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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人터뷰17 -차범근中] 한국 축구의 영원한 전설 '차붐'

정민건TV 2010. 4. 21. 08:29

 

[ⓜ 월드컵 人터뷰17 -차범근中] 한국 축구의 영원한 전설 '차붐'

 

1985년 레버쿠젠 시절의 활약 모습 ⓒ FIFA


- 독일에 진출하시면서 정말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교민사회나 한국 언론과의 오해도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프로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다가 독일에 가서 보니까 훈련하는 것부터 모두 새롭게 적응해야 했습니다. 거기는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진흙탕 같은 그라운드에서 축구할 때가 많았어요. 그런 곳에서 뛰다보니 체력적으로 힘들더라고요. 한국에서는 어렸을 때 가난해서 제대로 못먹었고, 나중에 대표팀에 가서야 고기를 마음껏 먹었거든요. 그래서 독일에서 식사할 때 창피하지만 체력 보강을 위해 스테이크 2개를 달라고 해서 먹곤 했어요. 원래 선수들은 1개만 배당되는데 말이죠. 당시 골이라도 넣었으니까 망정이지 골도 못 넣고 스테이크 2개 달라고 했으면 눈총을 받았을 겁니다.(웃음)

무엇보다 교민들이 저를 오해하신 거죠. 그 분들은 프로의 세계를 모르시잖아요. 교민들은 자신들이 원하면 만나주고, 함께 해주길 바라는데, 저는 그럴 수 없었거든요. 매일 훈련해야 하고, 매주 토요일에 시합이 기다리고 있었죠. 또 유럽은 땅이 커서 어디를 가려고 하면 1시간 이상 갔다 와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경기를 준비한다는 것이 도저히 무리였어요.

저로서는 힘든 훈련을 마친 뒤에는 쉬어야 했고, 저녁 10시 30분만 되면 누가 와도 들어가서 잤거든요. 시간 되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었습니다. 그 습관이 남아 아직도 1시간 정도는 꼭 운동을 합니다. 어쨌든 이런 부분 때문에 오해도 많았죠.

제가 생각해도 독일에 있을 때는 성적을 위해 기계적으로 살았어요. 그러나 그 것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었고, 제가 목표했던 것들을 다 이룰 수 있었으니까요. 몸 관리는 직업 선수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제 모습을 통해 후배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아무리 좋은 기량을 갖고 있는 선수라도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한 두 번은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가장 높은 경기력을 끌어낼 수는 없어요.

은퇴한 다음에 제 현역 생활을 돌아봤는데, 다시 내가 축구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했을 때 다시 못할 것 같더군요.(웃음) 다시 그렇게 긴장하고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철저하게 했죠. 고도의 집중력은 연령에 따라서도 다른데, 저는 에너지가 가장 왕성할 때 가장 높은 집중력으로 임했기 때문에 그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같습니다.

- 사실 누구나 프로로서의 몸 관리에 대해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이것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감독님도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현역 내내 혹독할 정도로 자기 관리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물론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저라고 없겠어요? 그러나 저는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지 않았습니다. 축구에 있어 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하지 않았어요. 밖으로 많이 돌아다니는 것도 하지 않았고, 디스코텍이나 술집도 제 발로 간 적이 없어요. 심지어 노래방조차도 말이죠. 축구와 관계된 것을 떠나서는 제 의지로 간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그러시겠지만, 축구 외에 다른 것도 해봤으면 하는 후회가 전혀 없어요. 저는 19세부터 팬들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고, 독일에서 10년 있을 때도 팬들이 응원해주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큰 힘을 얻었어요. 그리고 독일에 갈 때 좋은 축구를 배워 국내에서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것을 지켰죠. 그렇기 때문에 제 스스로에게 불만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신앙적인 것도 연관이 되어 있고요.

