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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부르짖던 광장을 스타벅스와 맞바꾼 고려대! 왜 문제일까?

정민건TV 2009. 7. 24. 07:02

*ing Produce a Sensation  *

 Produced & Writed By 김연정

     Video Edited By 정민건

 

상업시설과 거대 자본의 캠퍼스 침투가 문제인 이유?

 

  백과사전의 정의를 따르면 대학(大學)의 의미는 ‘여러 학문 분야를 연구하고 지도자로서 자질을 함양하는 고등교육기관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이 갖는 의미가 과연 사전에 정의된 그것과 같은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오늘날 대학은 과연, 사전에 정의된 것처럼 여러 학문 분야를 연구하고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는, 순수한 고등교육기관인가? 아니, 사전적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과연 오늘날 대학 공간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자유, 진리, 정의를 이야기하는 학교. 그 학교의 공간은 어떻게 급격하게 변화했을까.

 

 

- 1980년 3월, 전두환 정권의 학생 강제 징집 교련반대 집회 -

 

 

- 1980년 10월 17일,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학내 시위 -

 

 

- 1984년,"고대의 문은 아무나 열 수 없습니다" 민주화 총회 후 경찰의 진압을 막는 학생들 -

 

 

- 1986년, 6월 항쟁 광장 집회 -

 

  

- 2009년, 학생들의 광장 대신 범접할 수 없는 깔끔한 잔디밭으로 대체된 광장 -

   

 

스펙터클과 소비의 공간으로서의 대학  - 학교 안에 광장이 사라진다

  

대학 공간의 변화들

 

물론 대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차적으로 교육을 담당한다. 그러나 더 이상 학문을 위한 공간만은 아니다. 오히려 대학은 욕망을 자극하는 소비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으며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상품이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추세와도 같으며 몇몇 대학을 중심으로 이러한 현상은 가속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학 캠퍼스 내 각종 상업 시설이 들어선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각종 편의점과 패스트푸드점, 커피 전문점이 들어선다. 은행과 피씨방, 당구장이 들어선다. 그런데 경쟁 상업 시설을 제치고 특정한 시설이 들어설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좀 더 직접적으로, 고려대학교에는 왜 은행 중에서는 하나은행만이 들어서 있는 것일까.

 

 

 

필자가 안암동의 대학을 입학했을 때,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던 고학년 선배는 참 좋은 때에 입학했다고 신입생들을 부러워했다. 그의 말을 회상해보자면 몇 년 전만해도 학교는 휑했으며 시설도 지금만큼 좋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필자가 입학한 이후로도 학교는 거침없이, 그 어느 때보다도 역동적으로 변화했다. 교내에 스타벅스가 들어섰고 영풍문고가 들어섰으며 ‘막걸리 대학’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만큼 럭셔리한 호프집이 들어섰다. 조금이라도 낡은 건물은 헐어져 새로 지어졌고, 빈 공간에는 화려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민족’의 학교라며 맥도널드가 학교 근처에 들어서는 것조차 반대했다던 대학의 이야기는 신화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뿐만이 아니다. 대학 내 건물의 이름에는 언제부터인가 기업의 이름이 붙는다. 왜 고려대학교의 100주년 기념관은 ‘삼성관’으로 일컬어지며 경영대는 ‘LG-POSCO'관으로 불릴까? 왜 기숙사 명칭은 ‘CJ’가 되었고, 과학도서관 앞 건물은 ‘하나스퀘어’가 되었을까. 이것은 물론 해당 기업이 건물을 짓는 데 자금을 댔기 때문이다. 삼성의 경우 90년대 서울대 호암관을 시작으로 연세대 120주년 도서관에 이르기까지 약 1000억원에 이르는 기부금을 지원하였으며 LG 역시 고려대 LG-POSCO경영관을 비롯하여 총 600억원 가량을 지원해왔다.

이러한 기업의 기부는 물론 명목상으로는 교육 여건 개선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 문자 그대로 기업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교육 환경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기업 이미지 제고와 홍보효과 정도가 있지 않을까 라고 짐작한다면 좀 낫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기업은 때때로 자신들이 원하는 인재를 ‘맞춤형식 생산’해줄 것을 원하기도 하며, 때로는 모든 재학생이 그들의 주거래 고객이 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기업은 결코 아무 곳에나 투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만한 곳에 투자한다. 기업의 기부금을 받는 대학, 그 대학 공간에서 맞춤형 교육을 받고 특정 기업의 주요 고객으로 거듭나는 학생, 원하는 인력과 고객을 제공받는 기업 간의 이해관계는 교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졸업을 했지만 필자의 주거래 은행은 여전히 하나은행으로 남아있다.

