸렸어요. 출국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집에 갔을 때 아이가 수두에 걸려있던 거예요. 아이를 보고 왔는데, 저도 걸린 거예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시점에 운동도 못했고, 비행기도 저 혼자 타고, 방도 혼자 쓰는 등 여러 불편을 겪었고요. 컨디션이 제일 좋아야 할 때 운동을 못했죠. 월드컵에 가서도 경기마다 모두 뛰었죠. 아쉬워요. 그 때 컨디션이 좋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았는데...

그만큼 초조함도 컸을 것 같습니다.

초조할 수밖에 없었던 게, 프랑스리그에 뛰었기 때문에 연습할 때도 (관중들이) 제 이름을 많이 불렀어요. 여기에 프랑스 신문에서는 멕시코의 캄포스와 나를 비교해서 기사를 내니까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었죠.

 

프랑스 월드컵 당시 많은 언론들이 서 코치님을 향해 '한국의 오베르마스'라 칭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네덜란드전에서 오베르마스를 만나 경기를 해 본 기분은 어떠셨나요? (別님)

당시 네덜란드 선수들은 모두 세계적 스타플레이어였죠. 베르캄프 등 워낙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선수들이 미리 주눅 들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점수차가 크다 보니 화가 많이 났죠.

 

네덜란드전은 잊지 못할 경기일 것 같습니다. 피치에서 직접 뛴 입장에서는 그 참담함이 남다르셨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월드컵이라는 가장 큰 대회에서 감독님이 중간에 그만두시기까지 했으니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떨어졌죠. 그래서 선수들이 더욱 똘똘 뭉쳤죠. 남다른 정신 무장으로 벨기에 전에서는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 > 2편에 계속...

인터뷰= 김형준.이상헌 / 영상= 정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