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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人터뷰9 -홍명보下] “폴란드전 첫 승이 가장 감격적”

정민건TV 2009. 12. 30. 06:09

  

[ⓜ 월드컵 人터뷰9 -홍명보下] “폴란드전 첫 승이 가장 감격적”

 

 대한축구협회(KFA) 홈페이지에서는 DAUM과 공동 기획한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는 내년 6월까지 격주로 게재합니다.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과 대표팀 경기의 홍보를 위해 국내 최대 인터넷포털 운영사이자 KFA 공식후원사인 DAUM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하는 홍보 프로그램으로서 한국축구의 국민적 붐 조성을 꾀하고자 하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월드컵과 관련된 인물들이며, 현 대표팀 선수들을 비롯해 추억의 스타, KFA 행정인, 역대 월드컵대표팀 감독 등이 릴레이 인터뷰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특히 KFA 및 DAUM 홈페이지를 통해 축구팬들의 질문들도 수렴해 궁금한 점들을 해소시켜드립니다. 인터뷰는 KFA 홈페이지와 DAUM 홈페이지에 기사와 동영상으로 게재됩니다.


 아홉 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올림픽대표팀의 홍명보 감독(40)입니다. 홍명보 감독은 1990년 2월 4일 노르웨이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한 이래 월드컵 4회 연속 출전(1990, 94, 98, 2002) 등 A매치에서만 135회 출장해 센츄리클럽에 가입했습니다. 또한 A매치에서 9골을 터트렸으며, 이중 94 미국 월드컵 스페인, 독일전에서 1골씩 터트리며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바 있습니다.
1995년에는 AFC 선정 아시아 최고 수비수, 2000년에는 AFC 아시안컵 베스트11에 선정된 데 이어 2002월드컵에서는 FIFA 브론즈볼, 2004년에는 FIFA가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펠레에게 의뢰해 최고의 선수들을 선정한 'FIFA 100'에 뽑히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K-리그에서도 1992년 포항 소속으로 데뷔해 그 해 리그 우승을 이끌며 MVP, 베스트11을 수상했으며, 93년 아디다스컵, 96년 FA컵, 97년 AFC 아시아클럽선수권 우승 등에 일조했습니다. 1992년을 시작으로 94년과 95,96, 2002년 K-리그 베스트11 수비수 부문에 뽑혔습니다.

 


* 90년대 중후반의 포항은 정말 강했습니다. 저번에 황선홍 감독님은 올해 포항이 조직적으로 좀 더 탄탄하다면, 그 때의 포항은 개개인의 능력이 워낙 뛰어났다고 하셨는데요. 홍 감독님이 평가하기에는 어떠셨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시 포항은 공격진에 황선홍-라데 콤비가 있었고, 미드필드도 막강했어요. 어디 하나 떨어지는 포지션이 없을 정도로 주전급 멤버들이 가진 능력이 아주 좋았죠. 당시에는 상대팀에 대한 자신감도 컸어요. 중립지역에서도 가끔 했었는데 우리 홈이나 다름없었고, 그 외에 어느 지역에서 하더라도 홈 경기를 하는 것 같았죠. 많은 팬들이 포항을 성원해주셔서 원정임에도 홈처럼 경기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 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둔 97년에 일본 J리그의 벨마레 히라츠카로 이적하셨습니다. 일본으로 이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1996년에 아쉽게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97년도에는 제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뭔가 저에게 새로운 생활이 필요했어요. 또 다른 동기 부여가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박성화 감독님과 면담을 하면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 의식이 없는 상태라 기회가 되면 외국에 나가서 한번 해보고 싶다"라고 솔직히 말씀드렸어요. 감독님께서 흔쾌히 이해해주셔서 5~6월에 일본으로 이적할 수 있었죠.

* 당시 나카타 선수가 막 떠오르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한일 양국의 슈퍼스타가 벨마레에서 함께 뛴 셈인데요. 선수로서나 인간으로서의 나카타에 대해 평하신다면.

당시에는 저와 나카타가 한일 양국을 대표한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요. 그 무렵의 일본은 여전히 미우라나 이하라가 있었으니까요. 나카타는 그 무렵부터 떠오르기 시작한 새로운 스타였습니다. 어쨌든 나카타를 처음 봤을 때는 인상도 조금 우락부락한 것 같고, 플레이 역시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나카타가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죠. 예를 들면 항상 영어 책을 들고 다녔고, 팀 훈련이 끝나면 웨이트 트레이닝장에서 혼자 개인 훈련을 하고 있기도 했고요. 매스컴이 나카타에게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시점에서도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이런 식으로 하면 굉장히 좋은 선수로 성장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격은 굉장히 독특한 면이 있었죠. 다른 선수들과 이야기도 잘 하지 않고, 혼자 다니는 것 좋아하고 그런 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지금도 기회가 되면 가끔 만나곤 합니다. 처음에는 팀 동료였지만, 지금은 형과 동생의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저보다 나이가 많이 어리니까요.

