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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人터뷰3 -김주성上] 90년대 아시아를 호령했던 야생마1

정민건TV 2009. 9. 30. 11:01

 

[ⓜ 월드컵 人터뷰3 -김주성上] 90년대 아시아를 호령했던 야생마1

 

대한축구협회(KFA) 홈페이지에서는 Daum과 공동 기획한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는 내년 6월까지 격주로 게재합니다.
'월드컵 특집 릴레이 人터뷰'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과 대표팀 경기의 홍보를 위해 국내 최대 인터넷포털 운영사이자 KFA 공식후원사인 Daum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하는 홍보 프로그램으로서 한국축구의 국민적 붐 조성을 꾀하고자 하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 대상은 월드컵과 관련된 인물들이며, 현 대표팀 선수들을 비롯해 추억의 스타, KFA 행정인, 역대 월드컵대표팀 감독 등이 릴레이 인터뷰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특히 KFA 및 Daum 홈페이지를 통해 축구팬들의 질문들도 수렴해 궁금한 점들을 해소시켜드립니다. 인터뷰는 KFA 홈페이지와 Daum 홈페이지에 기사와 동영상으로 게재됩니다.

세 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90년대 한국축구의 간판 스타였던 김주성(43) KFA 국제부장입니다.

 

 

김주성 부장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대표팀 내 최연소 선수로 참가해 3경기를 모두 뛰었고, 이후 1988년 서울 올림픽과 AFC 아시안컵을 거치면서 한국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88년 아시안컵에서는 대회 준우승을 차지하고도 MVP를 수상하며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라운드의 야생마', '아시아의 삼손' 등의 별명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김 부장은 이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좌절을 맛보기도 했지만, 89년부터 91년까지 '아시아 올해의 선수'를 3년 연속 수상하며, 명실공히 아시아 최고 선수임을 과시했습니다. 3번째 월드컵 출전이었던 1994년 미국 월드컵에는 팀을 조율하는 베테랑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으며, 96년 AFC 아시안컵을 마지막으로 대표팀과는 작별을 고했습니다. 통산 A매치 77경기에 출장해 14골을 기록 중입니다.
한편 프로무대에서도 발군의 활약을 펼쳐 1987년 대우(현 부산)에 입단해 신인왕을 수상했으며, 1991년에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1992년에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보쿰에 진출해 94년까지 2년간 활약했으며, 이후 부산에 복귀해 스위퍼로 변신해 제 2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1996년 K-리그 베스트11에 수비수로서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으며, 1997년에는 부산을 리그 3관왕으로 이끌며 K-리그 MVP와 베스트11을 석권했습니다.
1998년에는 '20세기를 빛낸 아시아 최고의 선수'에 차범근 현 수원 감독에 이어 2위에 선정됐으며, 1999년에도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며 노익장을 과시했습니다. 99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김 부장은 학업에 열중했고, 이후 KFA 국제부에서 축구행정에 힘쓰고 있습니다.

 

- 이렇게 월드컵 특집 人터뷰에 초대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월드컵 7회 연속 진출로 조금 여유가 생기셨을 것 같은데, 근황은 어떠신지요?
선수들이 잘해줘서 월드컵 7회 연속 진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축구인으로서 기쁘게 생각하고, 지금 시점에서는 월드컵 본선에서 우리 대표팀이 잘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예선 기간보다 더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 그럼, 첫 월드컵이신 86 멕시코 월드컵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A매치 첫 출전이 1985년 월드컵 아시아 2차예선 인도네시아전이라고 들었는데요. (김석원과 후반 교체투입)
선수로서 감회가 새로웠죠. 모든 선수들이 다 똑같은 마음일 겁니다. 다들 대표팀이라는 큰 꿈을 갖고 축구를 하는 것이고, 저로서는 처음 성인 대표팀에 뽑혔던 거라 긴장을 많이 했죠.(웃음) 더군다나 잠실운동장이라는 큰 경기장에서 많은 관중들 앞에서 데뷔를 했기 때문에 자부심과 영광, 보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부담감이 컸던 경기였습니다.

