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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人터뷰3 -김주성下] 90년대 아시아를 호령했던 야생마2

정민건TV 2009. 10. 7. 06:22

 

[ⓜ 월드컵 人터뷰3 -김주성下] 90년대 아시아를 호령했던 야생마2

 

대한축구협회(KFA) 홈페이지에서는 Daum과 공동 기획한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는 내년 6월까지 격주로 게재합니다.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과 대표팀 경기의 홍보를 위해 국내 최대 인터넷포털 운영사이자 KFA 공식후원사인 Daum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하는 홍보 프로그램으로서 한국축구의 국민적 붐 조성을 꾀하고자 하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월드컵과 관련된 인물들이며, 현 대표팀 선수들을 비롯해 추억의 스타, KFA 행정인, 역대 월드컵대표팀 감독 등이 릴레이 인터뷰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특히 KFA 및 Daum 홈페이지를 통해 축구팬들의 질문들도 수렴해 궁금한 점들을 해소시켜드립니다. 인터뷰는 KFA 홈페이지와 Daum 홈페이지에 기사와 동영상으로 게재됩니다.

김주성(43) KFA 국제부장의 인터뷰 두번째입니다.

 

 

- 결국 92년에는 독일의 보쿰으로 진출했습니다. 보쿰으로 가시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많은 부분들이 아쉽죠. 유럽의 빅 리그에서 스카우트를 하려는 선수들은 대부분 젊은 선수들입니다. 젊은 선수들의 잠재력을 발견해 상품 가치가 높은 선수로 만드는 것이 주 포인트예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젊은 시절에 유럽에 진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죠. 병역 문제를 해결하면 26~27세가 되어야만 나갈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점에 유럽에 나간다는 것은 매우 좁은 문이었어요.

제 경우에도 86년과 88년, 90년 무렵에 계속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병역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86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서 병역 면제를 받긴 했는데, 당시에는 병역면제혜택을 받았을 경우 해당 분야에서 5년간 종사해야 한다는 법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5년간 국내에서 축구를 해야만 했죠.

사실 1991년에 독일 분데스리가의 뒤스부르크에서 제의가 와서 3개월간 테스트를 받고 계약을 체결했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준비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5년 기간을 채우지 못했다고 해서 결국 계약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죠. 결국 5년을 채우고, 4주 군사교육까지 받은 뒤에 1992년 중반에 보쿰으로 가게 됐습니다. 그 때가 28세였으니까 저로서는 선수로서 크게 성장하겠다는 욕심보다는 꿈꿔왔던 국제무대, 빅 리그에 가서 직접 경험을 해봐야겠다는 의욕이 강했어요.

 

- 독일이라는 나라는 차범근 감독님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있는 나라입니다. 후발주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작용했는지요?

차범근 선배님이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했던 것이 어떤 작용을 했느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차 선배님은 당신의 플레이로 평가를 받으신 것이고, 저에 대한 평가는 제가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어느 누가 대신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좋은 점이라고 하면 차 선배님이 한국인으로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셨기 때문에 제가 독일에 진출했을 때 독일인들이 생각하는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 자체는 좋게 비춰졌다는 것이에요.

 

- 보쿰에서의 2년은 부장님의 축구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요?

보쿰에서의 2년은 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해준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선수로서의 독일 생활 2년, 인생 전체를 봤을 때의 독일생활 2년으로 나눌 수 있지만, 종합적으로 봤을 때 독일 2년은 저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했던 기간이었어요.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려면 스스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그 동안 '국가대표 김주성'으로서 누렸던 부분들, 본의 아니게 자만심에 빠졌던 부분들, 안주했던 부분들을 모두 버릴 수 있게 만들어준 시기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다 버리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었고, 초심으로 돌아가 선수로서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어요. 대표팀으로 월드컵에 나가 경험했던 것들보다도 오히려 제 인생의 경험으로서 가장 중요했던 시기는 독일에서의 2년이었습니다.

