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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人터뷰8 -황선홍下] "팬들의 비판은 공격수로서의 숙명"

정민건TV 2009. 12. 16. 00:14

 

[ⓜ 월드컵 人터뷰7 -황선홍下] "팬들의 비판은 공격수로서의 숙명"

 

대한축구협회와 Daum 스포츠는 공동으로 최고의 월드컵 스타들을 대상으로 2010 남아공월드컵 특집 '월드컵 스타 인터뷰' 를 내년 6월 대회 직전까지 총 20여 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본 코너는 단순한 축구 기자의 일방적인 인터뷰 형식을 벗어나 기자는 물론, 월드컵 스타, 그리고 축구팬 등 '월드컵'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이 인터뷰에 참여하는 개방형 콘텐츠를 지향합니다.

이외에도, '축구란 무엇인가?', '월드컵이란 무엇인가?' 등의 본 코너 공식질문을 통하여 월드컵 스타들의 톡톡 튀는 감각을 엿보실 수 있습니다.

 

- 흔히 '황선홍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운동장에 직접 가서 봐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감독님께서도 동의하시나요?
공감합니다. 그런 측면이 사실 많이 아쉽죠. 저도 TV로 봐서는 K-리그를 봐도 전체적인 것이 안 보여요. 볼 주위의 모습이나 골을 넣을 때의 상황 등은 보이지만, 세밀한 플레이나 수비수를 달고 움직이는 모습 등은 잘 보이지 않죠. 그러나 관중석에서 직접 보면 축구의 모든 부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외국인 선수를 뽑을 때도 영상 자료만 보고 뽑지 않고 직접 뛰는 것을 보는 이유가 그런 것이에요. 볼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의 움직임 등 여러 가지를 봐야하기 때문이죠.

 

2002 한일월드컵 폴란드전에서 골을 넣고 환호하는 황선홍 ⓒKFA

 

- 다시 2002 월드컵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저번 최진철 코치님과의 인터뷰에서 월드컵을 앞두고 체력 프로그램을 하면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황 감독님은 어떠셨어요?(웃음)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었던 것 같아요. 설명을 하자면 볼을 갖고 하는 훈련과 그냥 뛰기만 하는 훈련과는 차이가 있거든요. 그 당시에는 볼을 많이 갖고 하면서 체력을 끌어올렸던 상태였기 때문에 지루함 같은 것은 덜했어요. 그 이전에는 사실 볼 없이 뛰는 훈련이 많았기 때문에 더 힘들다고 느꼈는데, 경기 형식 등을 통해 볼을 갖고 체력훈련을 하면 더 흥미로울 수 있으니까요. 그 때문인지 예전에 비해 훈련량이 굉장히 많다거나, 체력 프로그램을 하기 때문에 혹독하게 훈련을 했다는 생각은 별로 안 했습니다. 오히려 더 편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웃음) 어쨌든 체계적으로 훈련을 했던 것들이 효과를 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2002 월드컵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경기장이 오렌지 빛으로 물든 98년도 네덜란드전과 같은 느낌을 얻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실제로 폴란드전에서 경기장이 빨갛게 물들었을 때는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대단했죠. 처음에 운동장에 1시간 반 전에 도착해서 잔디를 밟아보고 다시 들어오거든요. 그 때까지만 해도 아시아드 주경기장이 다 안 찼었어요. 가운데만 많이 계셨고, 꽉 들어차지는 않았었죠. 워밍업 할 때도 듬성듬성 빈 곳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라커룸에 들어와서 15분에서 20분 정도 준비하고 나서는데, 경기장이 온통 빨갛더군요. 뭐라고 해야 할까? 전율이라고 해야 하나? 소름이 끼칠 정도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애국가가 불러지고, 대형 태극기가 올라갈 때는 진짜 가슴 속에서 돌멩이 같은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죠.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살기 같은 것 느끼게 되었고,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다른 선수들도 같은 기분이었을 거예요.

 

- 폴란드와의 1차전 이후에는 주로 교체멤버로서 경기에 나섰습니다. 아쉬움은 없으셨나요?
아쉬움이야 있었죠. 그렇지만 그건 제 욕심이고, 히딩크 감독님이 체력 테스트를 비롯해 여러 가지를 하셨기 때문에 저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계산하셨겠죠. 저로서는 주어진 시간 안에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아쉬웠던 것은 제 스타일상 조커보다는 선발로 나갔을 때의 플레이나 득점 성공률이 좋다는 것이었어요. 선발로 나가서 시간을 조금 더 가졌으면 낫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하죠. 그러나 결정은 감독님이 하시는 것이니까...

