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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구연 쓴소리단소리15] 허구연, 최고 선수 시절에서 부상까지...

정민건TV 2008. 11. 28. 07:03

   *ing Produce a Sensation  * 

 

   By 정민건 (ing)

 

[허구연 쓴소리단소리15] 허구연, 최고 선수 시절에서 부상까지...

 

Posted by Yagoora

 

Interview 1

 

11월 초에 종영된 '베토벤 바이러스'는 생활에 쫓기면서 꿈을 포기한 현대인들에게 꿈을 가진다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김명민이 연기한 강마에의 시니컬한 독설은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마에니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내고 있을 정도이다. 사람들이 강마에의 빈정대는 듯한 독설에 환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독설이 원리원칙에 입각한 쓴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야구계의 강마에와 같은 존재가 허구연 해설 위원이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로 MBC에서 해설을 하고 있는 그는 미국식 야구 용어를 정립시킨 것을 시작으로 해서 경기 시간이나 구장 등 야구 인프라 등에 대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일반인들에게 허구연 위원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평소와는 달리 감성적인 해설로 인기몰이를 했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은 실패나 좌절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또는 빈틈을 찾기 어려운 관계로 재미없다거나 인간미가 없다거나 등 다소 과소평가되는 경향도 없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야구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로 잘나가던 그는 경기 중에 입은 부상으로 유니폼을 벗을 수밖에 없었는 좌절과 1986년에는 청보 핀토스의 감독으로 데뷔했다가 15승 2무 40패라는 처참한 성적만을 남긴 채 중도 하차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좌절과 아픔 속에서 그는 자포자기하지 않고, 대학원 진학이나 메이저리그로의 연수 등을 통해서 또 다른 꿈의 실현으로 발전시켰다. 확고한 야구관과 함께 항상 꿈을 꾸는 인물이 바로 허구연 해설 위원이라고 생각한다.

 

이하의 글은 지난 11월 26일에 허구연 해설 위원이 대표로 있는 KSN(Korea Sports Network)의 사무실에 행한 인터뷰이다. 1편은 선수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고, 2편에서는 해설가나 감독 등을 맡게 된 경위나 한국을 대표하는 야구 행정가로서 한국 야구의 각종 제도에 대한 견해로 정리하였다. 인터뷰에서 허구연 해설 위원은 수시로 " 너무 자기 자랑같아서 말하기가 곤란하다. " 고 겸손하셨지만, 분량 등을 고려해서 대부분 뺐음을 밝혀둔다.

 

▶ 소년 허구연 야구를 만나다


원래 운동에 소질이 있었습니까.

 

-제가 운동을 정말 잘했어요. 달리기라던지 던지기라던지 넓이뛰기라던지 그때는 체력 테스트같은 것을 하잖아요. 그거 하면 일등을 했으니까요.

 

야구를 초등학교 5학년 때에 시작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계기는.

 

-야구를 하게 된 동기가 정말로 우연치않게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부산시장이 전 학교가 다 나오는 부산시 초등학교 야구대회를 열었어요. 그래가지고 기존 야구 팀이 부산 대신 초등학교에 있는데도 " 각 반에서 1명씩 나와서 테스트를 받아라 " 는 말이 나왔는 모양이예요. 그래서 담임 선생이 " 우리 반에서 너가 제일 잘하니까, 나가봐라 " 고 했어요. 그때까지 야구선수를 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그냥 그 테스트를 했는데, 아마 굉장히 잘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감독이 기존 야구 팀이 있는데도, 감독을 비롯해서 교장, 교감 등이 우리집에 와서 드러눕다 시피 " 야구를 시켜라 " 고 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2년만 하는 것으로 해서 시작했어요.

 

집에서 반대도 심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부모님은 처음에 " 왜 야구를 시키느냐고 지금은 공부를 해야되는데 " 라고 반대를 했어요. 나도 반에서 공부를 잘했어요. 5남 1녀 중에서 4째인데요. 형들이 예를 들면 상대, 공대, 그리고 법대 이렇게 가기를 아버님이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야구를 하라고 난리가 나니까 집에서도 승락했어요.