 

- 94 미국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정말 극적인 드라마였습니다. 부장님의 경우에는 월드컵예선을 뛰기 위해 유럽에서 넘어온 첫 번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는데요. 유럽파로서 월드컵 예선에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듣고 보니 유럽에서 뛰다가 예선을 위해 대표팀에 합류한 첫 케이스인 것 같군요.(웃음)
지금은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이 많고, 여러 경로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KFA에서 제 경기를 보기 위해 독일까지 오지는 않는 시기였어요. A매치 데이에 저를 부른다면 당연히 합류한다는 생각이었죠.

카타르에서 열린 월드컵 최종예선은 여러모로 힘들었어요. 독일에서 계속 뛰었는데, 대표팀에 합류하기 전 마지막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서 근육이 좋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더군다나 추운 곳에서 뛰다가 무더운 곳으로 가서 근육 치료를 병행하면서 뛰다보니 좋지 않은 상태에서 경기에 나갔죠. 최상의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할 수 없었기에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고, 개인적으로도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 이 무렵부터 부장님의 플레이 스타일이 바뀌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예전에는 야생마처럼 시원스럽게 측면 돌파를 많이 시도했다면 이 시기부터는 노련하게 경기를 조율하고 쉽게 쉽게 플레이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포지션도 중앙 미드필더를 봤던 것 같고요.

86 멕시코 월드컵을 비롯해 젊었을 때에는 많이 뛰고, 파괴력과 기동력을 중심으로 한 플레이를 했어요. 젊은 선수로서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한 것이죠. 그러나 94 미국 월드컵을 즈음해서는 30세를 넘긴 시점이었거든요. 제가 갖고 있는 장점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측면보다는 중앙에서 팀을 전체적으로 리드하고, 경기 운영을 할 수 있는 능력들이 더 필요했던 시점이었죠. 제가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고, 그 시점에서는 팀을 조율해주고 경기 운영을 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의 부장님 플레이를 더 좋아합니다.(웃음) 그런데 94 월드컵을 앞두고는 부장님을 뽑지 말자는 의견도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섭섭함은 없으셨는지요?

그런 것은 없었어요. 물론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다면 심적으로 좋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기술적인 부분 외에 정신적으로도 많이 성숙해졌기 때문에 심적으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선택권은 감독이 갖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제 가치에 대한 부분만 증명할 수 있는 것이죠.

 

- 94 미국 월드컵은 부장님께서 3번째로 참가하는 월드컵이었습니다. 어떤 느낌이셨나요?

선수로서 3번의 월드컵을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고, 축복받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86년에 어린 나이에 대표팀이 되자마자 월드컵에 나갔기 때문에 3번씩이나 무대를 밟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해외에 나가 국제 업무를 하면서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86년이나 90년 월드컵은 야망을 갖고 대회에 참가했어요. 세계 무대에 진출하겠다는 야망, 그리고 세계적인 선수가 되겠다는 목표의식을 갖고 나갔죠. 그러나 94 월드컵은 팀을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우리가 16강에 올라갈 수 있게 후배들을 독려해서 팀을 잘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참가했죠. 개인적인 야망이나 욕심보다는 팀과 국가를 위해 내가 최대한 도와야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 방금도 말씀하셨듯이 94 미국 월드컵의 경우 부장님이 팀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 도우미 역할에 충실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후배들을 챙기는 부분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역할 변경에 대해서 아쉬움은 없으셨는지요?

그런 것은 없었어요. 도우미 역할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최고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팀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우선적으로 한다는 것이거든요.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월드컵에 3번 참가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제가 가진 기량이나 능력을 가장 많이 쏟아냈던 대회였던 것 같네요.

특히 94 월드컵은 기후적으로 엄청나게 더웠어요. 댈러스와 보스턴에서 경기를 했는데, 체감온도가 45도를 넘을 정도였거든요. 경기를 마치고 라커룸에서 쓰러지기도 했죠. 선수 생활하면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웃음)

 

- 첫 번째 스페인전부터 대단한 경기였습니다. 2골을 먼저 내줬을 때는 팀 전체가 상당히 가라앉았을 것 같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월드컵 본선에서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부분이 있었어요. 월드컵 본선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것이었죠. 스페인전에서도 먼저 2골을 내주면서 동요가 많았고, 사실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그렇고, 최인영 선배도 그렇고, 중간급이었던 홍명보나 황선홍 등, 팀의 리더격인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2-2 동점까지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중심 선수들이 게임을 포기하거나 심적으로 동요를 많이 일으켰다면 동점까지 갈 수 없었을 겁니다.