- 당시 대표팀의 왼쪽 윙에는 김석원이라는 재능이 뛰어난 선배가 있었는데, 경쟁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데뷔전도 김석원 선수를 대신해 후반에 교체투입된 것이고요.
사실 그 때는 경쟁에 대한 생각보다는 대표 선수가 됐다는 것 자체로 희열과 보람을 느꼈어요. 김석원 선배는 그 전까지 워낙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제가 경쟁해서 주전을 꿰차겠다는 욕심은 없었죠.
더군다나 제가 중앙고 다닐 때 은사님이 김찬기 선생님이셨는데, 바로 김석원 선배 아버님이셨어요. 공교롭게 은사님 아드님과 같은 포지션에서 경쟁하게 된 것이었죠.(웃음) 어쨌든 당시에는 경쟁이라는 생각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기량만 다 보여주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각오가 컸습니다.

- 김석원 선수가 부상 등으로 대표팀에서 물러나면서 대표팀의 왼쪽을 책임지셨고, 엄청난 관심을 받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갑작스런 스포트라이트로 어리둥절하셨을 것 같기도 하네요.
저는 학창 시절에 청소년대표팀에 거의 뽑힌 적이 없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일반팬들에게 알려질 기회는 없었죠. 그러다가 1985년 대통령배 국제대회에서 88 대표팀에 선발되어 대외적으로 알려졌고, 그 대회에서 좋은 경기를 보여주면서 월드컵대표팀에도 발탁됐어요. 저로서는 감회가 새롭죠. 아마 팬들 입장에서도 기존 선수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선수가 숨은 재능을 발휘해 나타났다는 점에서 더 관심이 쏟아지고, 성원도 컸던 것 같습니다.

- 86 멕시코 월드컵에는 최연소로 참가하셨습니다. 그 당시 멤버들이 대단했던 터라 주눅이 들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사실 대표 경력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표 선수가 됐다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이고,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어요. 더군다나 당대 최고의 선수들, 최고참이셨던 차범근 선배님을 비롯해서 조광래, 박창선, 조영증 선배님, 그 밑으로는 변병주, 최순호, 정해원 선배님 등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된 팀에서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죠.
그런 선배들과 같이 훈련하면서 주전 경쟁을 위해 선의의 경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제 자신의 축구 발전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팀의 활력소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월드컵의 선수 구성도 좋지만, 86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한 대표팀의 선수 구성이 가장 좋았다고 생각해요. 신구의 조화를 이루면서 최고의 멤버로 구성되지 않았나 싶어요.

- 제가 생각해도 정말 좋은 멤버였습니다. 만약 이 팀이 국제무대에 대한 경험만 있었다면 더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축구를 비롯해 모든 운동이 학문적으로 공부하거나 연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경험보다 좋은 학습이 없습니다. 당시 우리는 세계무대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고, 선수들도 월드컵의 비중이나 인식, 가치 등을 느끼지 못한 채 참가했어요. 세계축구의 정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참가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죠. 이런 부족한 부분들이 계속 축적되었기 때문에 2002 월드컵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다고 봅니다.

- 꿈의 무대인 월드컵에서의 첫 경기가 마라도나가 버티는 아르헨티나였습니다. 경기장에 들어서서 아르헨티나를 상대한 느낌이 궁금합니다.
마라도나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맞서서 체험한 적은 없었잖아요.
사실 마라도나는 멕시코 월드컵 전까지만 해도 팀에서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월드컵에서는 성과가 없었어요. 멕시코 월드컵이 마라도나 인생의 과도기였고, 그 대회를 통해 꽃을 피웠죠.
한국으로서는 강력한 우승후보이자 당대 최고의 선수가 포함되어 있는 팀과 월드컵 첫 경기를 한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실질적으로 그런 부분이 몸에 와 닿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고, 우리도 아시아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나왔기 때문에 하면 된다는 각오와 의지가 더 강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아르헨티나는 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저로서는 월드컵 첫 경기에서 그런 훌륭한 팀, 훌륭한 선수와 경기를 했다는 것 자체가 결과를 떠나 축구 인생에 있어 좋은 경험이었고, 평생 기억에 남을 경기였습니다.