* 98 프랑스 월드컵은 세 번째로 나가는 월드컵이었습니다. 이미 두 번의 경험이 있었기에 좀 더 자신감을 갖고 나가셨을 것 같은데요.

98 프랑스 월드컵은 제가 일본에서 활동할 때였기 때문에 대표팀에서 선수들과 동계훈련을 거의 하지 못했었어요. 지금처럼 FIFA 규정대로만 할 수 있었죠. 그러다보니 다 아는 선수들이지만, 예전보다는 서먹서먹한 부분도 조금 있었어요. 더군다나 팀 합류가 늦었기 때문에 호흡을 맞추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죠.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98 월드컵에서는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 98 월드컵의 경우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1-3으로 역전패 당하면서 전체적으로 팀 분위기가 무너진 느낌이 있는데요.

아무래도 그런 면이 있죠. 우리가 선제골을 넣은 상황에서 3골을 허용하다보니까 실망감이 좀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전체적으로 팀 분위기가 조금 떨어진 것이 사실이에요.

 

* 네덜란드전은 감독님도 잊지 못하실 겁니다. 5골이나 내주면서 질 거라고는 생각 못하셨을 것 같은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네덜란드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처음 20분은 충분히 해볼만 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네덜란드 선수들의 볼 연결이 점점 빨라지면서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고개만 계속 돌아가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월드컵에 나가서 치렀던 경기 중에 제일 어려운 경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당시 베르캄프, 오베르마스 등 세계 최정상급 공격수들을 상대한 느낌은 어떠셨나요? 팀으로서의 네덜란드의 강함도 절실하게 느꼈을 것 같은데요.
당시 베르캄프도 뛰어난 선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베르마스에 대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써야 했어요. 스피드가 정말 좋았죠. 아마 오베르마스를 막는 쪽 위치가 최성용 선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실 최성용 선수도 굉장히 빠른 선수거든요. 그런데 오베르마스가 너무 빠르다보니 제 포지션도 뒷 공간을 커버하기 위해 조금씩 그 쪽으로 치우치게 됐죠. 그러다보니 반대편에 공간이 생겼고요. 그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 마지막 벨기에전의 경우 여러 가지 악재 속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습니다. 당시 선수들의 표정이나 플레이를 보면 어떻게라도 3패는 면하겠다는 의지가 정말 대단했던 것 같은데요.

그렇죠. 당시에 차범근 감독님께서 물러나셨고, 팀 분위기는 최악이었죠. 그러나 마지막 벨기에전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잖아요. 우리를 성원해주신 팬들도 있는데, 잘하지는 못해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보여줘야 한다고 선수들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 98 월드컵이 끝나고 99년부터 가시와 레이솔에서 활약하셨습니다. 사실 가시와 시절부터 일본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셨다고 할 수 있는데요. 팀의 상징이기도 하셨고요. 다소 고전했던 벨마레 시절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벨마레 시절은 제가 일본 생활에 적응하는 시기였어요. 그러나 가시와 시절은 저의 경기력을 비롯해 모든 것들이 표출됐던 시기였죠.
1999년에 이적을 했는데, 첫 시즌에 팀 성적이 많이 좋아졌어요. 그러자 다음 해에 당시 니시노 감독님께서 저에게 주장을 맡아줄 것을 제의하셨어요. 여러 이유로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1주일 동안 계속 말씀하셔서 고민을 하다가 수락을 했습니다. 1년 동안의 생활을 통해 팀 동료들을 파악하고 있었고, 동료들 역시 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일단 우리 팀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장이 된 이후에는 그것을 조금씩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어요.

당시에 제가 팀에서 나이가 많은 편이었는데, 주장으로서 선수들에게 보여준 것은 솔선수범이었어요. 훈련장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니까 선수들도 조금씩 따라와 줬고, 변화된 선수들도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팀으로서 단결하는 힘이 많이 좋아졌죠. 그래서 2000년에는 가시와 역사상 가장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 (후기리그 2위, 통합 1위, 당시 전후기리그 우승팀이 챔피언을 가리는 방식이라 챔피언결정전에는 진출 못함. -편집자 주)

 

* 당시 통역을 담당하던 다카하시 씨의 인터뷰를 보면 1999년 나비스코컵에서의 일화가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나고야와의 4강전에서 라커룸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셨다고 들었는데요.