 

- 볼리비아와의 2차전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한판이었습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였거든요.

사실상 그 경기 결과에 따라 16강에 올라갈 수 있느냐의 여부가 판가름나는 것이나 다름없었죠. 선수들의 기대도 엄청 높았고, 전력상으로도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러나 경기내용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결국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죠.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선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경기였습니다.

 

- 마침 축구팬 한 분이 관련 질문을 했네요. 볼리비아전 후반전이 끝나갈 무렵, 예술적인 스루패스 한방으로 하석주 선수에게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득점으로 이어지지 못했는데, 당시 심정은 어떠셨는지요? (란마님)

기회가 왔을 때 득점으로 이어가야만 승점을 챙길 수 있죠. 좋은 기회에서 득점을 하지 못하면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축구는 11명이 하는 것이고, 모든 선수들이 하나의 팀입니다. 개개인에 대한 평가는 할 수 있어도 한 선수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맞지 않죠. 그 장면 역시 제가 패스 연결을 더 좋게 해줬다면 골을 넣을 수도 있었던 것이에요. 따라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 마지막 독일전에서는 전반에만 3골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뛰는 입장에서는 암담했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후반 들어 그렇게 대반격을 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선수들을 평가하는 요소들을 꼽는다면 개인 능력, 체력을 비롯한 피지컬 능력, 창의력과 전술적 이해도 등이 있죠. 그 중에서 한국 선수들의 특성으로 많이 꼽는 것이 체력적인 부분이에요. 세계 언론이나 관계자들이 모두 그 이야기를 하곤 했죠.

한국 선수들은 다른 나라 선수들보다 혼신의 힘을 쏟을 수 있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점이 장점이 있는데, 94 월드컵 독일전이 열렸던 댈러스의 체감 온도는 거의 50도에 육박했어요. 아마 지금 다시 뛰라고 하면 10분도 못 뛸 거예요.(웃음)

그러나 당시에는 90분간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을 갖고 있었고, 그런 지칠 줄 모르는 체력 때문에 강호 독일과 끝까지 익사이팅한 경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세계 언론에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5~10분 정도만 더 경기를 했다면 우리가 이기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3차례 월드컵을 나가면서 94월드컵이 우리가 갖고 있는 기량이나 잠재력을 최대한 많이 펼쳐보였던 대회였고, 특히 독일전은 패했음에도 승자보다 더 많은 찬사와 박수를 받았던 경기였죠. 개인적으로는 독일전이 끝나고 나서 라커룸에서 10분 정도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던 기억도 나네요.(웃음)

 

- 독일전에서는 마테우스와 자주 부딪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격전 중에 틈마다 말을 주고받으며 신경전을 벌이셨는데, 그 때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요? (장금폐인님)

마테우스보다도 에펜베르그와 더 많이 신경전을 벌였던 것 같네요. 당시 제가 독일에서 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선수들을 많이 경험했었어요. 개개인의 능력 뿐 아니라 성격적인 부분도 많이 알고 있었는데, 에펜베르그나 마테우스 등이 다혈질적인 성격이었죠.

그 선수들의 그런 단점을 더 끌어내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경기 중에 독일어로 많은 신경전을 펼쳤고, 그것이 결국 에펜베르그의 퇴장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얻었어요. 개인적으로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경기 중에 상대의 기술적, 심리적 부분을 파악해서 공략하는 것이 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경기였습니다.

 

- 이 대회를 통해 홍명보, 황선홍, 서정원 등이 한국축구의 간판 스타로 등장했습니다. 대선배의 입장에서 무서운 후배들의 등장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셨습니까?

저는 긍정적으로 봤어요. 새로운 선수들이 발굴되지 않으면 미래는 없는 겁니다. 많은 팬들이 젊은 선수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도 그것이에요. 결국 그 선수들이 미래의 주역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86년과 90년 월드컵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노하우들이 새로운 스타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후 98년과 2002년, 2006년 월드컵을 통해 새로운 선수들이 나타났어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만약 월드컵을 통해 새로운 스타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슬픈 일이죠.