한 때 축구로 인해 마음 아픈 적도 있었지만, 제 안의 사명에 대해 의심해보거나 망각한 적은 없습니다. 98 프랑스 월드컵 때 도중 해임되고 힘들었던 시기에도 이틀 만에 축구교실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니까요. 다들 저보고 정신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때도 누구를 원망하고 제 상황을 비관하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물론 요즘은 시대가 달라졌죠. 아내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우리는 사명으로 축구를 했지만, 아들 세대는 또 달라서 축구를 즐기면서 한다고요. 맞는 말입니다. 어쨌든 축구를 위해서는 저 같은 사람도 있어야하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 방금 말씀하신 중에서도 알 수 있는데, 흔히 감독님에 대해 '축구가 인생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분'이라고 이야기들을 하세요.(웃음)

저는 축구가 전부입니다. 저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가정과 교회, 축구 뿐이에요.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수원에 와서도 6년간 있으면서 훈련장과 여기 감독실이 전부였어요. 공적인 일로 어디 가는 것 외에는 대부분 여기서 보냈죠. 그게 제 일이고, 거기에서 제 나름대로 재미와 보람을 느껴요. 물론 다른 관심사를 가져 놀이 삼아 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이렇게 한 분야에 뿌리내리고 동고동락하면서 생활하는 것도 또 다른 사는 맛이라고 생각합니다.

1986년 아들 차두리와 함께 ⓒ 일간스포츠
- 워낙 축구에 대한 열정이 크신 만큼, 언젠가는 지도자를 넘어 다른 분야에서도 많은 역할을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그것은 앞에 꼭 나서서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한국축구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FC 서울전을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비록 패하긴 했지만, 경기 전에 선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기 결과를 떠나 한국축구가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열심히 해야 한다. 경기 중단하지 말고, 고의적으로 파울하지 말고, 다쳐서 아프다고 오래 누워있지 말고, 좀 더 수준 높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축구를 해서 경기장을 찾은 팬들이 감동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으면 K-리그도 희망이 없다. 이렇게 모든 이의 관심이 쏠려있는 경기에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독일에 가기 전부터 한국축구의 근본적인 문제, 기술적인 문제를 보완해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고민했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대로 어린 선수들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차범근 축구상을 만들었고, 축구교실을 통해 저변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죠. 이제는 축구교실이 많이 확산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축구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없어졌잖아요.

만약 제가 감독을 그만둔 이후에 뭔가 다른 임무와 역할이 주어진다면 그게 무엇이 됐든, 어느 영역에서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말주변이 있는 것도 아닌데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TV 해설을 했던 것도 한국에서 열리는 잔치에 제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하게 된 것이었어요. 또한 축구팬들에게 좀 더 축구를 잘 설명한다면, 그들이 더 관심을 갖고 재미있게 축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던 것이고요.

- 다시 분데스리가 이야기로 돌아가서 독일 진출 2년 째였던 80/81시즌에는 레버쿠젠 소속이었던 겔스도르프의 악의적인 태클에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겔스도르프를 용서한다고 밝혀 독일 전역에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죠. 당시를 회상해보신다면.

굉장히 큰 사건이었습니다. 공이 없는 상황에서 겔스도르프가 무릎을 향해 가위질로 태클이 들어왔어요. 이 때 허리를 차이면서 요추뼈가 부러졌죠. 최소 6개월에서 영원히 축구를 못할 수도 있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오줌에서 계속 피가 나왔고요.

구단에서는 고소해야 한다고, 병원으로 고소장을 가져왔을 정도였어요. 저에게 사인만 하면 바로 제출하겠다고...
그런데 저는 신앙적 양심으로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고소를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이 독일인들의 마음을 건드렸던 것 같아요. 독일에서 돌아온 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독일인들을 만나면 그것을 기억하고 있고, 저를 사랑한다는 표현을 해주시곤 해요.

어쨌든 그 부상은 저에게 정말 혹독한 시련의 시작이었죠. 이후 1년간 슬럼프를 겪으면서 거의 퇴출 위기까지 갔었습니다. 마지막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회복했고, 그 덕분에 독일에서 10년을 있을 수 있었어요. 그 선수와는 화해를 했고, 나중에 제가 레버쿠젠으로 가면서 한 팀에서 뛰기도 했죠.