- 사실 당시 우리 대표팀은 마라도나를 막기 위해 전담 마크맨을 두면서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죠.(웃음)
마라도나는 축구 역사를 통틀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우수한 선수였잖아요. 스피드와 드리블, 골 결정력 등 선수로서의 모든 능력을 갖춘 선수였죠. 또 그런 능력들을 멕시코 월드컵을 통해 유감없이 보여줬기 때문에 전세계 축구인과 팬들이 최고의 선수로 꼽을 수밖에 없었고요. 우리도 그를 잡기 위해 처음에는 김평석 선배님을 전담 마크맨으로 붙였는데, 결국 실패했어요. 그리고 허정무 감독님까지 마라도나를 마크하려고 애쓰셨죠.

- 멕시코 월드컵에서 대표팀 최연소의 나이로 3경기 모두 선발 출장하셨고, 더군다나 이탈리아전을 제외하고는 풀타임 출장이셨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그렇게 신임 받은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으로는 큰 영광이었습니다. 대선배들 틈에서 선발로 나간 것이니까요. 스스로 평가한다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젊은 선수를 기용한다는 것은 젊은 선수만의 패기와 지칠 줄 모르는 체력 등을 인정받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 다른 분들은 경험이 많고, 연령적으로 절정기였던 선수들이 많았지만, 젊은 선수가 갖는 장점이 필요했던 시점이라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신구의 밸런스를 통해 팀 전력을 극대화시킨다는 생각이셨을 거예요.

- 2차전 불가리아전은 엄청난 수중전이었습니다. 월드컵 사상 첫 승점을 올렸던 기념비적인 경기이기도 했는데요.
우리 팀으로서는 불가리아를 반드시 꺾어야 16강에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각오가 남달랐습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전보다 더 공격적인 형태로 경기를 하려고 생각했어요. 그날 비가 많이 와서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체력적인 부분에서 승부가 갈렸던 것 같아요.
우리가 먼저 실점하고, 마지막에 친구인 김종부 선수가 교체 투입되어 동점골을 뽑았죠. 결국 체력전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조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역전골까지 기대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죠. 경기에 대해서 후회는 없지만, 그래도 이 경기를 잡았어야 하는데라는 아쉬움은 컸습니다.

- 이탈리아전에서 후반 시작과 함께 정종수 선수로 교체되었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아무래도 체력적인 부분에서 떨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이탈리아 역시 전 대회였던 82 스페인 월드컵에서 우승한 팀이었고, 이 대회에서도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였죠. 그 팀을 상대로 후회없는 경기를 펼쳤습니다. 외신들이나 팬들도 '이탈리아를 상대로 한국이 선전했다'는 평가를 내려줬고요.
개인적으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물론 교체를 당하는 것이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저에게 주어진 시간에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 만족해요. 당시 체력적인 부분이나 경기리듬 면에서 조절을 했어야 하는데, 경험이 부족하다보니까 의욕이 너무 앞서서 체력적 부분에 대한 밸런스가 깨졌던 것이 교체의 요인이었던 것 같네요.

- 멕시코 월드컵을 마친 뒤, 가장 뼈저리게 느낀 부분들은 무엇입니까?
가장 처음 느낀 것은 세계무대에서 한국이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 레벨의 팀들과 실전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죠. 그래야만 월드컵에서도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개인적인 부분인데, 월드컵을 통해서 이제 한국이나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선수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생겼죠.