 

- 팬들은 황선홍-안정환 투톱을 기대하는 분들도 있었는데요.
시스템 자체가 3백 스위퍼 시스템에 스리톱이었기 때문에 같이 뛰기는 조금 어려웠을 것 같아요.

 

- 2002 월드컵이 끝나고 홍명보 감독님과 같이 대표팀 은퇴식을 할 때, 후배 선수들이 무등을 태우고 서울 월드컵경기장을 한 바퀴 돌았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기분은 어떠셨나요?
은퇴를 하면 많이 섭섭하고 그럴 텐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목표를 했던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떠나는 게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평생 해왔던 것을 버려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홍 감독이나 저나 마지막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에 행복함을 느꼈었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행운아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 사실 그 어떤 선수보다도 감독님의 현역 시절은 파란만장했습니다. 감독님이 돌이켜볼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 세 가지만 꼽아주신다면.
첫 번째는 88년에 대표팀에 처음 발탁됐을 때입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4강에 들었을 때가 두 번째이고요. 음 세 번째 순간은 없는 것 같네요. 지도자를 하면서 만들어 나가야겠네요.(웃음)

- 가끔 이런 생각은 안 하셨나요? '내가 한국 대표팀의 공격수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욕을 많이 먹지는 않을텐데'라는 생각 말이예요.
사실 가끔 그럴 때도 있었어요. 선수 생활 하면서 한창 욕 많이 먹었을 때는 '나도 수비하면 욕 안 먹고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도 많이 했죠.(웃음) 그런데 그건 스트라이커가 가져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에요. 그만큼 스트라이커는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스포트라이트도 더 많이 받잖아요. 힘든 부분도 있지만, 그런 메리트가 있기 때문에 매력이 있는 거죠.

 

- 돌이켜보면 세계와 맞서는 '상대적 약체'인 한국 대표팀의 간판 공격수로서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으셨던 것 같아요. 단순히 공격수로서의 역할 이상을 수행했어야 하니까요. 동료들의 도움을 더 많이 받으면서 좀 더 편하게 축구를 했으면 더 잘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실 때는 없으셨나요?
물론 핑계일 수도 있지만, 잉글랜드에서 유학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많이 봤어요. 그 때 판 니스텔로이가 있었는데, 어떤 경기에서 볼 터치가 11번 정도밖에 없었죠. 그런데 3골을 넣더군요. 슈팅을 5개 해서 3골을 넣었고, 나머지 6번은 리턴 패스 아니면 횡 패스였어요. 그리고 후반 30분 쯤에 교체되어 나가더군요. 참 축구를 쉽게 하더라고요.(웃음) 어떻게 들으면 '주위 동료들이 못해서 내 가치가 빛나지 않았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고요. 오히려 더 전문적으로 봐서는 그 사람이 골에 더 집중할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바로 옆의 동료를 이용할 수 있으니까 원톱보다는 투톱이 낫고, 그만큼 플레이하기가 편하죠. 저는 대표팀 시절에 거의 원톱을 봤어요. 원톱을 보면 사실 굉장히 어렵죠. 상대 수비수들과 싸워야하고, 키핑해서 동료에게 연결해줘야 하고, 골도 넣어야 하고, 움직이면서 공간을 만들어줘야 하고, 그런 애로 사항이 많았죠. 원톱 볼 때 그런 부분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답답할 때가 많았어요.

 

지도자로서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황선홍 ⓒ스포탈코리아

 

- 이제부터는 축구팬들의 질문들을 모아봤습니다. 요즘 후배들이 유럽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본인이 선수 생활했던 시절이 아쉽지 않으신가요? 제가 봤을 때는 황 감독님이 지금 20대 중반만 되었다면 분명 빅리그에 계시리라고 생각되는데 말이죠. (합법칙적조건설님)
은퇴한지 한 7년 됐는데...(웃음) 그런 생각도 들죠. 다시 태어나보고 싶어요. 잉글랜드에 갔을 때 기현이, 지성이가 뛰는 것을 보고 아쉬웠죠. 다시 한번 축구를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 문득 문득 들죠. 지금 스무 살이면 너무 늦고, 열 다섯 살 정도 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 뿐만 아니라 은퇴한 선수들은 다 마찬가지일거에요. 다시 한 번 태어나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많이 할 겁니다.(웃음) 한국 선수들이 경쟁력이 있다고 봐요.

