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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人터뷰17 -차범근上] 한국 축구의 영원한 전설 '차붐'

정민건TV 2010. 4. 15. 05:32

 

 

[ⓜ 월드컵 人터뷰17 -차범근上] 한국 축구의 영원한 전설 '차붐'

 



< 사진출처 = 한국축구의 영원한 전설 차범근 ⓒ이상헌 >

대한축구협회(KFA) 홈페이지에서는 DAUM과 공동 기획한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는 6월까지 격주로 게재합니다.


국내 최대 인터넷포털 운영사이자 KFA 공식후원사인 DAUM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하는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는 2010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한 홍보 프로그램으로써 한국축구의 국민적 붐 조성을 꾀하고자 하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월드컵과 관련된 인물들이며, 현 대표팀 선수들을 비롯해 추억의 스타, KFA 행정인, 역대 월드컵대표팀 감독 등이 릴레이 인터뷰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특히 KFA 및 DAUM 홈페이지를 통해 축구팬들의 질문들도 수렴해 궁금한 점들을 해소시켜 드립니다. 인터뷰는 KFA 홈페이지와 DAUM 홈페이지에 기사와 동영상으로 게재됩니다.

17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한국축구의 영원한 전설' 차범근 감독입니다.

차범근 감독은 1971년 18세의 나이로 U-19 대표팀에 선발된 것을 시작으로 1972년에는 19세에 국가대표팀에 뽑혀 태국에서 열린 AFC 아시안컵에 참가했습니다. 이후 1978년까지 대표팀의 중심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그 해에 다름슈타트와 계약을 맺고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였던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습니다.

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일시 귀국했던 차 감독은 1979년 명문 클럽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했고, 그 해(79/80시즌)에 12골을 터뜨려 분데스리가 득점 랭킹 7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를 UEFA컵과 DFB-포칼(독일 FA컵) 우승으로 이끄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매년 10골 이상씩 기록하며 프랑크푸르트의 중심 공격수로 자리 잡은 차 감독은 1983년에 당시만 해도 군소클럽이었던 바이어 레버쿠젠으로 이적했고, 팀을 분데스리가의 강자로 끌어올렸습니다. 특히 85/86시즌에는 17골을 기록하며 분데스리가 득점 4위에 올랐으며, 1988년에는 레버쿠젠을 이끌고 UEFA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차 감독 개인으로서는 프랑크푸르트에 이어 레버쿠젠에서도 UEFA컵 우승컵을 들어 올린 뜻 깊은 순간이었습니다.

1986년에는 오랜만에 대표팀에 복귀해 86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해 월드 스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88/89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한 차 감독은 독일에서의 각종 제의를 뿌리치고 귀국해 '차범근 축구교실'을 만들어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후 현대(현 울산 현대, 91~94년) 감독에 이어 1997년 대표팀 사령탑에 올라 98 프랑스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중국의 선천 핑안(98~99년)에 이어 2004년부터는 수원의 감독으로 재직 중입니다.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A매치 통산 121경기에 출장해 55골을 터뜨렸으며,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는 통산 308경기에 출장해 98골을 기록해 현역 당시 '외국인 선수 최다골'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습니다. UEFA컵과 UEFA 컵위너스컵에서도 총 37경기에 나서 10골을 터뜨렸으며, 독일의 FA컵인 DFB-포칼에서는 총 27경기에 나서 13골을 기록했습니다.

1999년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 선정 '20세기 최고의 아시아 축구 선수'에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영국의 축구전문지인 '월드사커'에서 선정한 '20세기 세계 축구를 움직인 100인'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월드컵 특집 인터뷰 17번째 주자로 인터뷰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풀어놓을 이야기가 워낙 많기 때문에 바로 옛날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웃음) 처음 대표팀 유니폼을 입으신 것이 1971년 일본에서 열린 AFC U-19 챔피언십이었습니다. 경신고 3학년이셨고, 사실 축구를 늦게 시작하신 입장에서 감회가 새로우셨을 것 같은데요.

사실 축구는 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했어요.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축구부가 없어져 공백 기간이 있었죠. 그 기간 동안 다른 운동을 하다가 중학교 3학년 때 경신중으로 전학을 가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게 됐어요. 중간에 2년 반 정도의 공백이 있었던 겁니다. 공백 기간이 있어 다른 선수들에 비해 늦게 시작은 했지만, 운도 좋았고, 여러 가지로 잘 풀렸던 것 같아요. 선생님들이나 주위 동료, 선배들도 잘 만났고요.