- 월드컵이 끝난 뒤, 최고의 주가를 기록하면서 스카우트 파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유공과 먼저 계약을 맺었다가 파기하고, 나중에 대우와 계약을 맺은 것으로 인해 문제가 있었는데요.
사실 프로에 입단할 시점에 많은 논란이 있었어요. 저 뿐 아니라 동기인 김종부 선수도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렸었죠. 어리다보니까 계약 등의 법적인 부분에 대해 전혀 몰랐었어요. 또 지금처럼 에이전트가 있는 시절도 아니었기에 스스로 의사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해야 하는데, 어린 나이에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죠. 그런 부분들이 스카우트 파동에 휩싸이게 된 이유입니다. 다행히 슬기롭게 헤쳐 나갔고, 당사자인 두 구단이 대승적인 차원에서 배려를 해줬기 때문에 잘 마무리할 수 있었죠.

- 어떻게 보면 비슷한 경우였던 김종부 선수가 결국 그 일로 인해 선수 생활의 공백기를 가지면서 이후에 기대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행운이 따랐던 것 같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김종부 선수는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해요. 대표팀 시절에도 룸메이트였고요.
제가 대학 2학년 때 스카우트 파동을 먼저 체험했고, 김종부 선수는 4학년 때 문제가 있었죠. 대표팀에서 같은 방을 썼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제가 먼저 경험했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해줬는데, 사실 진로를 결정한다는 것이 고통스런 부분이에요. 대학생의 나이에 경험이 없고, 판단 능력이 부족하거든요.
선수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고, 누가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쉽게 빠질 수 있었죠. 개인적으로 김종부 선수의 문제는 안타까워요. 지금도 가끔씩 통화를 하면서 옛날 이야기들을 하곤 해요. 김종부 선수의 경우 83년 멕시코 U-20 월드컵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펼쳤었고, 차세대 대형 스트라이커로서 많은 기대와 사랑을 받았던 선수였는데, 그 파동으로 인해 꽃을 활짝 피우지 못했다는 점은 정말 아쉽습니다.

- 김 부장님이 입단할 당시의 대우는 초호화군단이었습니다. 마치 대표팀에서 뛰는 것과 같은 느낌도 받으셨을 것 같네요.(웃음) 경쟁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요?
저는 경쟁을 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시 젊었고, 꿈도 갖고 있었고, 도전 의식도 있었어요. 도전 의식은 제가 살아가는 목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부딪치는 것을 좋아했었죠. 대우에 들어가게 된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모두 있는 팀이었고, 거기서 내가 한번 승부해야겠다는 각오가 컸죠. 안주한다는 마음보다는 최고 선수들 틈에서 기량을 펼쳐 보이고 싶었고, 경쟁하고 싶었던 의욕이 강하게 작용했죠.
또한 그런 훌륭한 선배들과 같은 팀에서 뛴다는 것은 저에게도 보람 있는 일이었고요. 지금 생각해도 훌륭한 선배들과 한 팀에서 같이 뛸 수 있었다는 점, 제가 그런 결정을 내린 점에 대해서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해요.

- 88년 서울 올림픽을 지나면서 대표팀에서도 최순호 선수와 함께 간판 스타로 자리 잡았습니다. 인기를 실감하셨는지요? 잘생긴 외모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웃음)
잘생긴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제가 잘생겼다고는 감히 이야기하지 못하겠네요.(웃음)
젊은 학생팬들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는데요. 당시만 해도 여성 분들이나 일반 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에 대한 감정 표현이 소극적이었었죠. 그러나 여중고생들은 자기 우상에 대해 관심과 응원을 적극적으로 표현했어요. 제가 프로에 입단할 무렵에 고교생이나 젊은 팬들이 운동장을 많이 찾아줬고, 관심을 보여주셨죠. 그것이 전체적인 축구 응원문화나 관중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프로에 입단하면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어요. 저는 아마추어와 프로는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기량적인 측면에서 프로다운 경기력을 보여줘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외에도 선수들의 상품가치나 개성을 어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제가 머리를 기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많았지만, 그것도 저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라고 받아들였어요. 많은 질타도 받았지만, 당시 젊은 시절이었고,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시작했습니다.