 

- 미국 월드컵이 끝난 뒤 국내로 복귀하셨습니다. 좀 더 독일에서 활약하실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당시의 상황에 대해 궁금합니다.

프로에 입단한 이래 부산대우에서 계속 선수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구단의 배려 속에 유럽 진출을 하게 됐죠. 제가 유럽에 있는 동안 부산은 과도기를 겪었고, 명문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들을 겪었어요. 굉장히 좋지 않았던 시기였죠.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단장님과 감독님이 부임하셨고, 저에게 팀을 재건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셨습니다. 부산을 재건하겠다는 의지가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죠.

또 한 가지는 그 시점이 제가 32세 정도였을 때인데, 선수로서는 이제 은퇴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개인적으로 현역 은퇴 이후를 위해 계속 독일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한국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인가를 갈등했죠. 최종적으로는 독일 생활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럴 바에는 빨리 단념하고 부산 재건에 일조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입니다.

 

- 복귀 후에는 스위퍼로 포지션을 변경하셨습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은데요.

94년 9월에 처음 복귀하자마자 무릎 연골파열을 당했어요. 결국 그 시즌은 접어야 했죠. 축구를 시작한 지 처음으로 선수 생명의 기로에 섰어요. 은퇴해야 하나, 재기를 해야 하나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해오면서 축구를 그만둔다는 생각을 한 적은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래도 재기는 해야겠다는 의욕이 저를 지배했고, 본격적으로 재활 트레이닝을 시작했죠. 하루에 6~8시간씩 재활을 하면서 12월부터는 팀에 복귀해서 동계훈련도 준비했습니다. 그 때 감독님과 팀에서 스위퍼로의 포지션 변경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죠.

독일에 가기 전이라면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 때는 개인적인 부분에 대한 욕심이나 미련은 없었어요. 부산에 온 계기도 내 팀이라는 생각 때문에 온 것이었고요. 팀이 어려울 때 앞장서야겠다는 마음으로 복귀했기 때문에 포지션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니었고요. 팀이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제가 고심했던 것은 현 시점의 내가 과연 스위퍼라는 포지션에 적합하느냐의 여부였어요. 그 동안 공격수나 미드필더로 활약했었는데, 수비수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을지 고심했죠.

 

- 방금 말씀하셨지만, 공격수일 때와 수비수일 때 경기에 임하는 생각에 차이가 있는지요? 또 공격수를 하다 수비수로 전향했을 때 수비수만 전문적으로 했던 선수와 비교했을 때의 장단점은 무엇일까요? (다미닉님, 봉-- 잡으세요님)

포지션에 따라 해야 하는 임무 자체가 명확히 다릅니다. 또한 포지션에 따른 선수의 능력도 명확히 갈라지죠. 공격수는 일단 파괴력이나 모험적인 부분이 없으면 공격수로서의 자질이 없습니다. 반대로 수비수는 모험을 즐겨서는 안 되고, 판단에 대해서도 너무 빨리 결정해서는 안 되죠.

이러한 포지션 특성의 변화에 대해 얼마나 빨리 적응력을 키우고 완성도를 높이느냐가 과제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가 공격수나 미드필더로 뛸 때에도 수비력이 좋은 편이었다는 것이 수비수로 역할이 바뀌었을 때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요소였어요.

옛날에는 공격수들은 공격에만 집중하는 선수들을 필요로 했지만, 제 자신을 평가할 때는 공격수임에도 수비력에 대한 부분이 다른 공격수보다 강했거든요. 공격하면서 수비지역까지 내려와 수비를 커버하는 등의 모습이 장점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수비력에 대해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포지션 변경에도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 앞서 말씀하셨듯이 부장님이 독일에 뛰었던 92~94 시즌 동안 부산의 성적은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부장님이 부산에 복귀해서 가장 먼저 당면했던 문제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했고 팀을 최강의 자리로 이끌었는지 궁금합니다. (박지훈님)

성적이 좋지 않다보면 자연스럽게 팀 분위기도 좋지 않아요. 서로 신뢰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선수와 선수, 선수와 코칭스태프, 코칭스태프와 구단 프런트, 팀과 팬의 신뢰감이 깨져있었죠. 서로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있지 않으면 강한 팀을 만들 수 없습니다.