저에게는 시련과 동시에 전화위복의 계기도 되었던 사건입니다. 독일인들에게 화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사랑을 더 받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져 독일에 살던 한국인들도 생활에 있어서 상당한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80년대 후반 레버쿠젠 소속으로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중 ⓒ 레버쿠젠 구단
- 독일에서 진가를 발휘하자 AC밀란이나 나폴리 등의 이탈리아 명문 클럽에서도 이적 제의가 들어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83년을 끝으로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당시로서는 군소클럽이었던 레버쿠젠으로 가시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 무렵에 분데스리가는 팀마다 팬들이 감소하고, 재정 위기가 와서 선수들 연봉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어요. 구조조정을 한 것이죠. 그 때 마침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AC밀란이 관심이 있다고 해서 갔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가 친구들의 권유로 세금혜택을 볼 수 있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다세대 주택 같은 것을 샀는데, 그게 문제가 되어서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발생했었어요.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팀으로 가야 했는데, 해결할 방법이 많지 않았죠. 독일을 떠나기 힘든 상황이라 이탈리아행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독일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당시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주고, 연봉도 지금 받는 수준으로 해주겠다고 했거든요.

잠시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TV에서 분데스리가 경기를 해주는 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 좋은 축구를 배우러 거기까지 갔는데 돌아올 수는 없다. 그 문제는 거기서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런 와중에 크라머 감독이 레버쿠젠 감독이었고, 팀 강화를 위해 대대적으로 선수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제가 꼭 필요하다고 제의가 들어왔어요. 골치 아팠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준다고 했고, 또 크라머 감독이 아시아를 잘 이해하고 있는 분이셨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해서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경기도 잘했고, UEFA컵도 우승했으니까요.

- 결국 레버쿠젠에서 팀의 레전드로 군림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감독님 입단 이후 레버쿠젠이 독일, 그리고 유럽의 강자로 자리매김했죠. 그런 점에서 뿌듯함이 있으실 것 같네요.

그렇죠. 레버쿠젠은 제가 입단하기 전에는 1부리그에 턱걸이하는 팀이었어요. 운동장도 열악한 편이었고요. 그런데 제가 입단한 이후에 팀을 계속 강화시키고, 투자를 하기 시작해 어느 순간 리그 우승을 노리는 팀으로 발전했죠. 투자 4년 만인 1988년에는 UEFA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유럽 최고가 되었습니다. 그 때 우승하면서 3만석 규모의 새 경기장도 만들었고요. 이후에는 계속 리그 우승권을 다투는 팀이 되었는데, 조만간 한번 우승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 말씀하신 대로 87/88 시즌에 UEFA컵 우승을 차지하셨죠. 더군다나 에스파뇰(스페인)과의 결승전에서 매우 중요한 골까지 넣으셨고요. 프랑크푸르트에서의 UEFA컵 우승과는 느낌에서 차이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프랑크푸르트에서 UEFA컵 우승을 차지했을 때는 독일에 처음 진출했던 해였어요. 경기도 잘하고 신나게 했지만, 쉽게 우승할 수 있는 걸로 생각했었죠. 그런데 독일에서 생활하다보니 UEFA컵 우승이란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더군요. 그렇게 목마르게 기다리다가 88년에 나이가 들어서 다시 우승을 하니 그 때의 감격은 말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원정 1차전에서 0-3으로 진 뒤 홈 2차전을 맞이했는데, 2-0으로 앞선 상황에서 제가 3번째 골을 넣으면서 동률을 만들었거든요. 결국 연장전과 승부차기 끝에 우승했고요.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해서 우승을 한 것이었어요. 생각만 해도 짜릿하죠. 지금도 가끔 그 영상을 보는데, 그 기분은 설명할 수가 없어요.(웃음)

- 1989년까지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하시면서 98골을 기록하셨어요. 한때 분데스리가 외국인 선수 최다골 기록도 갖고 계셨고요. 사퓌자(스위스)나 엘베르(브라질)에 의해 최다골 기록이 깨졌을 때는 어떤 심정이셨나요?(웃음)

기록이야 깨지기 마련이니까요.(웃음) 제가 마지막 2년은 미드필더로 활동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8년 정도 공격수로 활동한 셈이거든요. 그렇게 치면 많이 넣은 거죠. 또 UEFA컵 등에서 10골을 넣었고, DFB-포칼에서도 13골 정도 넣었으니까 다 합치면 독일에서 131골 정도 넣은 것 같아요. 어쨌든 제 기록이 깨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기록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동양인이 분데스리가에 가서 그렇게 골 넣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 만약 감독님이 페널티킥을 차셨더라면 더 많은 골을 기록하셨을 겁니다. 현역 내내 페널티킥을 기피한 이유는 역시 대표팀 초창기 시절의 기억 때문인가요?(웃음)