솔직히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되었을 때도 기술적으로는 많이 부족했지만, 신체조건이나 타고난 스피드가 있으니까 장래성을 보고 기용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기량도 발전했고, 본 대회 나가서는 골도 넣고 잘했죠. 그러나 훗날 생각해보면 제가 유럽 선수들처럼 좀 더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시작해 공에 대한 적응력을 키웠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계속 있었어요. 그래서 은퇴 후에 축구교실을 열게 된 것이기도 하고요.

그 대회에서 이스라엘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셨어요. 당시 코뼈 부상도 입으셨다고 들었는데요.

71년 대회는 저 외에 김진국 전무, 조동현 감독, 주장에 김호곤 감독 등이 참가했었죠. 홈팀 일본과 준결승전에서 붙었는데, 그 경기에서 코뼈가 부러졌어요. 저는 앞으로 헤딩을 하는데, 수비수가 뛰어올라 뒤로 부딪친 것이죠. 일본전에서는 승부차기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었는데, 결국 이스라엘과의 결승전은 뛰지 못했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좋은 추억이었어요.

공교롭게도 72년에도 AFC U-19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이스라엘과 붙어 또 졌었죠.(웃음)

이스라엘은 체구 자체가 유럽이었어요. 우리보다 몸도 좋고 발재간도 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나았습니다. 실력으로 봤을 때 그들이 우승하는 것이 맞았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대로 72년 태국에서 열린 AFC U-19 챔피언십이 끝나고, 곧바로 아시안컵에 참가하는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깜짝 발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어떠셨나요?

그 때는 획기적이었죠. 옛날의 시대 상황을 보면 우리 윗 세대의 경우에도 한번 대표팀에 뽑히면 10년 정도 했다고 하더군요. 젊은 선수들이 경기를 뛰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고도 하고요. 그 때가 제가 19세였는데, 고려대에 입학하고 대표 선수가 되었어요. 제가 가장 어렸고, 그 다음이 황재만 선배였죠.

당시 대표팀에는 김정남, 김호, 이회택, 이세연, 정규풍 등 제가 늘 라디오에서만 듣던 쟁쟁한 선수들이 모두 있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긴장되고, 제가 우러러봐야 하는 그런 대선배들이었어요.

그런 선배들과 같이 공을 찬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부담스러웠죠. 저나 황재만 선배나 어렸기 때문에 선배들이 어렵고 무서워서 정신이 없었어요.(웃음) 촌놈이 서울에 와서 산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대표 선수가 되어 엄청난 선배들과 같이 볼을 차니 주눅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선배들이 운동장에서 한 마디만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 사진출처 = 1974년 아시안게임에서 대표 선수로 활약하는 모습 ⓒ한국사진기자회 >

팀의 막내이셨으니까 온갖 잡일을 다 하셨겠네요.(웃음)

아 그럼요.(웃음) 제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공 바람도 넣고, 빨래도 하고 그랬어요.

다들 훈련하고 나서 피곤하니까 자고, 저는 축구공 20~30개에 바람 넣는데 혼자 하니까 1시간 이상 걸려요. 더군다나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할 때는 빨래도 많이 했죠. 당시 세탁기가 별로 없어서 손으로 했는데, 선배들 옷까지 하니까 나중에는 손바닥이 한꺼풀 벗겨졌을 정도였어요.(웃음)

훈련을 해도 볼이 멀리 날아가면 누군가 주워와야 하잖아요. 당연히 말단인 제가 했죠. 74년 전까지, 2년 정도는 동기나 후배가 없었기 때문에 저 혼자 고생했었습니다.(웃음)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좋은 추억이에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 날도 제가 공 바람 넣는 것 담당이었죠. 그런데 그날 따라 공에 바람을 너무 많이 넣었던 겁니다. 훈련 때 이회택 부회장님이 슛을 시도했는데, 볼이 딱딱해서 발이 조금 아프셨나봐요. 그래서 저보고 공 바람도 잘 넣지 못한다고, 그것부터 다시 배우라고 하셨죠.(웃음) 공 바람을 적절하게 넣는 것도 선배들에게 배웠습니다.