과거에 제가 뛸 때의 부산은 이러지 않았는데, 2년 정도 성적이 좋지 않다 보니까 분위기가 달라졌고, 예전 내가 뛸 당시의 팀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어요. 따라서 무엇보다 서로 믿는 팀이 될 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선수로 뛰었지만, 더불어 코치와 같은 역할도 했었어요. 맏형이 될 수도 있었고, 어린 선수들에게는 삼촌일 수도 있었고, 코칭스태프와는 형-동생의 관계일 수도 있었기 땜에 중간자 역할에 힘을 쏟았죠.

 

- 실제로 당시 부산에서 뛰었던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장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들 합니다.

후배들에게 기본적인 부분을 많이 강조했어요. 선수들간의 경쟁력이 없으면 죽은 팀과 마찬가지입니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선수가 평소에도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하고, 훈련장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줘야만 기회를 준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중요시 생각했죠.

저 자신도 훈련장에서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경기에 나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후배들에게도 이런 기본적인 원칙을 많이 주입시켰습니다. 외국인 선수였던 샤샤나 마니치 등의 선수들에게도 똑같은 원칙을 요구했어요. 팀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젊은 선수들과 외국인 선수들을 독려했죠. 이런 부분들로 인해 점차적으로 선수들의 분위기가 좋은 쪽으로 발전했던 것 같아요. 팀 전체가 이렇게 올라가다보니 코칭스태프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많아졌죠.

 

- 결국 1997년에는 수비수로서 팀을 3관왕으로 이끌고, K-리그 MVP도 받으셨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은데요.

97 시즌에 3관왕을 달성했을 때 선수로서 느꼈던 영광과 희열은 대단했어요. 예전에 아시아 최우수선수 3회, 입단 초기였던 1987년 K-리그 우승 등도 소중하지만, 97년에 느꼈던 우승의 감격이 가장 컸죠. 이 때는 '나의 팀 부산'이 우승했다는 감정이 컸기 때문에 너무 행복했고,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과거에는 내 감정, 내 영광에 만족했다면 97년에는 동료들에 대한, 팀에 대한, 팬들에 대한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감동을 받았어요. 당시 같이 뛰었던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 프런트, 팬들에게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꾸준한 활약을 바탕으로 96 아시안컵에 수비수로서 대표팀에 뽑히셨습니다. 색다른 느낌이셨을 것 같네요.

사실 그 당시는 대표팀에 대한 욕심은 버린 상태였어요. 꿈을 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현 위치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였죠. 부산의 일원으로 강한 팀을 만들어야겠다는 임무가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때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대표팀에 발탁되었을 때에도 크게 기쁘거나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발탁이 된다면 국가대표 선수로서의 책임감과 의무감이 생기긴 했습니다. 소속팀과는 또 다른, 마지막 봉사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 당시 특이했던 것은 홍명보 선수가 미드필더로 올라가고, 부장님이 리베로를 보는 형태였습니다. 또 경기에 따라서는 부장님이 미드필더로 올라가고, 홍 선수가 리베로로 내려오기도 했고요. 역할의 잦은 변화에 혼란이 오지는 않았나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감독님이 결정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특정 포지션을 고집하지는 않았어요. 제가 예전에는 미드필더를 보다가 수비수로 전환했기 때문에 감독님이 상대팀에 따라 변화를 준 것이고, 그 부분에 대한 혼선은 없었습니다. 기존에 해봤던 포지션이기 때문이었죠.

- 이 대회에서는 8강전 이란전 대패가 가장 뚜렷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이 경기에서는 부장님이 미드필더로 배치되고, 홍명보 선수가 리베로를 봤습니다. 그리고 전반에 좋은 경기력으로 이란을 압도했습니다. 후반에 갑자기 무너진 원인은 무엇인지요?