 

야구를 처음하시는데도 두각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너무 제 자랑같아서 말하기가 좀 그렇지만, 기존 야구 선수들이 있는데도 바로 제가 4번타자를 했어요. 그런데, 우리 학교가 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부산에서 제일 야구를 잘하는 팀이예요. 고 이상호 감독님이 생전에 " 야구를 하면서 너같은 넘 처음봤다고, 어떻게 (야구를) 하자마자 잘하냐 " 고 말씀하시기도 했는데, 6학년 때에도 우승을 했어요.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계속 야구를 하셨는데.

 

-당시에는 특기생 제도가 없어서 경남중학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어요. 경남중학교가 전국에서 알아주는 야구를 잘하는 학교잖아요. 교장과 교감이 " 야구를 하라 " 고 또 난리였어요. 그 때는 꽤 고민을 많이 했어요. 결국 가족 회의까지 해서 그래도 학교에서 소질이 있다고 하니까 야구를 한번 해보라고 해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초등학교, 중학교 때 그 때가 굉장히 중요했고, 그런 가운데 중학교 때 공부를 다한 후에 야구를 한 것이 저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어떤 의미에서는 순탄한 야구 생활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는데 후보 생활을 안해봤어요. 전국대회 우승팀인 경남중학에 들어가서도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어요.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어떻게 보면은 후보들의 심정을 몰랐던 경우가 많아요. 청보 감독을 할 때도 제가 몰랐어요. 청보 감독 그만두고 나서 탁 느낀 것이 '나는 역시 부족한 것이 참 많구나'였어요.

 

어떤 부분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왜냐하면, 저는 못하는 선수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사실 현장에서 보면 이해가 잘 안되는거죠. 왜 저런 플레이를 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런 것들이 좋은 것만은 아니고, 좋은 지도자가 되려면 풍파도 겪어보고 어려움도 당해보고 부상도 극복해보고 그런게 필요한 것 같아요. (웃음) 그러니까 청보 감독도 1년만에 쫓겨났죠. (웃음)

 

▶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2루수로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바로 4번타자를 치셨죠.

 

-네 그랬죠. 그런데, 사실은 저를 좀 알고 있는 분들도 그렇고 대부분이 제가 장타력을 갖춘 2루수로만 알고 있는데 다리도 상당히 빨랐어요. 대표 팀에서 100m, 50m 달리기를 하면 이해창씨 다음이었고, 제가 도루를 실패한 경우가 대학 4년 동안 거의 2, 3번에 불과했어요. 고등학교 때도 상업은행 시절에도 홈스틸도 성공시킨 적도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아무래도 제가 고대를 나왔으니까 고대와 연대의 정기전이죠. 저뿐만이 아니라 고대나 연대 출신들은 입학할 때부터 정기전은 무조건 이겨야한다고 하니까, 그 게임들은 다 기억에 남죠.

 

연세대에는 김봉연씨가 중심선수로 활약하지 않았나요.

 

-김봉연씨가 저보다 좀 후배이지만, 참 잘했어요. 방망이만이 아니라 투수로도 대단했죠. 야구에 대한 소질이 특별했던 것 같아요. 그 때 커브볼 던지면 쉭쉭 하고 (들어가고), 노히트노런도 기록했고.

 

그 노히트노런을 다른 팀도 아닌 고려대를 상대로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73년도 춘계리그로 기억하는데 김봉연씨에게 완전히 틀어 막히면서 1 : 0으로 패했어요.

 

허구연 위원이 생각하는 본인의 전성기는 언제였습니까.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야구에서 가장 잘했던 것이 74년도였던 것 같아요. 74년도에 내가 상을 많이 받았어요. 각 분야 별로 받는 스포츠 10걸에서도 야구쪽에서는 받았고, 그 다음에는 각종 대회의 MVP 등을 수상했어요. 그리고, 그 해에 대학선발팀이 일본에 원정을 갔는데, 처음으로 1무를 제외하고 다 전승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패로 돌아오고 굉장히 잘했죠.