이것과는 조금 다른 에피소드인데, 당시 이세연 선배님과 방을 같이 썼는데, 저를 많이 아껴주셨어요. 그런데 72년 아시안컵 크메르(현 캄보디아)전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U-19 챔피언십에 참가한 뒤에 합류했던 터라 태국 날씨에 이미 적응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선배들은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날 제가 몸이 너무 좋아서 자신 있게 플레이를 했었고, 치고 들어가서 마지막 1명만 제치고 슛을 시도하면 됐던 상황이었어요. 그 상황에서 슛을 시도했는데 제대로 맞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그 공이 살아서 깔짝깔짝 하더니만 흘러 들어가서 골이 되었어요. 경기 끝나고 이세연 선배가 저에게 오더니 "너, 볼 차는 것부터 다시 배워야겠다"라고 하시더군요.(웃음)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그러고 보니 저번 이회택 부회장님과의 인터뷰에서 대표팀에 갓 들어온 감독님께 마음 편하게 먹고 하라고 격려해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셨기에 큰 힘이 되셨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그랬어요. 그 때는 아까 이야기한대로 제가 너무 어렸고, 성격도 여려서 주눅이 들었었거든요. 그걸 보다 못한 이회택 부회장님이 "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러셨던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잘 없어요. 다들 자기 일 하는 것도 바쁘니까요. 그런데 이회택 선배는 배짱도 있고, 통 큰 축구를 하셨잖아요. 제가 너무 자신없어할 때에는 종종 붙잡고 하고 싶은 대로 플레이 하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어린 저로서는 굉장한 힘이 되었죠.

고려대 선배였던 이차만, 고재욱 선배들도 많은 이야기를 해줬고, 노흥섭 부회장님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분이 참 양반이었죠. 성격도 조용하시고, 후배들에게 부담을 안 주시는 분이었어요. 그 당시에 받았던 그런 좋은 인상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 때 선배들이 해줬던 이야기들은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워낙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 선배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죠.

74년에 후배들이 들어왔으니 그 이후부터는 공에 바람 넣고 빨래하는 일은 후배들에게 넘어갔겠군요.(웃음)

73년 말에 이영무, 김희태 등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후배들이 생겼어요. 그래도 몇 명 되지 않으니까 같이 했죠. 그 전에는 저 혼자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고, 혼자 하기는 힘든 일이니까 같이 했어요. 후배들이 들어오니까 한결 여유도 생기고 좋았습니다. 군대도 그렇고, 어디든 마찬가지잖아요. 선임이 되면 조금 편해지는 것이죠.(웃음)

72년 아시안컵 이라크와의 경기가 A매치 데뷔전이셨어요. 아무래도 청소년대표팀 경기와는 차원이 달랐을 것 같은데요. 긴장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청소년대표 시절과는 어마어마하게 달랐죠. 대표팀이란 것은 어렸을 때부터의 제 꿈이었고, 그 소망을 이루는 순간이었으니까요. 기분 좋기도 했지만, 두려움도 있었어요. 제가 저를 잘 아니까요. 내가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대도 있었고요. 여러 가지가 교차했었죠.

그 경기에서 저는 엄청나게 뛰어다녔어요. 선배들이 이름 부를 때마다 죽어라고 뛰어갔죠. 저 쪽에서 "범근아~" 부르면 거기로 뛰어가고...(웃음) 그렇게 90분을 뛰고 나니까 녹초가 되어서 유니폼도 땀으로 다 젖고, 축구화도 질퍽질퍽해졌더군요.

결국 그 경기에서 0-0으로 비겨서 승부차기를 하게 됐는데, 저도 차라는 거예요. 그래서 찼는데, 너무 긴장해서 땅을 찼어요. 볼이 또르르 굴러갔는데, 다행히 골키퍼가 먼저 찼다고 다시 차라고 하더군요.(웃음) 그런데 두 번째는 하늘을 향해 차고 말았어요.(웃음)

솔직히 그 때는 너무 많이 뛰어서 걸어가는 것도 힘들 정도였거든요. 자신이 없었는데, 선배들이 다 안찬다고 빠져서 저까지 배당이 된 거였어요. 제가 찬 볼이 하늘로 날아간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웃음)

사실 그 무렵에는 차범근 감독님의 오른쪽 측면 돌파에 이은 크로스를 김재한 부회장님이 헤딩슛으로 연결하는 패턴이 천하무적이었다고 들었는데요.(웃음)

그 당시 주로 김재한 선배가 중앙에, 저와 김진국 선배가 윙으로 있었어요. 반대쪽의 김진국 선배와는 스타일이 많이 달랐죠. 김진국 선배는 단신이지만, 기술이 굉장히 좋았어요. 수비수 1~2명 제치는 것은 예사였죠. 또 중앙으로 정확하게 킥을 해줬고, 김재한 선배가 수비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었기 때문에 제공권 싸움에서 상대가 안 됐죠.