 

비단 기업의 자본만이 대학에 침투한 것은 아니다. 몇몇 부유한 개인의 자본도 대학에 스며든다. 강의실, 휴게실에는 기부자라 일컬어지는 고귀한 뜻을 가진 개인의 이름이 붙여지고 심지어 책상과 의자에까지, 그들의 고귀한 이름은 새겨진다. “이 라운지는 이명박 교우님의 고귀한 뜻과 정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라는 친절한 안내 문구를 보면서, 재학생들은 호텔 로비만큼이나 고급스러운 휴식 공간을 제공해준 사람에게 잠시나마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경영대에는 고귀한 뜻을 지닌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경영대로 가는 길에는 에스컬레이터도 설치되어 있다.

 

 

 

 고대 경영대의 자랑, 명박 라운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대학은 이제 스스로를 광고(advertising)한다. 광고란 무엇인가? 기업이나 개인, 단체가 상품, 서비스, 이념, 신조, 정책 등을 세상에 알려 소기의 목적을 거두기 위해 투자하는 정보활동이다. 대학은 이제 시장에 놓인 하나의 상품과도 같다. 일차적으로 교육을 담당하지만 그 자체로 자본주의 시장에 놓인 하나의 물품이다. 그렇다면, 대학이 사설 학원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대학은 사설 학원처럼 원하는 학생 모두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대학은 학원보다 우위에 선다. 제한을 통한 선별적 접근 가능성은 그나마 대학을 존재하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일단 우위를 확보한 대학은 접근 가능한, 잠재적 고객들의 욕망을 자극하기를 원하고 그들의 욕망이 소비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또 그들이 원하는 맞춤형 졸업생을 산출해내고자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 고대생들은 만족할 만한 대학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단지 광장을 잃었을 뿐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어쨌든 학생들은 혜택을 받고 있지 않은가. 좋은 시설, 대기업과의 연계. 좋은 시설 속에서 공부하고 싶어도 지원해주지 않는 대학이 넘쳐나고, 실업률 높다는 지금, 기업에서 알아서 맞춤형으로 우리를 계발시켜준다니, 좋지 아니한가. 부끄럽지만 이것이 고려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필자의 생각이었고 최소한 내가 아는 범위 내의 친구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졸업 후 학교를 다시 찾았을 때, 캠퍼스에서 만난 후배들은 이전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상관도 없는 기업이 학교에 100주년 기념관을 지으라고 후원해주니 고맙다, 내 친구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거다, 라는 답변.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일차적으로는 넘쳐나는 상업시설과 대학 공간 내 개인, 기업 차원의 거대 자본의 침투가 문제시된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상업시설과 거대 자본의 침투가 대학 공간을 궁극적으로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좀 더 섬세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 상업시설과 자본의 침투를 허락한 대학. 그 중심에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와 시장, 기업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자 하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자리한다. 학교는 이제 ‘돈이 되는 학문’을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면서 실용 학문을 중점적으로 육성한다. 여러 학문 분야를 연구하는 고등 교육기관이라지만 초점은 분명 돈이 되는 학문, 실용적인 학문에 있다. 과를 막론하고 영어 강의가 확대되었으며 민족을 버리고 조국을 등지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앙광장이 들어선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단지 상업시설이 넘쳐난다는 것이 아니다. 학교 내 실질적인 ‘광장’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중앙광장은 ‘광장’이 아니다. 그것은 지하에 조성된 소비 공간에 불과하다. 한 목소리를 내기 위한, 거리로 뛰쳐나가기 위한 광장은 노트북으로 웹서핑을 즐기는, 우아한 피아노 연주를 선보이는 삼성 라운지로 대체되었고, 흙먼지를 날리던 땅은 정기적으로 관리되는, 수입 잔디로 대체되었다. 물론 잔디는 보호되어야 할 곳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공간의 변화 속에서 대학생들의 정치적 실천은 점차 설 곳을 잃었고, 과거 대학을 특징짓던 광장 정치 또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한 때 데모를 많이 한다고 횡단보도조차 만들어주지 않고 지하도를 만들어놓았다던 학교. 그러나 오늘날 그 곳에서 학생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실천 행위는 엉뚱하거나 혹은 피해를 주는 행위가 되어버린다. 집회를 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은 잘 다듬어진 잔디밭이나 호텔과 같은 로비가 아니다. 집회에는 광장이 필요하다.    

 

  

화려한 대학 캠퍼스. 잘 다듬어진, 세련된 공간의 모습은 그 기저에서 작동하는 은밀한 변화들을 가려버린다. 무엇이 은폐되었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공간의 자본주의화라는 표면적인 변화들만이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데 있다. 공간의 자본주의화에 수반된 근본적인 공간의 변화를 읽어낼 필요를 느꼈다.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공간에서 신자유주의의 중심으로. 그 변화의 중심에는 시장과 기업의 논리가 있고, 투쟁을 원천 봉쇄하는 화려한 건물들이 있다. 그리고 그 변화에 순응해가는 오늘의 대학생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