- 88년 서울 올림픽 이야기를 잠시 해보면 참 아쉬움이 많은 대회였습니다. 당시 금메달을 땄던 소련과 1차전에서 비기면서 조 예선 통과에 대한 기대도 컸었거든요.
한국에서 열린 대회였고, 86 멕시코 월드컵을 경험하고, 86 아시안게임에서도 우승하는 등 경험을 쌓으면서 올림픽에서는 뭔가 일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멤버들도 최상으로 구성되었고요.
어느 대회보다 올림픽에 대한 기대가 컸고, 선수들도 확신을 갖고 준비했죠. 많은 시간을 태릉선수촌에서 정말 열심히 훈련했어요. 결과적으로는 조 예선을 통과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아요. 우리 기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면 그렇게 아쉽지 않았을 텐데, 우리가 투자한 시간과 선수들의 기량 등을 고려할 때 조 예선 통과는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컸습니다.
당시 첫 경기가 결국 우승을 차지했던 소련이었는데, 0-0으로 비기면서 출발이 좋았어요. 2차전이 미국이었고, 승부수를 던졌죠. 그 경기에서 승리를 챙기지 못한 것이 결국 탈락으로 이어졌죠. 대회를 나가서 경기를 하면 리듬이란 것이 있거든요. 경기마다 상대에 따라 전략적으로 변화하는 부분도 필요하고요. 그런데 그 때까지도 국제경험이 부족했기에 우리는 그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경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좀 더 전략적으로 상대팀들을 대응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 월드컵에서 맞붙었던 아르헨티나와 올림픽에서도 부딪쳐서 1-2로 지면서 조 예선 통과가 좌절됐는데요.
아르헨티나와의 마지막 경기는 우리가 반드시 이겨야 진출할 수 있는 막다른 골목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공격적 형태로 전개했어요. 경기에 나설 때부터 골을 넣어야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초조함이 커졌죠. 득점을 위해 안정적인 수비보다는 앞으로 나갔고, 결국 경기 종료 직전에 실점을 내주면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 90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아시아 최강임을 확실하게 증명한 대회였습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는데요.
한국이 아시아 최강의 팀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했었죠.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종이 호랑이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월드컵에 출전하는 나라들을 보면 대부분이 세계 빅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요. 반면 우리는 그러지 못했죠. 물론 아시아에서는 최상의 선수들이었지만, 세계로 놓고 봤을 때는 종이 호랑이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세계 레벨에서의 경험이 전혀 없었죠. 지금은 그 때와는 달리 우리 대표팀도 많은 선수들이 빅 리그에서 뛰면서 경쟁력을 갖추지 않았습니까.
당시 우리 선수들은 아시아에서 최고 기량을 보여줬고, 모든 사람들이 한국이 아시아 최강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실제로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통해 다른 아시아 국가 선수들과는 기량에서 한 수 앞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그런 상태로 월드컵에 나갔기 때문에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어요. 그런 자만심도 월드컵 본선에서 부진했던 요인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기량적 측면에서도 세계적 선수들과의 차이를 실감했지만, 가장 큰 부분은 우리가 최상의 멤버라는 생각을 갖고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세계 무대를 노크했다는 것이에요. 어쨌든 한국축구발전을 위해 좋은 경험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해외 언론들도 '김주성을 주목하라'는 식의 기사를 여럿 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해외 클럽들의 관심도 증폭되었고요. 그런 상황들이 부담스럽지는 않으셨는지.
심적인 부담감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86 멕시코 월드컵이 끝나고 세계무대에 나가고 싶다는, 세계적 선수가 되기 위해 도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90 이탈리아 월드컵은 개인적으로는 승부처와 마찬가지였거든요. 그 동안 아시아 무대에서만 뛰었지만, 이제 세계를 노크하겠다는 목표 의식을 갖고 참가했어요. 나를 평가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대회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결과가 너무 미흡했기 때문에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좌절도 있었어요.