김진국 선배가 현란한 드리블로 상대를 헤집고 들어가서 만들어주는 역할을 많이 했다면, 저는 그런 역할도 했지만 제가 직접 안으로 치고 들어가서 해결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래서 골도 많이 넣었던 것이죠.

어쨌든 그 때는 우리를 주인공으로 개사한 노래도 있을 정도로 굉장히 좋은 콤비였죠. (당시 아이들은 '떴다 떴다 비행기' 노래를 개사해 '공 잡았다 이회택, 달려라 차범근, 떴다 떴다 김재한 헤딩슛 골!'이라고 노래를 부르곤 했다. - 편집자 주)

제가 대표팀에 들어갈 무렵에 이회택 선배님이 물러나셨고, 이후에 박이천, 정규풍, 김재한 선배 등과 많이 활동했었습니다.

이회택 부회장님의 뒤를 이어 감독님께서 한국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바로 계승하셨는데요. 방금 말씀하신 대로 함께 뛰었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셨죠?

예. 짧았어요. 이회택 선배와는 많이 못 뛰었죠.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같이 뛰었던 것이 생각나네요. 당시 북한을 피하려다가 상당히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기억이 납니다. 좋은 기억으로는 브라질 산토스 클럽이 펠레와 함께 내한했을 때였어요. 우리가 2-3으로 졌는데, 이회택 선배와 제가 1골씩 넣었죠.

제가 윙에서 뛰었다면 이회택 선배는 중앙에서 스트라이커 역할을 하셨어요. 단신이지만 폭발적인 순발력과 스피드, 드리블을 갖추셨죠. 거기다가 결정력도 아주 좋으셨고요. 반면 저는 신장이 조금 있었고, 길게 길게 치고 들어가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저와 같이 대표팀에 계실 때는 부상도 있고, 나이도 조금 있어서 화려한 플레이는 하지 못하셨지만, 제가 어렸을 때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 등에서 경기할 때 많이 봤었죠.

1973년 서독 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 이스라엘과 경기가 있었습니다. 0-0인 상황에서 감독님이 연장전에서 극적인 결승골을 터뜨리셨죠. 이 골로 감독님은 그야말로 최고의 영웅 대접을 받으셨는데요. 어떤 기분이셨나요?

일단 그 전에 1972년 메르데카배에서 4명을 제치고 왼발 슛을 시도한 것이 골대 맞고 들어가면서 결승골이 되어 2-1로 승리해 우승을 차지했었는데요. 그러면서 72년 한국축구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73년에 이스라엘전이 있었죠. 제 기억으로는 연장전이었는데, 왼쪽에서 김호곤 선배가 슈팅한 것이 골대 맞고 튀어나오는 것을 제가 쇄도하면서 왼발 슛을 시도했어요. 골대 근처에 골키퍼와 수비수, 우리 선수들이 많이 섞여 있었는데, 왼쪽에 조그마한 틈이 있었고, 거기로 들어간 것이었죠.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골 감각이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당시 광화문 4거리 안에는 차가 안 다닐 정도로 온 국민이 그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을 때, 기가 막힌 타이밍에 결승골을 넣으니까 많은 분들이 저를 기억하게 되었죠. 그 경기 이후에는 시골에 가도 저를 금방 알아보더군요. 저도 뭔가 유명한 선수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를 돌이켜보면 이스라엘이나 호주 같은 팀들은 절대 이기지 못할 팀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체구도 크고, 유럽 팀과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우리보다 잘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고, 왠지 맞서면 위축이 되었죠. 그런 상대를 홈에서 잠재웠으니 정말 통쾌했어요. 국민들도 그런 통쾌함 때문에 저를 많이 기억하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골 감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큰 경기에서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는 분명 타고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만 해도 대표팀에 들어갈 때 기술도 부족하고, 볼에 대한 적응력도 많이 떨어졌었거든요. 그런데도 결정적 순간에 골을 많이 넣었어요. 꼭 이겨야하는 순간에서 제 발끝에서 골이 여러 번 나왔죠. 저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고, 신앙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만, 어쨌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결정적인 골을 넣었거든요. 대표팀에서나 독일에서나 많은 골을 기록했고, 따지고 보면 3경기에 1골 정도는 넣었어요. 그런 부분은 감각이었던 것 같아요.