- 히딩크 감독님이 황선홍 선수를 '한국의 베르캄프 같은 선수'라고 평했던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비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daniel님)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베르캄프 선수는 제가 좋아하는 선수인데, 플레이 자체가 우아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요. 그런 측면에서 상당히 비슷하죠. 사실 완벽하게 다 갖출 수는 없잖아요. 메시 같은 드리블에, 베르바토프 같은 볼 컨트롤에, 크라우치 같은 헤딩력을 가질 수는 없죠.(웃음)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저와 플레이 스타일이 흡사한 것 같아요. 파워풀한 면은 부족해도, 섬세하고 우아하고 이런 것들은 비슷한 것 같아요. 밖에서 보시기에는 제가 파괴력이 떨어져 보일 수는 있어도 플레이 스타일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지금도 즐라탄이나 베르바토프 같은 선수들을 보면 참 축구를 쉽게 한다, 축구는 저렇게 해야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 그러고 보면 감독님께서 아스널의 축구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많은 지도자 분들이 바르셀로나와 같은 축구를 하고 싶다는 말씀도 하시고요. 그러나 지도자 입장에서 볼 때는 이런 축구를 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못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요.(웃음)
제가 지도자를 하면서 제일 많이 느끼는 부분이 그런 부분이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좁히는 게 굉장히 어렵더군요. 아직도 제 뇌리에서는 우리 팀이 바르셀로나 같고, 아스널 같은데, 그런 축구가 운동장에서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게 되죠.(웃음) 감독을 2년 정도 해보니까 그 적정선을 잘 찾아내는 것도 감독의 능력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을 하는 거고, 우리 선수들에 맞는 옷을 입히는 것도 감독이 해야 할 일이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1995년 포항에서 8경기 연속골을 터트릴 당시의 황선홍 ⓒ베스트일레븐

 

- 라데, 홍명보, 박태하, 최문식 등과 함께 했던 포항 시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기계인간님)
2009년의 포항도 최고인데, 조직적으로 상당히 좋다는 생각을 해요. 반면 당시의 포항은 개인 능력 면에서 상당히 좋았죠. 포항의 최고 전성기 시절이 아니었나 싶군요. 한 자리도 빈 곳이 없었고, 특히 제 경우에는 라데 선수와의 콤비네이션이 상당히 좋았죠. 처음에 제가 독일에서 들어왔을 때는 둘 다 자존심이 워낙 강하니까 잘 안 맞았는데,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면서 도와주다보니 시너지 효과가 났어요. 상대팀으로서는 우리를 막아내기가 어려웠을 때였죠.

 

- 황새의 국가대표 초창기부터 지켜봤던 팬입니다. 수많은 경기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황새와 이룰 투톱 부재가 가장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공격 파트너는 누구인가요? (하무추님)
라데를 꼽고 싶네요. 라데는 굉장히 드리블이 좋고 파워풀한 스타일이고, 저는 위치 선정이나 동료를 이용하는 플레이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콤비네이션을 통해 서로의 단점을 커버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잘 맞았었죠. 라데는 몸싸움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헤딩 같은 것은 제가 뜨고, 라데가 사이드에서 돌파할 것 같으면 제가 중앙에서 위치를 잡고 있다가 돌파하는 순간에 좋은 포지션을 잡아 골을 넣는다든지, 이런 장면이 많이 일어났죠. 제가 돌파력이 부족한 것을 라데가 커버해주고, 라데의 제공권은 제가 커버해주고. 이렇게 서로의 부족한 점들을 커버가 됐던 거 같습니다. 그러면서 서로의 장점들이 더 부각이 되었죠.

 

- 황 감독님이 생각하시기에 자신의 전성기는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생각할 때는 94~96년 무렵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감독님이 느끼기에 가장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었던 시절은 언제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날개 단 황새--v님, dek2_style님)
상대가 다르기 때문에 애매할 수 있네요. 95~96년에는 K-리그에서 상당히 좋았었던 시절이죠. 그러나 개인적으로 최고의 상태였던 시기는 일본에 있을 때가 아닌가 싶어요. 그 당시의 몸 상태나 골을 넣는 장면 등을 보면 상대가 저를 수비하기 어렵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요. 그 때가 아마 절정기였던 것 같습니다.

