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준희 샤우트풋볼201] 트로피 운이 없었던, 역대 최강팀 헝가리!
-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은 어디일까 (4) -
1.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
- 21세기형 토털 풋볼의 결정체. 극도로 조직적인 압박, 패스&무브, 극도의 볼 점유를 통한 공격 축구. 리오넬 메시와 스페인의 중추 선수들 포진.
2. 리누스 미켈스의 아약스
- 축구사의 패러다임 전환. 압박, 전진 수비, 포지션 파괴를 통한 유기적인 공간 메우기, 볼 점유를 통한 공격 축구. 크라이프라는 ‘브레인’이 전체의 움직임을 이끌었다.
3. 아리고 사키의 밀란
- 공간 통제로서의 압박. 압박 전술의 현대적 정교화. 타이트한 간격 유지. 매순간 상황에 따른 전체 선수들의 위치 이동. 체력이 요구되는 공격 축구. 오렌지 삼총사 및 이탈리아의 명선수들이 포진.
(지난 회에 이어)
위 세 팀은 모두 ‘토털 풋볼’의 사조 하에 발전해온 공격 축구의 족보를 형성.
4. 구스타프 세베스(1949-1956)의 헝가리
- 토털 풋볼에 의한 공격 축구의 ‘원조’, ‘원형’, ‘초기 버전’과도 같이 여겨질 수 있는 팀. 특히 공격수들 간의 위치 바꾸기 전술 및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공격 축구의 측면에서 그러하다. 축구의 새로운 차원을 연 팀.
- ‘매직 마자르’, ‘마이티 마자르’, ‘골든 팀’ 등으로 불림.
- 세계 축구사에서 실력에 비해 트로피 운이 가장 없었던 애석한 팀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이 헝가리(크라이프의 74년 네덜란드 팀보다도 더 애석했다는 생각). 54년 월드컵 준우승. 52년 올림픽 우승. 하지만 이 헝가리야말로 트로피의 숫자와는 상관없이 역대 최강의 강력한 후보로 손색 없는 팀.
- 대 오스트리아 6-1(1949), 대 스웨덴 6-0(1952), 대 잉글랜드 6-3(1953), 대 잉글랜드 7-1(1954), 대 서독 8-3(1954), 대 브라질 4-2(1954), 대 우루과이 4-2(1954).
- 웸블리에서 벌어진 잉글랜드와의 대결은 ‘세기의 대결’로 불렸던 관심사. 국제 대회의 중요성을 경시해왔기는 하지만 그래도 ‘종가’ 잉글랜드는 여전히 손가락에 꼽히던 강자. 헝가리와 잉글랜드의 “과연 누가 더 강한가” 대결에서 헝가리는 잉글랜드를 큰 차이로 무너뜨리며 종가의 자존심을 짓밟음. 축구사적 의미가 매우 컸다. 영국 바깥의 팀으로서 처음으로 잉글랜드 안에서 잉글랜드를 무너뜨린 팀으로도 기록됨.
- ‘베른의 전투’로 불렸던 54년 월드컵 브라질 전(기대만큼의 명경기가 아니라 사실은 반칙과 난투극으로 점철됐던 한 판), 직전 월드컵 챔피언 우루과이와의 연장 접전(54년 월드컵 최고의 경기)에서 모두 4-2로 승리했던 헝가리. 우루과이는 월드컵 본선에서의 첫 번째 패배를 헝가리에 당했다. 헝가리는 우루과이를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꺾은 사상 첫 번째 팀이자, 비남미 팀으로는 처음 우루과이를 꺾은 팀이 되기도 했다. (헝가리는 소련 원정에서 소련을 꺾은 첫 번째 팀이기도 함.)
- 따라서 헝가리는 브라질, 우루과이, 잉글랜드를 첨예한 실전 경기에서 모두 무너뜨린 명실상부 당대의 ‘비공인 챔피언’으로 불려도 전혀 무리가 없다.
- 헝가리의 놀라운 기록. 1950년 6월부터 1954년 7월의 월드컵 결승전 이전까지 32경기 연속무패(28승4무). 이것은 훗날 브라질, 스페인의 35경기 기록으로 갈아치워진다. 서독과의 결승전에서 패한 이후에도 헝가리는 19경기 연속 무패를 다시 이어가기도 했다.
- 서독과의 결승전(2-3 역전패)은 헝가리로서는 통한의 한 판. 당시의 서독은 조별리그에서 시드를 받지도 못한 팀이었고 이미 헝가리에 3-8로 대패를 당했다. 하지만 그 조별리그 경기에서 에이스 페렌치 푸스카스가 서독의 태클에 심한 발목 부상을 입었던 것이 헝가리로선 천추의 한. 그 결과 푸스카스는 이후의 경기들에서 실력만큼 제대로 뛰기가 어려웠다. 이것 이외에도 이 결승전은 여러 가지로 논쟁을 불러일으켰음. 하지만 서독의 입장에서 이 경기는 ‘베른의 기적’으로 남았고, 향후 독일 축구의 끈질긴 역전극 전통을 이끌어낸 원조가 됨(이전 샤우트풋볼 대역전극 시리즈 참조).
- 당시의 헝가리는 축구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는 팀. 마르톤 부코비, 벨라 구트만(밀란, 벤피카 등 지도), 그리고 세베스와 같은 헝가리 지도자들은 모두 당대의 손꼽힐만한 전술적 귀재들이었을 뿐 아니라 4-2-4 포메이션의 선구자들이다. 헝가리가 발전시킨 4-2-4 포메이션은 특히 이후의 브라질 팀의 성공에 영향을 미침.
- 특히 헝가리는 ‘처진 스트라이커’라는 혁신적 개념을 도입, 성공리에 활용한 것으로 괄목할 만하다. 중앙 공격수(9번) 히데쿠티(히데쿠티 이전에 이 역할을 소화한 선수는 팔로타스)가 공격수들 뒤쪽으로 내려와 미드필드에서의 볼 공급과 찬스메이커 역할을 맡곤 했는데 히데쿠티의 이러한 움직임은 경직된 ‘WM 포메이션’을 사용하는 팀들의 수비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푸스카스, 코치슈, 치보르 등이 히데쿠티가 빠져나온 공간을 십분 활용했다.
- 또한 헝가리는 선수들 간의 위치 바꾸기에 있어서도 능수능란한 모습을 선보였는데 이러한 측면들이 훗날의 ‘토털 풋볼’을 이끄는 원형이라 할 만하다.
- 헝가리는 전술적으로도 다른 팀들을 앞섰지만 선수들 개개인의 기량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했다. 왼발의 달인 푸스카스는 ‘매직 마자르’ 해체 이후 레알 마드리드의 ‘원조 갈락티코’에 합류, 레알의 성공에 커다란 공헌을 했으며 1960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무려 4골을 터뜨리기도 한다. 코치슈와 치보르는 바르셀로나로 옮겨 활약했다.
- 따라서 당시의 헝가리는 브라질 축구, 토털 풋볼, 레알 마드리드의 성공 등에 이르기까지 이후의 축구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친 팀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 헝가리의 이러한 성공을 이끌어낸 클럽은 ‘혼베드’였다. 혼베드는 우리의 ‘상무’와 같은 개념의 군 팀. 푸스카스를 비롯한 헝가리 주력 선수 다수를 포함하고 있었던 혼베드에서 세베스 감독은 마음껏 자신의 전술적 실험을 수행할 수 있었다. 혼베드는 대표 팀에 대한 영향력과 공헌도가 가장 컸던 축구사의 몇몇 클럽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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