서독 월드컵 아시아예선은 감독님이 처음 월드컵에 도전한 무대였죠. 이스라엘을 꺾었지만, 결국 마지막에 호주의 벽을 넘지 못해 본선 진출에 실패했었습니다.

그 경기는 정말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그 때는 어린 나이에 KFA도 원망스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꺾고 호주와의 경기만 남겨놨었는데, 원정에서의 1차전에서 0-0으로 비겼거든요. 당시 제게 결정적인 기회가 왔는데 놓쳤던 기억도 납니다.

어쨌든 한국에서의 2차전에서는 2-0으로 이기고 있다가 2골을 내주고 2-2로 비겼어요. 아쉬웠지만, 어쨌든 동률이라 홍콩에서 3차전을 하게 됐죠. 이렇게 되면 두 팀 모두 똑같은 입장이었는데, 사람들은 본선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물론 당시 KFA가 가난했고, 예산도 많이 발생했기에 그런 점도 있었고요. 그래서 홍콩에 가는 인원에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더니 선수단을 축소해서 갔어요. 그 분위기는 마치 '우리가 꼭 이길 것이다, 이겨야 한다'가 아니라 약간 포기하고 가는 느낌이었거든요.

결국 0-1로 패하면서 본선 진출에 실패했죠. 70년대의 한국적 상황이 정보나 재정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세련되지 못했고, 덜 개방적이었고, 소극적이었고, 이것이 그런 결과를 낳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죠. 어쨌든 충분히 이길 수 있었지만 실패했고, 한국축구가 조금 더 빨리 월드컵 무대 진출을 앞당길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던 겁니다. 그 때 서독 월드컵에 나갔다면 아마 분데스리가 진출이 더 빨라졌을 수도 있었겠죠.(웃음)

사실 이 무렵, 즉 70년대 초중반의 대표팀은 개개인의 능력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역대 최고의 대표팀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요. 감독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지금도 대표팀에 훌륭한 선수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70년대 참 좋은 선수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색깔이 분명하고 걸출한 선수들이 요소요소에 포진되어 있었죠. 우리가 좀 더 경험이 많았더라면 한국축구가 세계로 나가는 길을 훨씬 앞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모든 것은 지나간 과거이고, 아쉬움으로만 남는 것이죠. '돌아보면 훌륭하고 우수한 선수들이 많았다'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선수들을 잘 조련하고, 많은 국제경험을 쌓았을 때만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아쉬운 거예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저는 행운아였죠. 독일로의 길이 열렸으니까요. 그 이후에 허정무 감독, 김진국 선배, 박상인 감독 등이 계속해서 유럽무대에 진출했어요. 당시에는 길이 없어서 그렇지, 그 길만 잘 열렸다면 지금 이상으로 유럽에 갈 수 있는 선수들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올드 축구팬들은 감독님을 떠올릴 때 76년 박스컵 말레이시아전에서의 골 폭풍을 항상 언급합니다. 1-4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7분간 3골을 넣으셨죠. 이 경기를 회상해보신다면.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일어납니다. 제가 넣고 싶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 경기를 돌아보면 스스로에게도 운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당시에 0-4로 지고 있다가 제가 슈팅한 볼이 골대 맞고 나온 것을 박상인 감독이 넣어 1-4가 되었죠. 그리고 이후에 제가 나머지 3골을 넣었어요. 상대 문전에 가서 슈팅해서 골 넣고, 돌아서서 다시 들어가 슈팅하고 그랬는데, 보니까 4-4가 되었어요.(웃음)

처음에 4실점 했을 때는 관중들이 방석 던지고 야유하고, 경기장을 나간 분들도 있었는데, 불과 몇 분 사이에 3골이 들어가면서 4-4가 되어버리니까 경기장 나가다가 다시 들어오기도 하고 그랬죠.(웃음)

앞서 말했지만, 제가 넣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나 여러 상황, 이기고 싶은 마음과 욕심 등이 합쳐져 그렇게 골을 넣지 않았나 싶네요. 아무튼 그 경기 끝나고 버스를 타는데, 사람들이 제 다리를 붙잡고 "기적이다!"라고 외쳤던 기억도 납니다.(웃음)