선수들의 융화에 대한 문제가 있었죠. 팀이라는 것은 조직력이 얼마나 갖춰졌느냐가 승패의 관건으로 작용합니다. 당시 박종환 감독님이셨는데, 사실 팀 조직력이 다른 대회를 준비할 때보다는 조금 떨어진 면이 있었어요. 또 선수들 자체도 국가관이 조금 부족했고, 동료들간에 서로 신뢰하는 부분들이 부족했죠. 이런 것들로 인해 복합적으로 팀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기에 임하다보니 대량 실점까지 이어진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기고 있을 때는 이런 문제들이 나타나지 않죠. 문제점은 팀이 좋지 않을 때 표면으로 나오는 것이니까요. 후반전에 대량실점을 했던 것도 결국 선수들이 포기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대량실점 이야기에 앞서 우리 팀 조직력과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앞서 말했지만 97년에 팀 3관왕 달성과 함께 MVP도 받으면서 유례없는 월드컵 4회 출전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표팀은 홍명보 선수를 수비의 축으로 삼으면서 부장님은 제외했는데요. 솔직히 아쉬움도 남을 것 같습니다. (네오블랙스완님)

물론 개인적으로는 월드컵에 나가고 싶었죠. 월드컵에 출전한다는 것은 선택받은 선수라는 겁니다. 축구선수라면 어느 누구도 월드컵에 나가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없죠. 당시 대표팀에 대한 욕심은 접었지만, 그래도 선수로서 월드컵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것이며, 기회라고도 생각했어요.

그러나 선택권은 감독한테 있는 거잖아요. 감독의 입장에서는 팀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팀 전력에 보탬이 되느냐의 여부를 우선적으로 봅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 고심한 뒤에 선택하신 것이겠죠.

 

- 은퇴 무렵에는 공부에 매진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됐어요. 선수로서 느낀 부분도 있지만, 인성적인 부분들이나 정신적인 부분들, 앞으로 내 진로에 대한 준비 등 인간으로서 많은 생각을 하고 성숙해졌죠. 여러 생각을 하면서 부산에 복귀하게 되었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지도자도 좋지만 학문적인 부분이 좀 더 뒷받침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현장에 대한 부분은 지금까지 몸소 체험하고 배웠기 때문에 감이 있는데, 학문적인 부분에서는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까지 하게 된 것도 내가 배우지 못했던 부분들을 채우겠다는 생각에서 한 것입니다.

 

- 그 무렵부터 은퇴 후 진로를 지도자가 아닌 행정가로 생각하셨던 건가요?

그렇죠. 선수 생활 마지막 단계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그 동안 너무 학문적으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부족한 것을 많이 느꼈어요. 이제 선수 생활을 접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는데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 행정가의 길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디아트님, Teddy Kwon님)

많은 사람들이 그 질문을 해요. 왜 현장으로 가지 않고 행정가로 가느냐라고 말이죠. 현장이나 행정이나 영역만 조금 다를 뿐이지 축구를 위한 부분은 똑같아요. 현장에서 기술적인 부분에 보탬이 될 수도 있지만, 행정적으로 지원해서 축구를 발전시킬 수도 있는 것이거든요.

반대로 '왜 축구 선수들은 은퇴하면 반드시 지도자로 가야 하느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느냐?'라고 묻고 싶어요. 축구에 얼마나 많은 영역이 있는데, 굳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지도자로만 가야하느냐라고 말이죠. 앞으로 축구 시장은 더욱 광범위하고 넓어지고, 다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문이 열려있어요. 우리가 거기에 대해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정관념이 생긴 거죠. 그것을 깨야합니다. 축구인도 여러 영역에서 일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 현재 국제부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신지요? (에이스월드와이드님)

이단 국제 업무 자체가 너무 광범위합니다. 일단 KFA의 상급기관인 AFC(아시아축구연맹), FIFA(국제축구연맹) 관련 업무를 해요. 국내 사업이 아닌 외적인 부분은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는 셈이죠. 각 대회의 정관과 규정 등도 파악하고, 해외전지훈련과 평가전 상대 섭외도 담당하고, 각종 국제회의와 세미나 등에도 참가합니다.

 

- 축구행정가로서의 계획과 목표는 어떻게 설정해놓으셨는지요?