그 때 홈 & 어웨이로 결승팀을 가렸는데, 나고야와의 원정경기에서 우리가 3-1로 이겼어요. 그런데 홈에서의 2차전에서는 시작하자마자 2골을 내줬죠. 전반이 끝나고 라커룸에 들어왔는데, 화가 나서 감독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일어나서 선수들에게 크게 소리쳤어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카하시 통역은 홍명보가 "자신이 하지 않아도 누군가 알아서 해줄 거라 생각하는 것 아니냐!"라고 외쳤다고 밝혔음. -편집자 주)

그렇게 하고 후반에 들어갔고, 선수들이 심기일전해서 결국에는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가 전 경기에서 경고를 하나 받았던 상황에서 경고를 하나 더 받았어요. 완전히 뚫리는 상황이었고, 실점을 허용했을 경우 우리가 결승에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제가 경고를 받을 경우 결승전에 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각오하고 막았어요.

결국 경고를 받고 결승에 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감독님께서 저를 부르더니 원정에 같이 가자고 하시더군요. 제가 "경기도 뛰지 못하는데 동행하면 선수들이 더 불편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더니 감독님께서는 "괜찮다. 벤치에 앉지 못하더라도 옆에 서 있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90분간 벤치 옆에서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결과적으로 우리가 우승했어요. 일본에 있을 때는 팀 미팅에서 항상 감독님이 말씀하신 이후에 제가 선수들에게 이야기했었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했는데, 특히 정신적인 면을 많이 강조했었죠. 그게 저에게는 또 하나의 스트레스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이에요.(웃음)

* 2002 한일 월드컵은 감독님으로서는 마지막으로 준비하는 월드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히딩크 감독님이 한동안 대표팀에서 제외시키면서 '홍명보가 이대로 끝나는가'라는 이야기들도 나왔었죠.

사실은 히딩크 감독님이 처음 부임하셨던 2001년 1월에 제가 쉬었어야 했어요. 2000년을 전후로 제가 50경기 가깝게 출전했었거든요. 나이도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는 휴식이 필요했었죠. 그런데 히딩크 감독님이 부임하고 1월부터 대표팀에 합류하다보니까 휴식 없이 1-2월을 보내고, 3월에는 소속팀에 돌아와서 리그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제 컨디션은 점점 떨어졌고, 6월에 컨페더레이션스컵을 끝내고 다시 소속팀에 복귀했을 즈음에는 제 몸이 만신창이였죠.

힘을 내도 힘을 낼 수 없는 상태였고, 결과적으로 피로골절 진단을 받았어요. 3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진단을 받았죠. 그 무렵에 제가 대표팀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3개월간 푹 쉴 수 있었습니다. 동계 시즌에 쉬지 못했던 것을 이 때 쉬었던 거죠. 그 덕분에 2002년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언론에서는 '홍명보 시대는 끝난 것 아니냐. 히딩크 감독이 버렸다'라는 식의 기사들이 나왔는데, 개인적으로 기분이 조금 나쁜 것은 있었지만, 그것에 관해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어요.

그 무렵에 히딩크 감독님이 (황)선홍이와 (유)상철이 경기를 보러 가시와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저와 경기장 VIP 룸에서 만나 악수만 하고 아무 이야기를 안 했었어요. 동행했던 박항서 감독님(당시 대표팀 코치)이 저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히딩크 감독님 눈치를 보고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고요. 히딩크 감독님이 일부러 저와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을 저는 눈치 채고 있었어요. 저에게 뭔가 자극을 주려고 한다는 것도요.

저 역시 히딩크 감독님 옆에서 뭔가 얻으려고 하지 않았죠. 당장 경기장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인데,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가시와를 방문했으니까 기본적인 예의를 표시한 것이고, 이후에 그 자리를 떠났죠. 나중에 박항서 감독님과 이야기하는데, 역시 히딩크 감독님이 "가시와에 갔을 때 절대 홍과 이야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것을 눈치 채고 있었어요. 그 상황에 대해 전혀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 당시 월드컵에 나갔던 많은 선수들이 4강에 올랐던 순간보다 폴란드와의 첫 경기 승리가 더 감격적이었다고들 하던데, 감독님은 어떠셨나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폴란드전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제가 2002 월드컵을 치르기 전까지 3번의 월드컵에 나가 9경기를 치르면서 한번도 이기지 못했어요. 2002 월드컵을 준비할 때도 16강에 진출하겠다는 것보다도 우선 1승을 먼저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죠. 1승은 저에게 있어 월드컵의 한이었고, 그래서 폴란드전에서 승리한 다음에 정말 기뻤습니다.