< 사진출처 = 1978년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북한과 대결하는 장면(왼쪽) ⓒ한국사진기자회 >


서독 월드컵 예선에 이어 76 몬트리올 올림픽 예선과 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에서 모두 고배를 마셨습니다. 모두 마지막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며 아쉽게 탈락했죠. 직접 뛰셨던 입장에서는 그 아픔이 더욱 크셨을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경기에 실패했습니다. 문제는 골이 안 들어간다는 것이었어요. 찬스는 많았지만, 골을 넣지 못했죠. 그것이 우리 국민들을 화나게 만든 것이고, 축구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던 부분이에요.

저는 축구를 하면서 왜 우리가 결정적일 때마다 득점 기회를 놓쳐서 매번 골 결정력 부족, 문전 처리 미숙 등의 말을 귀가 따갑게 들어야 하는지 생각해봤습니다. 한국축구가 뭐가 문제인지 고민하다가 유럽축구를 한번 경험하고, 그 속에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독일에 가서 선수로 뛰었고, 지도자 공부도 하고, 유소년들이 어떻게 훈련하는지도 관찰했습니다.

직접 뛰고 경험하면서 느꼈던 첫 번째 부분은 역시 공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축구선수로서 공에 대한 적응력을 몸으로 습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연령대에서 축구를 하지 않고 있었죠. 우리는 보통 초등학교 4~5학년, 즉 10~12세 정도부터 축구를 시작합니다. 저 역시도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했고요. 반면 유럽은 5세 정도부터 시작하죠.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문전에서 그들과 똑같은 골을 넣을 수 있겠어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생활체육축구회에서 동호인들이 축구를 하는데, 선수들이 하는 것을 다 흉내 내고 똑같이 합니다. 그렇지만 선수들과 달리 뭔가 부자연스러워요. 왜 그러냐면 기본적으로 축구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골프를 봐도 우리가 지금 해도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선수들과는 감각이나 폼이 조금 다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저는 유럽축구를 경험하면서 스스로에게 찾은 해답이 볼에 대한 적응력을 키울 수 있는 연령대에 아이들에게 볼을 주고 축구를 가르쳐야겠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우리도 초등학생 이전으로 축구 시작하는 연령대를 낮추고, 이들에게 기본기와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어릴 때 볼을 만진 아이들이 훨씬 자연스럽다는 거죠.

그래서 어린 연령대부터 축구를 하게 만들고, 기본기를 가르치고, 유럽처럼 리그제를 통해 계속 연마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한국에 돌아와서 축구교실을 열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행히 이제는 축구를 시작하는 연령대가 점점 내려가고 있고, 축구교실도 전국으로 확산되어 있어요. 또한 최근 들어 우리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모두 리그제로 바뀌었는데, 아주 환영할 만한 일이에요. 앞으로 지역리그제를 더 활성화해서 경기력을 끊임없이 키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 사진출처 = 1979년 분데스리가 진출 환송 경기에서 고려대 OB로 출전한 차범근 ⓒ서울신문 >


이제는 본격적으로 독일 분데스리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미 많이 알려진 것이지만, 독일 진출 과정이 매우 복잡하셨죠. 다름슈르트와 계약해서 경기도 뛰었지만, 군 복무 문제로 인해 귀국하셔야 했어요. 이 때는 정말 난감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 과정이 상당히 복잡했죠. 제가 공군에 자원입대했는데, 당시 공군 복무는 삼군 중에 가장 길었거든요. 그래서 다들 공군으로는 안 갔죠. 그런데 그 무렵에 타군과 똑같은 조건으로 복무 기간을 해준다는 약속 때문에 입대하게 됐어요. 제가 1976년 10월에 입대했으니까 78년 12월이 제대였던 거죠. 정상적으로 복무를 하면 79년 5월이 제대였고요. 그래서 독일행을 추진했고, 다름슈르트와 가계약을 맺고 1경기를 뛰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처음 약속과는 달리 제 복무 기간이 79년 5월 30일까지로 결정되는 바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름슈르트와 6개월간 가계약을 했던 것이고, 당시 저는 군인 신분으로 소속팀이 없었기 때문에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저를 사서 대신 계약해주는 형태였거든요.