2002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축구에 대한 위상이 많이 높아졌고, 거기에 더불어 행정력도 많이 향상되어야 한다는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많은 것이 이뤄지지만, 외적인 부분에서 행정력도 갖춰야한다고 생각해요. 행정력의 첫 번째는 대인관계입니다. 세계 각국의 고위 인사들, 축구전문가들, FIFA나 AFC, 각 대륙연맹 등의 실무자들과의 유대관계를 원만히 만들어서 한국축구가 발전하는데 있어 일조하고 싶습니다.

 

-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축구팬들의 질문을 받아보겠습니다. 김주성 부장님이 생각하는 내 인생 최고의 골이 가장 궁금합니다. 축구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순간은 언제인가요? (riroro님, 스쿼드님, 이당윤님)

처음으로 88대표팀에 선발되어 멕시코월드컵대표팀과 부산에서 평가전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때 2-1로 이긴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결승골을 넣었습니다. 그 때의 득점 장면이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골이에요. 그 골은 가장 희열을 많이 느끼고 기뻤던 골이었어요.

최고의 순간이라...성취에서 얻는 기쁨 등은 순간순간 느끼지만, 제 마음 속에 어디 꺼내놔도 떳떳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1999년 수원과의 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입니다. 당시 수원 원정 경기였는데, 수원 샤샤의 핸드볼 골로 인해 우리가 패했었죠. 저는 그 경기가 가장 영광스럽고 영원히 기억에 남는 경기예요.

패배자도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내 마음 속에 남겼고, 억울한 패배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승복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에 대해서도 기뻤어요. 이 두 가지 측면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최고의 순간으로 꼽게 되는 것 같네요.

- 아직도 '부산대우 로얄즈와 김주성'을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팬입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부산의 사령탑으로 돌아오실 수 있을까요? 꼭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부산으로 돌아오실 생각은 없나요? (daniel님, 앙팡테리블님)

지금 확정적으로 '예스, 노'를 하기는 힘듭니다. 다만 프로무대에 처음 데뷔해서 은퇴할 때까지 항상 같이 했던 팀이었기에 영원히 잊을 수 없죠. 제가 여기서 일하든, 언제 어디에 있든 간에 제 마음 속에는 '나의 고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항상 성원하고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 김주성 부장님이 뛸 시절에는 부산대우의 인기가 야구에 뒤지지 않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관중이나 성적 등에서 많이 실망스럽습니다. 명실상부한 부산축구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아이콘으로서 현재 부산축구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문어구이님)

지역 특성상 부산은 다혈질적인 도시입니다. 일단 부산팬들은 성적이 좋으면 언제라도 관심이 증폭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어요. 여러 부분이 작용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 마음이 아프죠. 최고의 인기구단이 지금은 운동장 가도 그렇고 아쉬움이 많으니까요. 그런 부분들은 어느 한 사람이 이뤄내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 프런트, 팬들 모두가 같이 공동으로 힘을 합쳐야만 옛날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관심 있는 분들이 경기장에 많이 와줬으면 좋겠고, 특히 선수들이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90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서 중국과의 경기 중에 다이빙 헤딩슛을 넣고 포효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저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그 당시 기분은 어떠셨고, 골 세러머니로 왜 그렇게 뛰어다니셨는지 궁금해요. (Dino님)

요즘에는 선수들이 자기 표현을 많이 하기 때문에 고유의 골 세러머니를 준비하는 선수들도 많지만, 당시만 해도 골 세러머니 자체를 많이 볼 수는 없었어요. 자연스럽지도 않았고요.

당시 중국전은 매우 중요한 경기였고, 골을 넣은 이후에는 저도 모르게 그런 세러머니가 나왔습니다. 그 때는 머리를 많이 길러서 '야생마'나 '삼손'으로 불리웠는데, 그 세러머니가 장발과 잘 어울렸어요. 그래서 대외적으로 그 사진이나 영상이 많이 노출됐죠. 일부러 한 것은 아니고 그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나온 겁니다.(웃음)

 

- 월드컵 3회 출전, AFC 올해의 선수 3회 수상 등 화려한 명성을 지녔던 김주성 부장님이 봤을 때 '아~전성기 시절 나를 보는 듯 하다'라고 느껴지는 선수가 있나요? (이군옹님)