* 최진철-김태영 코치님과 함께 한 3백 수비라인은 역대 최고라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수비진을 리드했던 입장에서는 2002 월드컵에서의 3백 수비라인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일단 김태영, 최진철 코치가 굉장히 성실했고, 서로간의 밸런스도 잘 맞았어요. 최진철 코치는 신장이 좋아 제공권이 강했고, 김태영 코치는 스피드와 맨투맨 수비가 좋았어요. 저는 중앙에서 수비를 조율하는 입장이었고요. 수비 입장에서는 저보다 그 선수들의 능력이 뛰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팀 밸런스가 정말 잘 맞았죠.

* 8강 스페인전 마지막 승부차기를 성공한 뒤에 보여주신 환한 웃음이 팬들에게는 크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홍명보가 웃는 것은 처음 본다'라는 반응도 있었는데요. 선수 시절의 냉정하고, 침착하고, 다소 차가운 듯한 이미지는 설정인가요?(웃음)

일반 팬들은 저를 운동장 외에서는 볼 수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를 얻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까지 설정할 정도로 생각하고 살지는 않아요.(웃음) 동료들은 사석에서 제가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지만, 그런 모습들을 팬들은 볼 수 없는 것이죠.

 

* 관련해서 축구팬의 질문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홍명보 감독님의 화난 표정, 즐거운 표정, 슬픈 표정, 기쁜 표정 등이 나오면서 모두 같은 표정으로 표현한 사진이 화제가 됐었는데요. 혹시 보셨나요? (칵 쎄리님)

예. 저도 재미있게 봤어요. 그런데 그 표정 말고도 굉장히 많은 표정이 있는데, 그거 하나만으로 되어 있어서 조금 아쉬웠습니다.(웃음)

 

* 1990년부터 2002년까지 4번의 월드컵을 경험하셨습니다. 각각의 월드컵이 감독님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짚어주신다면.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월드컵과 가장 잊고 싶은 월드컵도 꼽아주세요.

개인적으로는 94 미국 월드컵이 가장 의미가 있어요. 제 경기력이 아주 좋았고, 덤으로 득점까지 할 수 있었죠. 잊고 싶은 월드컵은 역시 98 프랑스 월드컵입니다.


* 90월드컵부터 02년 월드컵까지 경험하시면서 축구의 흐름이 어떻게 변해왔다고 보시는지요? 특히 수비수의 입장에서 느낀 변화는 어떤 것이 있나요?

90년도 초반에는 시스템 자체가 3-5-2 형태가 많았어요. 독일이 90 월드컵에서 그 시스템으로 우승을 하면서부터죠. 그 이후 2년 정도 있다가 유럽을 중심으로 4백이 대세를 이뤘죠. 물론 기본적으로는 이전부터 4백이 많았지만, 독일이 3백 시스템으로 성공했고, 우리 역시 계속 3-5-2 형태를 유지하다가 2002년 무렵부터 4백을 도입하기 시작했어요. 전술적으로는 세계축구흐름에 조금 뒤처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제가 유럽에서 생활하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지만, 2002 월드컵을 히딩크 감독님과 함께 겪으면서 느낀 것인데, 경기하는 방법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패스를 만드는 과정 등에 있어서 우리는 불필요한 움직임, 불필요하게 빼앗기는 상황이 많이 있었어요.

* 2006 독일 월드컵은 코치의 입장으로 참가했습니다. 선수로 참가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요.

다르죠. 특히 당시에는 외국인 감독과 코치(아드보카트 감독과 핌 베어벡 코치)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코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선수와의 가교 역할을 하는데 충실했죠. 선수의 생각을 코칭스태프에게, 반대로 코칭스태프의 생각을 선수들에게, 가운데서 조율하는 입장이었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어요.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선수들과의 관계도 자연스러웠으니까요.

* 지도자로서 아직 길지 않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매우 인상적인 활동을 보이고 계십니다. 앞으로의 목표나 계획은 어떻게 설정하고 계시는지요?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2012년 런던 올림픽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런던 올림픽에서 어떤 성과를 올리겠다는 목표는 아직 설정하지 않았어요. 더 중요한 것은 그 곳에 가기 위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노력을 해야할 것인지를 많이 고민해야할 것 같아요. 런던 올림픽에 나갈 선수들, 특히 U-20 월드컵에 다녀온 선수들을 어떻게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제 팬들의 질문을 본격적으로 받아보겠습니다. 현재 국내 지도자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로 손꼽히고 계십니다. 팬들 사이에서는 아직까지 외국인 감독의 선호도가 높은 편인데, 그들과 비교해서 국내 지도자들은 어떤 경쟁력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shout님)