그런데 제가 군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와 버리니까 문제가 커졌습니다. 계약 위반인데다가 선수도 사라져버렸으니까요.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다행히 6개월 후에 제대를 하고 6월 22일에 출국해서 브레멘과 프랑크푸르트에서 테스트를 받고, 결국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원래 생각하고 있었던 프랑크푸르트로 가시게 된 거네요. 결과적으로는 일이 잘 풀린 셈이었군요.

그렇죠. 결국 원래 가려고 했던 팀으로 간 셈이죠. 사실 독일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78년 박스컵에서 프랑크푸르트 아마추어 팀이 내한했었거든요. 거기에 슐테라는 코치가 있었는데, 저를 보고 독일에 올 생각이 없냐고 물었어요. 마침 저도 독일행을 꿈꾸고 있었고요.

그런데 당시 분데스리가는 외국 선수를 한 팀에 2명만 보유할 수 있었는데, 이미 프랑크푸르트는 오스트리아 국가대표인 페차이와 스위스 국가대표인 엘스너가 있었죠. 그래서 저를 당장 데려갈 수 없었고, 대신 앞서 말했던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저를 사서 다른 팀과 6개월간 계약해서 뛰다가 프랑크푸르트로 데려간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군 문제로 한국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런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죠. 이후에 브레멘과 테스트를 받는 등 일이 복잡해진 상황에서 다행히 엘스너가 팔리면서 프랑크푸르트와 계약할 수 있었어요.

공군에서 연장 근무를 했던 5개월여 동안에도 한국에서는 '보내야 한다, 보내지 말아야 한다' 의견 대립이 있었고,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저에게 역적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고, 국가를 배신하고 간다는 반응이 많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어요.

< 사진출처 = 1980년 프랑크푸르트 팀의 일원으로 금의환향 ⓒ서울신문 >

동양에서 온 무명의 선수를 대하는 팀 동료들의 태도가 무척 차가웠을 것 같습니다. 입단 초기에 적응하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그건 저 뿐 아니라 다들 경쟁자였기 때문에 당연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프로를 접한 것이 처음이었는데, 그 전까지는 아마추어적인데다가 동양적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죠. 그러나 독일은 자기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무대였어요. 특히 제 경우에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경험하고, 내 영역을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죠. 실패를 거듭하면서 곁눈질로 보면서 배워나갔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동물의 세계와 같았어요. 먹고 먹히는 잔인한 세계였죠. 저는 그 표현이 조금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빼앗고, 내주고, 사라지는 그런 현장을 옆에서 목격하면서 이 무대가 얼마나 냉혹하고 처절한지를 깨달았습니다. 거기에 독일인들의 성향 자체도 상당히 냉정하고 차갑기 때문에 정을 붙이기 어려웠고요.

그래도 저는 참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좋은 친구들을 많이 얻었어요. 지금도 프랑크푸르트의 유소년 팀을 담당하고 있는 쾨르벨, 팀의 선수를 보강하고 스카우트하는 일을 맡고 있는 휠첸바인, 나흐트바이..이런 친구들이 아직도 거기서 일하고 있는데, 제가 어려울 때 많이 도와준 친구들이에요. 니켈 역시 마찬가지고요. 휠첸바인이나 니켈 같은 선수는 서독 국가대표이기도 했죠.

그런 친구들이 저를 도와주고, 힘도 실어주고, 제가 골 넣으면 함께 기뻐해주고, 실수하면 어깨를 쳐주면서 격려해주고, 자기 일처럼 챙겨줬어요. 정말 고마운 친구들이죠. 이런 친구들이 없었다면 저는 그런 냉혹한 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겁니다.

플레이 측면에서는 어떠셨나요? 이전에 상대하던 수준과는 월등히 다른 선수들과 대결을 펼치셔야 했는데요. 아시아 최고로 평가받았던 감독님의 폭발적인 돌파가 잘 통했는지요?


우선 공포감이 있었어요. 돌파해도 빨리 따라와서 바로 태클이 들어왔거든요. 태클 자체도 다른데, 우리가 걷어내는 태클이라면, 이들은 감으면서 볼을 빼앗는 태클이에요. 또한 수비수들의 다리가 길기 때문에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태클 영역이 넓었고요. 굉장히 정교하게 볼을 다루지 않으면 볼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어요. 또 슈팅이나 패스 타이밍도 더 빨리 가져가야 했고요.