그렇죠. 대표팀에서 실축한 것이 쇼크였어요.(웃음) 그 이후로는 페널티킥을 거의 안 찼습니다. 조금 아쉽긴 해요. 제가 이회택 선배 말처럼 좀 더 배짱 있게 했다면 더 많은 골을 넣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 욕심이란 것이 끝이 없는 거잖아요.(웃음)

인터뷰 중인 차범근 감독 ⓒ이상헌
- 그러고 보면 예전 94 미국 월드컵에서 감독님이 신문에 쓰신 칼럼을 읽은 적이 있는데요. 당시 '내가 호마리우와 같은 성격이었다면 더 좋은 스트라이커가 되었을 것'이라는 요지의 글이었습니다.

그렇죠. 사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색깔이 있고, 저는 저일 뿐이기 때문에 누구와 비교하는게 맞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호마리우 같은 성격을 갖고 이었다면 훨씬 많은 골을 넣긴 했을 거예요.

저는 기본적으로 기회가 왔을 때 완벽하지 않으면 옆의 동료에게 연결했고, 그것을 즐겼어요. 성격적으로 무조건 내가 넣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만약 호마리우처럼 좀 더 골에 대한 욕심이 컸다면 더 많은 골을 넣었겠죠. 그러나 대신 저는 골만 욕심 내는 것이 아니라 도움도 많이 했고, 스피드를 활용한 공격과 제공권도 있었어요. 기술도 없는 것이 아니었고요. 저의 이런 측면을 팬들이 기억하고 좋아해주는 것이죠.

또 하나는 제가 좀 더 어린 나이에 볼을 만졌다면 더 잘할 수 있겠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한이 되어 축구교실을 만들게 된 것이고요. 저를 아는 축구팬들은 제가 왜 축구교실을 만들었고, 거기에 애착을 느끼는지 이해할 겁니다. 적어도 한 축구인이 한국축구를 바라보고, 그 나름대로 해결하려는 노력이에요.

어쨌든 이제 한국에서도 5~6세 아이들이 볼을 차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현재 초등학교부터 리그제가 실시되고 있는데, 아주 잘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더 활성화해서 선수들이 적응하고 성장한다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달라질 겁니다.

- 첼시 연습장에 가셨을 때 발라크가 존경심을 표했던 일, 그리고 베르바토프가 토트넘 시절 이영표 선수에게 차붐에 대해 이야기했던 일, 독일 대표팀이 한국에 왔을 때 감독님에게 특별 대우를 해줬던 부분 등을 접하면 가슴 뿌듯합니다. 당사자인 감독님은 더 느낌이 남다르셨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지금도 독일 여행을 하는 한국 분들에게서 "아직도 독일에서는 차 선수가 굉장히 유명하네요"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독일인들이 분데스리가를 거쳐간 선수들을 다 좋아하고 기억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까 말했던 겔스도르프 사건이 그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독일 친구들이나 언론을 통해 성실하고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승리를 위해 90분간 열심히 뛰었고, 훈련했던 것을 피치에서 다 쏟아내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런 열정과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이름이 입에서 입으로, 아버지에서 아들에게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비록 누구 보라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를 위해 열심히 한 것이지만, 제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지도자 입장이지만 선수들에게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좋은 시대, 좋은 환경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국축구의 장래를 조금 더 염려하고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선배들을 통해 좋은 터전을 물려받았으니 이제 후배들에게 더 좋은 텃밭을 물려줘야 하지 않냐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못하고 최고의 리그, 최고의 선수들이 나만 편하고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한국축구의 미래는 없다고 이야기해요. 팬들이 경기장에 찾아올 수 있도록 좋은 축구를 해야 하는데, 좋은 축구란 훈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관리도 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스스로 변화해서 더 높은 기술을 끌어내기 위해 연마를 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것도 강조하죠. 이런 것들이 잘 이루어져 축구계가 모두 신났으면 좋겠습니다.
- > 인터뷰 3편에서 계속...

 
인터뷰= 이상헌 / 영상= 정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