우리가 무조건 우리 것만 고집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다면 외국인 지도자들은 과연 무엇이 더 좋으냐, 어떤 점이 좋으냐를 공부해야죠. 그러나 외국인 지도자가 100% 우리에게 맞는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문화차이라는 굉장히 큰 갭이 있기 때문이죠. 결국 외국인 지도자가 갖고 있는 것에 우리의 장점을 잘 접목시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외국 문화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해요. 그리고 지도자가 축구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축구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시와 레이솔이 홍명보 감독님의 팀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씀하셨던 인터뷰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혹시 가시와 레이솔에서 감독직 제의가 온다면 받아들이실 의향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daniel님, 쥰님)

글쎄요. 아직 거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정말 열정을 가졌던 팀에서 다시 감독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인 것 같아요. 그러나 지금은 올림픽대표팀에 대해서만 집중할 생각입니다.

2002년 월드컵 터키와의 3-4위전에서 경기 시작 몇 초 만에 골을 헌납했을 때의 상황과 그 때의 심정이 궁금합니다. (김종철님)

첫 번째로 제가 잘못했던 것은 예측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에요. 볼이 저에게 올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고, 골키퍼에게 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움직이지 않았죠. 공격수가 오기 때문에 뒤로 처지지 않고 그냥 서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볼이 저에게 왔기 때문에 너무 당황스러웠죠. 그러다보니 볼 컨트롤이 잘못되었고, 실수를 하고 말았어요. 예측을 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잘못된 일이었던 것 같아요.

 

오랜 현역생활 중에서 수비할 때 가장 막기 어려웠던 공격수는 누구였나요? 같은 축구선수로서 봐도 너무 공을 잘 찼다고 생각했었던 선수도 궁금해요. (이현숙님)

국제무대에서는 역시 클린스만이었던 것 같아요. 공격수로서 가장 위협적이었죠. 한국에서는 황선홍과 라데였는데, 두 선수 모두 저와 같은 팀에 있었기 때문에...(웃음) 그리고 잘한다고 생각한 선수들은 정말 많아요. 누구 하나를 꼽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클린스만이 은퇴 후 감독으로서 활동하는 모습에서 홍 감독님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클린스만과는 LA 갤럭시에 있을 때 2년 정도 같이 있었어요. 당시에 클린스만이 기술고문이었거든요. 젊다는 느낌이 비슷하게 다가왔나 봅니다.

2002 월드컵에서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4강에 갈 수 있었다는 일부의 폄하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kinmb님)

글쎄요. 요즘 앙리 사건도 있었지만, 그것도 축구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엄청나게 판정에서 이득을 봤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아드보카트 감독 밑에 계셨을 때, 안정환 선수의 선발을 두고 베어벡 코치나 홍 감독님께서 안정환 선수를 조커로 활용해야 한다고 건의하셨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인가요? (남서방님, 카일님)

당시 저는 외국인 감독과 코치 밑에 있었기 때문에 제 의견을 말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제 기억에는 맨 처음 월드컵에 가기 전에 조재진과 이동국의 활용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안정환에 대해서 특별히 이야기한 기억은 없어요. 아무래도 아드보카트 감독님과 베어벡 코치님 모두 네덜란드 사람이니까 둘이서 논의를 하긴 했었겠죠.

홍명보 감독님께서 생각하시는 현재 최고의 선수는 누구라 생각하십니까? (sjssofjq님)

아무래도 현역 최고의 선수는 박지성이 아닌가 싶네요. 그 동안의 경험이나 활동 등 모든 것을 봤을 때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이고, 현역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능성의 측면으로 봤을 때는 이청용과 기성용을 꼽고 싶어요. 이청용은 개인 테크닉이나 축구 센스도 그렇고, 정말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올림픽대표팀 시절보다도 훨씬 발전했어요. 자신감도 생겼고, 기본적으로 테크닉이 좋은 선수였기 때문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더 발전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성용의 경우도 베이징 올림픽대표팀에서 같이 생활했고, 대표팀에서도 활약 중이죠. 중요한 유럽 진출을 앞두고 있는데, 지금 그 선수에게 뭘 원한다기보다는 앞으로 더 잘해서 더 많은 것을 배워 와서 한국축구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해요. 런던 올림픽도 기성용에게는 중요한 대회가 될 수 있어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함께 해야죠.

긴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런던 올림픽까지의 긴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공식질문1. 축구는 (희생)이다.

공식질문2. 월드컵은 (축제)다.


인터뷰= 이상헌, 영상= 정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