그렇게 계속 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런 상황에 적응해가기 시작하더군요. 드리블도 더 정교하게 하게 됐고요. 많은 부분에서 새롭게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뛸 때에는 주로 서서 패스를 받았는데, 독일에서는 움직이면서 볼을 받지 않으면 패스가 오지를 않았어요. 패스하고 움직이는 상황에서 계속 플레이가 진행되기 때문에 경기 템포도 굉장히 빨랐고요. 문전에서도 볼을 잡아서 슈팅해서는 골을 넣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죠.

훈련 습관도 달라 고생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2시간 넘게 훈련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에너지를 나눠서 쓰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죠. 그런데 독일은 훈련이 90분 정도만 하기 때문에 그 안에 모든 것을 다 쏟아내야 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뭔가 부족해보여 더 훈련을 하다가 근육이 늘어나고 과부하가 걸리곤 했었어요.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시간이 지나니까 적응을 하게 되었죠. 독일 진출 후 4년째에는 전 경기를 모두 뛰기도 했고요.

< 사진출처 = 프랑크푸르트 시절 DFB-포칼(독일 FA컵)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차범근 ⓒ프랑크푸르트 구단 >


한국에서는 주로 오른쪽 윙을 보셨잖아요. 스트라이커로의 변신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대표팀에서는 주로 윙포워드의 개념으로 뛰었는데, 이후 독일에 가서는 중앙 스트라이커로 뛰게 됐죠. 독일에서는 3-5-2 포메이션을 많이 썼는데, 전방 투톱 중 한 명으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현역 마지막 2년 정도는 미드필더로 뛰었고요.

일단 제가 워낙 스피드가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 팀들을 상대로는 윙 역할로 충분했어요. 그것만으로도 통했으니까요. 그런데 독일 가서는 스트라이커로 뛰어야 했고, 빠른 것만으로는 통하지 않았죠. 그런 면에서 상당히 어려웠지만, 반대로 그런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부분도 있었어요.

당시 유럽에서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라고 하면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만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답답한 면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원래 윙포워드 출신이기 때문에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는 측면으로 나와 스피드를 살려 드리블을 시도했어요. 그런 부분이 잘 통했고, 팬들도 많이 호응을 해줬죠. 결국 대표팀에서 윙포워드로 플레이했던 경험이 유럽에서 스트라이커로 활동하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시야나 경기운영의 폭을 넓혀줬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개인적으로 공격수로서의 감각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대표팀에서든, 프랑크푸르트에서든, 레버쿠젠에서든 대략 3경기당 1골 정도는 넣었으니까요.

적응이 어려웠다고 말씀하셨지만, 입단 첫 해에 12골로 분데스리가 득점 7위에 오르셨습니다. 더군다나 UEFA컵과 DFB-포칼(독일 FA컵) 우승컵을 들어올리기도 하셨고요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처음부터 이렇게 좋은 성과를 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요.

사람이 새로운 상황에 접하게 되면 정신력이나 긴장감이 강해지기 때문에 그런 차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가 문제이죠. 제 경우에는 꿈에 그리던 무대로 간 것이었잖아요. 분데스리가에서 뛴다는 자체만으로 너무 감격스러웠고, 그렇기 때문에 높은 집중력으로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국에서 대표 생활을 오래했던 만큼 국민들의 응원과 격려도 많았고, 젊었기 때문에 기가 충만했어요. 젊은 선수가 기가 살면 막기 힘들잖아요. 그 기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첫 해에 버틸 수 있었어요. 사실 당시에는 UEFA컵에서 우승한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하고 힘든 일인 줄 몰랐어요.(웃음) 88년에 레버쿠젠에서 2번째로 UEFA컵 우승했을 때에야 이게 얼마나 힘들고 값진 일인지를 알게 됐죠.

그러나 다음 해에 요추를 다치는 중상을 입어 고생하면서 1년 정도 슬럼프를 겪었어요. 회복한 후에도 적응을 잘 하지는 못했죠. 사실 슬럼프를 겪을 때에는 정말 볼을 처음 차는 사람처럼 헤맸어요. 마음 고생도 컸고, 어려움도 많이 당했죠. 거의 좌초 위기까지 갔었습니다. 3년째 되면서부터 그런 부분에서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년차 들면서 15골을 뽑아내고, 85/86시즌에는 17골을 터뜨리면서 독일의 한 언론에서는 저를 '분데스리가 최우수선수'로 선정하기도 했죠.

- > 2편에 계속...

인터뷰=이상헌, 영상=정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