 

- 포항 아톰즈 시절부터 15년 넘게 황 감독님을 우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번호는 18번이고 많은 유니폼도 전부 18번입니다. 팀 내 최고 스트라이커라면 대부분 9번이나 10번인데, 황 감독님은 굳이 18번을 고집했던 이유도 궁금합니다. (신승학님, 김기호님)
별로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학교에서는 줄곧 10번을 달았어요. 그런데 대표팀에서는 막내이다 보니까 18번을 달게 됐는데, 그렇게 되니까 그 번호가 상당히 좋더라고요. 오히려 학교에서 달던 10번을 18번으로 바꿀 정도로요.(웃음) 그래서 계속 18번을 달게 됐죠. 일본에 가서도 마찬가지고, 대표팀에서도 항상 18번을 달았죠.

 

- 이동국 선수를 비롯한 많은 후배 공격수들이 자신의 롤모델로서 황선홍 감독님을 언급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본인이 어린 시절 동경했거나 닮고자 했던 공격수가 있다면 국내외로 어떤 선수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발자국님)
저는 해외에서는 네덜란드의 마르코 판 바스텐을 좋아했고, 국내에서는 최순호 감독님이었어요. 동대문운동장에서 대표팀 경기를 하면 항상 가서 볼 정도로 그 분이 선망의 대상이었죠. 키도 크셨는데, 그 당시에는 작고 빠른 선수가 많아서 대형 스트라이커는 없었거든요. 최순호 감독님이 그 첫 번째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대학 가면서 키가 커졌는데, 당시만 해도 180cm가 넘으면 대형 스트라이커라고 했었어요. 그래서 저도 대형 스트라이커라고 불리웠었죠.(웃음) 또 최 감독님이 키가 크시지만, 볼을 감각적으로, 우아하게 차시는 분이셨죠. 그런 면에서 저도 최순호 감독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 선수 시절에는 '왜 감독이 저런 지시를 내릴까?' 하고 답답할 때도 있었을 테고, 반대로 현재 감독을 하면서 '왜 저 선수는 저런 플레이를 할까?'라고 답답할 때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선수의 입장에서 축구할 때와 감독의 입장에서 축구를 할 때 느낀 점을 알고 싶습니다. (이지원님)
선수 때는 제가 제일 중요시 생각했던 것이 순간적인 느낌이에요. 선수 때는 창조적인 플레이가 나오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해서 그런 쪽으로 많이 시도를 했어요. 상대를 속이는 동작도 많이 시도했고요. 그런데 감독을 하다보니까 그 선수만 놓고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인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떻게 보면 돌출행동 같은 것을 자제시켜야할 때도 있어요. 플레이 자체도 너무 속이기 위한 것에 집착해서 템포가 죽게 되면 전체적인 경기 속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자꾸 제어시키고 빨리 보내라고 요구를 하죠. 그런 것들이 틀린 것 같아요. 선수들도 시간이 지나면 빨리 하면서도 상대를 속일 수 있는 기능을 터득하겠죠. 그런 것들이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공격수 역할로서의 부분적인 플레이와 감독으로서 전체적인 부분을 조합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어요. 선수 때는 잘했는데 왜 감독님은 하지 말라고 하는 지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감독을 하니까 전체적인 경기 템포나 이런 것들 때문에 불필요한 동작이나, 불필요한 터치 수 등을 제어하게 되더군요.

 

