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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준희 샤우트풋볼243] 과학 축구의 선구자 디나모 키에프!

정민건TV 2011. 10. 15. 04:26

 

 

 

[ⓜ 한준희 샤우트풋볼243] ‘과학 축구’의 선구자 디나모 키에프!

- 최정상 밟지 못한 역사의 강호들 (2) -

 

* 지난 샤우트풋볼 ‘돈 레비의 리즈 유나이티드(1967-75)’에 이어...

 

최고의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한 세계 축구사의 대표적인 강호, 의미 있는 강호가 바로 우크라이나 명문 디나모 키에프. 특히 소비에트연방(소련) 시절 발레리 로바노프스키 감독 휘하에서 여러 가지 측면의 업적을 남김.

 

2. 로바노프스키의 ‘제 2기’ 디나모 (1985-1986)

- 세계 축구사의 역대 명장들 가운데 한 사람 발레리 로바노프스키(1939-2002)는 세 차례(1973-82, 1984-90, 1997-2002)에 걸쳐 디나모 키에프의 감독 역임. 두 차례는 소비에트 연방(소련) 시절, 마지막 한 차례는 독립된 우크라이나 시절. 로바노프스키가 지휘봉을 잡은 세 번의 시기 동안 디나모는 빼놓지 않고 클럽 역사상 위대한 팀들을 탄생시켰다. 세 차례의 디나모 시기 동안 로바노프스키가 차지한 트로피는 무려 30개에 이른다.

 

- 로바노프스키의 유명했던 세 팀은 1975년 컵위너스컵과 UEFA 슈퍼컵을 거머쥐었던 팀(젊은 올레흐 블로힌 및 아나톨리 콘코프, 레오니드 부리악, 빅토르 콜로토프, 미하일 포멘코, 블라디미르 문티안, 예브게니 루다코프 등이 활약했던 팀), 그리고 ‘영혼의 짝’ 안드레이 셰브첸코, 세르게이 레브로프로 대표되는 90년대 후반의 팀을 포함한다. 로바노프스키의 첫 번째 팀은 바이에른 뮌헨(프란츠 베켄바워가 활약한 팀)을 슈퍼컵에서 두 차례 꺾었던 바 있고, 세 번째 팀도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바르셀로나(97년 두 차례 대결에서 놀라운 3-0, 4-0 승), 아스널(98년 3-1), 레알 마드리드(99년 2-0)과 같은 클럽들을 격파하며 선풍을 일으켰다.

 

- 그러나 트로피의 개수를 떠나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주목을 받을 법한 팀은 1986년 컵위너스컵을 차지했던 로바노프스키의 ‘제 2기’ 디나모다. 이 당시의 디나모는 컵위너스컵 결승에서 루이스 아라고네스가 이끄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3-0으로 완벽하게 눌렀는데, 특히 디나모가 펼쳐 보였던 축구 스타일 자체가 화젯거리가 될 만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는 우선 로바노프스키가 추구하던 축구가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 ‘토털풋볼’ 계보의 최대 혁명가는 6,70년대 아약스의 리누스 미켈스, 그리고 80년대 후반 ‘콤팩트 축구’를 구사한 밀란의 아리고 사키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털풋볼’ 류의 컨셉이 미켈스, 사키의 전유물인 것은 결코 아니다. 압박, 지역 방어, 유기적인 위치 바꿈, 포지션을 불문한 선수들의 보편적 의무, 오프사이드 트랩의 활용, 볼 점유의 중요성 등과 같은 토털풋볼의 개념들은 사실상 미켈스 전후, 사키 전후에 다른 이들, 다른 팀들에 의해서도 시도되고 구사된 바 있었다. 그러나 미켈스와 사키가 각각의 시대의 최대의 혁명가로 인정받는 이유는 미켈스와 사키가 그 개념들을 가장 세련된 형태, 가장 완성된 형태, 가장 집대성한 형태로 운용했을 뿐 아니라, 그들로 인해 이 개념들이 유행이 되고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또한 아약스와 네덜란드, 밀란이 그러한 축구로써 ‘역대 레벨’에서 다뤄져야하는 자타공인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는 사실도 그러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미켈스, 사키 만큼 축구사를 수놓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축구사의 다른 몇몇 지도자들과 더불어 발레리 로바노프스키야말로 이 ‘토털풋볼’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클럽 디나모 키에프 또한 마찬가지다.

 

- 로바노프스키의 중요한 배경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축구와 학업을 병행하면서 학업 면에서도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다는 것. 특히 수학에 재능이 뛰어나 키에프 폴리테크닉 대학에서 공부했던 인물이다. 놀랍게도 그는 선수로서도 소련의 슈퍼스타였는데, 특히 그가 선수 시절 보여준 ‘바나나킥’은 당시의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흥미로운 것은 그는 선수 시절부터 자신의 수학적, 동역학적 지식과 원리들을 자신의 축구 기술 연마에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로바노프스키는 ‘축구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과학적인 선수이자 지도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로바노프스키는 축구 또한 ‘동역학적 시스템’으로 해석했다. 그에게 있어 축구에서 중요한 것은 선수 개개인이 아니라, 선수들을 구성요소로 지니는 시스템 전체였다. 축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전체가 강해야 한다. 당대의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출발한 로바노프스키의 이러한 생각은 결국 아리고 사키의 축구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 로바노프스키는 뜻을 같이 하는 몇 명의 조력자들과 더불어 통계적 모델링을 기반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선수들의 각종 플레이들에 대한 세밀한 통계 자료는 선수들에 대한 지도와 압박의 근거를 제공했다. 매 경기에 앞서 선수들에게는 세부적인 전술적 역할들이 할당됐고, 그 역할들을 수행할 수 있게끔 선수들에 대한 개별적 기술지도 또한 뒤따랐다.

 

- 로바노프스키는 선수들의 그라운드 밖 행동들에 대해서도 엄격한 과학적 관리를 했던 지도자였다. 선수들의 영양관리, 식이요법과 같은 것이 시행됐고 선수들의 ‘회복’ 또한 중요한 과제였다. 이러한 부분들은 요즈음 축구에서는 보편적인 요소들이라 할 수 있지만 로바노프스키의 시대에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로바노프스키는 ‘과학 축구’의 선구자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 로바노프스키의 스타일은 당시 발전하고 있었던 컴퓨터 공학 및 소련의 과학적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로바노프스키의 스타일이 소련으로부터 언제나 사랑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디나모 키에프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