- 사실 김주성이라면 세계에서 통할 수 있을 거라고 모두 기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점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일단 축구는 11명이 하는 단체경기입니다. 개인이 아니라 11명이 얼마나 조화를 이루면서 최대의 경기력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하죠. 각자의 기량이 합쳐져 11명의 선수들이 혼합해서 기량을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했어요.
무엇보다 선수들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최고의 팀들과 경기를 해봤어야 하는데, 월드컵 본선에서 맞붙은 팀들과 비슷한 수준의 팀들과의 경기를 한번도 해보지 못했었죠. 그런 레벨의 경기 경험이 전무하다보니 실제로 맞붙었을 때 대처능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결국 90분 내내 우리 선수들이 갖고 있는 기량을 30%도 발휘하지 못했죠. 팀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우리의 기량을 100% 발휘하지 못한 면이 컸어요.

- 이탈리아 월드컵은 현지로 너무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시차 적응부터 문제가 되었고, 실제로 1차전이었던 벨기에전에서 가장 무력한 경기내용으로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만 해도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선수들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이라고 생각했지 외적인 부분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우리도 선수들이 노력하는 부분 외에 외적으로 준비하는 부분들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많은 준비를 하지 않습니까.
당시만 해도 시차에 대한 적응력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고, 영양적인 측면이나 훈련의 과학화, 선수 개개인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준비 과정 등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다른 팀들은 이런 부분들을 다 준비했는데, 우리만 단순히 경기의 기술적인 부분에서만 준비해나간 것이죠.

- 이 무렵에는 최순호 선수가 플레이메이커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대표팀의 양대 스타로서 서로간의 경쟁의식 등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왔는데요.
물론 경쟁의식은 갖고 있었어요. 자기 발전이나 팀의 발전을 위해서는 경쟁의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히딩크 감독이 선수간의 경쟁의식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팀 전력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고요.
물론 부정적 의미의 경쟁의식이냐 아니냐의 문제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최순호 선배가 정말 훌륭한 선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런 선배를 뛰어넘어봐야겠다는 긍정적인 경쟁의식이 있었던 것인데, 외부에서는 그것이 부정적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죠.
어쨌든 저는 동기유발을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했지, 단순히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경쟁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존경하는 선배이고 개인적으로도 가깝게 지내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있을 때에도 불편한 마음은 없었습니다. 사실 주위에 훌륭한 선수가 있다는 것은 자기 발전과 성장에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최고가 되면 만족도와 앨범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죠.

 

- 벨기에, 스페인전 연패 이후 마지막 우루과이전은 가장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습니다. 우루과이전을 앞두고 팀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국제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이 실전을 통해서 일취월장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선수들이 세계축구에 대한 적응력이 향상된 것이 마지막 우루과이전에서 좋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 같아요. 세계축구흐름과 경기운영에 대한 흐름 등에 대한 적응력이 높아지다 보니 우루과이전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기량을 최대한 많이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1-2차전에서는 우리 선수들이 100%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기대했던 분들에게 실망감을 줬었죠.
우루과이는 당시 루벤 소사나 프란세스콜리 등 세계적인 선수들이 있는 팀이었고, 그런 팀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보여줬다는 것은 우리가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기량 이상을 바란다면 욕심이고, 우리가 갖고 있는 기량을 최대한 보여준 것에 만족해요

 

- 사실 이탈리아 월드컵을 통해 해외진출을 노리겠다는 의지를 갖고 계셨던 걸로 압니다. 그 때문에 경기내용과 결과 면에서 더 아쉬움이 크셨을 것 같은데요.
스스로에 대한 평가부터 해야겠죠. 일단 저는 제가 갖고 있는 기량들을 끌어올리지 못했어요. 세계무대에 노크하기 위해서는 제 상품 가치를 입증시켜야 하는데, 스스로의 잠재력을 최대한 표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가장 크게 실감했던 것은 국제무대에서의 경험을 더 많이 가지는 것만이 저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점이었어요. 유럽무대에 진출하는 것을 가시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 2편에 계속

 

인터뷰= 이상헌 / 영상= 정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