- 포항 시절 자신감에 넘쳐서 상대 수비수를 앞에 두고 와서 막아보라는 제스처를 손으로 했던 적을 본 기억이 납니다. 황 감독님도 그 장면을 기억하시는지. (신승학님)
딱 한 번 했는데 그걸 기억하시네요.(웃음) 그 때가 일화(현 성남)와의 경기였었어요. 95년에 일화와 챔피언결정전을 할 때 제가 박광현 선수에게 마크를 당했었거든요. 결국 우승을 못했었죠. 그런 인연이 있는 상황에서 98년 개막전에서 천안 일화와 붙게 됐죠. 저로서는 십자인대 수술을 하고 1년 4개월 만에 복귀전을 치른 상황이었고, 대표팀의 차범근 감독님도 포항에 직접 와서 보고 계셨어요. 그 경기에서 제가 2골을 넣어서 2-0으로 이겼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온 상태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95년 챔피언결정전에서의 한도 남아있고..저를 엄청 괴롭혔었거든요.(웃음) 그리고 완전히 승기를 잡아서 두려울 것이 없는 상태여서 팬 서비스 차원에서 한 측면도 있고요. 그런데 상대를 얕잡아본 면도 있었던 거라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어요. 어떻게 보면 제가 1년이 넘게 재활하면서 억눌러 있던 것이 폭발했던 장면이었던 것 같아요. 관중도 꽉 찼고, 차범근 감독님도 오셨고, TV 중계도 했었던 상황에서, 수술하고 재활하면서 억압되었던 것들이 운동장에서 표출됐던 것 같습니다.

 

1999년 J리그 올스타전인 조모컵에서 한국 선수들과 함께

- 라데와 최문식, 윤정환 등 좋은 도우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플레이 측면에서 가장 자신과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선수는 누구입니까? (신승학님)
제일 많이 호흡을 맞췄던 선수는 최문식 선수예요. 윤정환 선수는 대표팀에서 가끔 해봤는데 호흡을 많이 맞춘 편은 아니라서 조금 그렇고요. 최문식 선수와 플레이 했을 때가 제일 많았었는데, 제 움직임과 잘 맞았어요. 제가 빠른 편은 아니잖아요. 그렇게 느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빠른 스피드도 아니기 때문에 순간적인 움직임으로 수비수를 떨어트릴 때 패스가 그 타이밍에 정확히 오지 않으면 플레이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어요. 그런데 그런 패스를 잘 해주는 선수가 최문식 선수였어요. 또 기억나는 건 일본에서 올스타전에 나갔을 때인데, 지금 나고야 감독인 스토이코비치와 함께 뛰었거든요. 그 선수와 함께 뛸 때 정말 축구가 신났어요. 운동장에서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어요. 45분을 더 뛰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움직일 때 원하는 타이밍에 패스가 들어와야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고 플레이를 이어갈 수 있고, 그런 것들이 축구에 큰 영향을 미쳐요. 10cm만 뒤로 와도, 타이밍이 조금만 늦어도 그 다음 동작을 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지거든요. 그런 면에서 최문식 선수나 스토이코비치 선수가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일본에 있을 때 노정윤 선수에게도 그런 면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고요.

 

-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던 만큼 상대방의 견제도 많이 심했을 텐데, 정말 지긋지긋하고 두 번 다시 만나기 싫다는 생각이 들만큼 감독님을 괴롭혔던 선수는 누구였는지 궁금합니다. (이지원님)
K-리그에서 뛸 때는 구단마다 한 선수씩 있었죠.(웃음) 안익수-박광현(이상 일화), 울산의 최영일, 전남에는 김태영, 부산 대우에는 김현수 등...제일 기억에 남는 선수가 박광현 선수가 아닌가 싶어요. 챔피언결정전에서 아픈 기억이 많고요. 그 때는 다 맨투맨 수비를 할 때라 다음 게임 상대 팀의 수비수나 대체요원 등에 대해서 하루 종일 장단점을 생각하고 나가곤 했었습니다.

 

긴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이제 지도자로서도 좋은 모습 보여주시길 기원합니다.

 

공식질문1. 축구는 (인생)이다.
제가 기쁠 때도 있었고 어려울 때도 있었고, 축구를 하면서 여러 가지를 계속 겪었기 때문에 그 안에 희노애락이 다 들어있는 것 같아요. 인생에 대한 공부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좋을 때 어떻게 하고, 나쁠 때 어떻게 하고, 슬기롭게 넘기는 방법들. 축구는 인생과 똑같은 것 같아요.

 

공식질문2. 월드컵은 (꿈)이다.
나한테는 스트레스이기도 했는데.(웃음) 월드컵에 우승하는 것도 우리 한국축구가 10년이 되든, 100년이 되든 그것을 목표로 해서 나가야 되고요. 선수도 마찬가지로 월드컵에서 한 번 뛰어본다는 것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전 세계적으로 극소수만 나갈 수 있는 꿈의 무대를 밟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영광스러운 것이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