저와 비슷하다고 이야기하면 그 선수가 기분 나쁠 수도 있어서 조금 그렇네요.(웃음) 그런 선수가 여럿 있지만 함부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야기를 꺼내면 그 선수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서 말이죠.(웃음)

어쨌든 선수들 개성들이 전부 다르고, 훌륭한 선수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기존 선수들은 워낙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관심 갖는 것은 ??은 선수들입니다. 청소년대표팀의 잠재력 있는 선수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조기에 우수 선수들을 발굴하는 것이 협회의 임무이자 지도자들의 임무죠. 그런 부분 때문에 청소년대표 연령대의 고교생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가능하다면 현장에 나가서 그런 선수들에 대한 부분들도 지켜볼 생각이에요.

 

- 1998년 수원과의 경기에서 데니스와 신경전 끝에 결국 데니스 선수가 쓰러져 있는 김주성 부장님의 목을 밟고 퇴장 당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제가 수원과 데니스 선수의 팬으로 김 부장님을 욕하고 그랬지만, 지금 생각하니 데니스 선수가 경기 내내 심리전에서 당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웃음) 그 때 구덕운동장에서 부산팬들 사이에서 간신히 죽다 살아나온 기억이 있고, 데니스 선수는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죠. 그 때 경기 중 상황과 경기 후 데니스 선수와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POQ님, 짐모리슨님)

데니스 선수는 외국인 선수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선수로 꼽을 정도로 좋은 기량을 갖고 있는 선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한국에 와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죠. 개인적으로도 데니스 선수는 좋은 선수라고 생각해요.

단지 그 경기를 설명하자면 부산 입장에서는 데니스 선수가 경계 1호였죠. 저 선수를 어떻게 막느냐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 나는 상황이었어요. 따라서 전략적으로 데니스 선수에 대해 준비했고, 운동장에서 서로 많이 부딪치면서 불미스런 일이 있었죠. 그러나 그것은 경기장 안에서 일어난 하나의 과정이고, 끝난 이후에는 저나 데니스 선수나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경기장 안의 문제는 안에서 끝내야 합니다. 이후 경기장 밖의 몇몇 행사에서 보기도 했지만 동생 같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감정이 없어요.

 

- 김주성 부장님을 모델로 했던 '세이부 축구'라는 게임을 아시나요? 직접 해보시지는 않았나요? (sol님, 문어구이님)

게임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옆에서 보기만 했지 직접 게임을 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보는 것은 재미있더군요.(웃음)

 

- 항상 16번 등번호를 달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6번에 애착이 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일님, 조선호님)

모든 사람들이 '처음, 최초'에 대한 기억이 많잖아요. 시작의 의미이기도 하고요. 16번은 제가 대표팀에 뽑혀서 처음 달았던 번호였어요. 대표팀과의 인연을 처음 맺게 된 번호라서 기억에 남고, 오랜 기간 달게 되었죠.

 

- 한국축구의 발전을 위해 장기적인 부분에서 신경써야할 부분에는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kgb님, 別님, 하늘을걷는자님)

기본적으로 한국은 축구에 대한 인프라와 저변이 많이 확대되었다고 봐요. 이제는 소프트웨어에 대해서 많이 고심해야하죠. 1차적으로 올해 중점 사업은 새로 출범한 초중고리그입니다. 학원축구를 리그제로 전환해서 공부하는 축구 선수를 육성하려는 취지예요. 지속적으로 이런 리그제를 도입해서 과거 축구선수들의 사회 적응력이 떨어지는 부분들을 최소화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중고리그를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거라 생각해요. 같은 맥락으로 어린 선수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유롭게 축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투자해야하고요.

그리고 심판과 지도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한 육성 프로그램에 더 많은 투자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앞으로 KFA에서 더 연구하고 추진해야 하는 사항들이죠.

 

- 장시간의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한국축구를 위해 많은 노력해주시길 바랍니다.


공식질문1. - 축구는 (희망이자 꿈) 이다.
공식질문2. - 월드컵은 (우리들의 축제) 이다.

 

인터뷰= 이상헌 / 영상= 정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