 

대학을 졸업하시고는 한일은행에 들어가셨는데.

 

-제 야구 인생에서 가장 큰 터닝포인트로 두 세차례가 있는데, 그 첫번째가 75년에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였어요. 왜냐하면 대만에 대표팀이 가서 경기를 하고 왔는데, 이건 별로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때 제가 2루수를 보고 유격수가 강문길 단국대 감독, 1루에는 강병철 전 감독 등이었어요.

타이베이에서 첫 게임을 하는데, 강문길 등 내야수들과 라운딩을 하는데, 원아웃을 딱 시키고 (내야) 한바퀴 딱 돌잖아요. 공이 오는데 탁 잡으려고 하는데 싹 빠져버렸어요. 이걸 나는 예사로 생각했어요. " 이상하다. 공이 가까운데서 너무 빠르게 던졌나 " 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 뜻밖의 부상으로 벗을 수밖에 없었던 유니폼


몸에 이상이라도 있었던 것입니까.

 

-의대 다니는 친구가 있었는데, 집에 놀러와서 이야기하다가 지금도 손에 드러나지만 아 글쎄 (왼손이) 안움직이는거예요. 이상하다 그러면서 지금도 그렇지만 왼손이 홀쭉하잖아요. 그래서 병원에 갔죠. 그리고, 그 친구는 의대 다니니까 시험을 해봤어요. 바늘로 콕콕 찌르니까 여기 감각이 없는 거예요. 이게 측골 신경 부전 마비래요. 서울 대학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니까 빨리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어요.

 

현역으로 뛰는 상황에서 수술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때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정말로 많이 했는데요. 왜냐하면 곧 아시아 선수권 대회가 봄에 있는데, 내가 지금 그 대표팀에서도 중심타선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제가 좀 잘 아는 기자분에게 한번 물었어요. 상의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 지금 야구를 너가 잘하는데, 괜히 국내에서 하는데, 그 아픈 몸으로 하다가 잘못하다가는 망가지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차라리 수술을 하고 안하는 것이 좋겠다 " 고 해서, 제가 고심한 끝에 수술을 했어요.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 저는 안나가건죠.

 

1976년에는 현역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불의의 부상을 당하셨는데.

 

-그렇게 하고 나서 회복된 후에 다시 야구를 시작해가지고 76년 되어가지고 일본 올스타가 왔어요. 일본 올스타가 와서 한국 올스타와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역시 뭐 인간지사 새옹지마나 호사다마나 그런 이야기하는데 역시 뭔가 올 때 큰일이 있을 때는 그런 뭐 인스프레션(영감)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그 때는 제가 집이 고향이 진주니까 신체검사를 받으러 진주에 갔다 온다고 일주일정도 야구를 못했어요. 연습이 중단이 된거죠. 그러고 선발 팀에 뽑혔는데 김응용 그 당시 한일은행 감독이었고, 대표 팀 감독이 농협의 허정규씨였어요. 그래서 김응용감독이 " 허구연이가 지금 연습을 못했다. 신체검사로. 그러니까 많이 뛰게하지 말라. " 고 그런 부탁을 하셨어요. 그런데, 딱 나가니까 허정규 감독이 타순을 1번타자로 넣었어요. (웃음)

 

부상 당하기 전까지의 상황이 어땠나요.

 

-전 지금도 기억이 선한데, 건데 일본 올스타 팀이 굉장히 강했어요. 실업야구 팀이지만. 우리가 첫날 1 : 0으로 이겼어요. 유일하게 그 친구들이 11번인가 해가지고 유일하게 1패를 당했는데 1번타자인 제가 첫타석에서 홈런을 딱 쳐버렸어요. 그래가지고 윤동복 투수하고 어떻게 해서 하여튼 1 : 0으로 이겼어요. 그 다음 날 또 하는데 또 1번타자로 첫타석에서 또 홈런을 쳤어요. 그 다음날 아마 제가 기억하기로는 4 : 1로 졌을꺼예요. 4 : 2인가. 그리고, 3차전이 대전으로 갔는데.

건데 뭐 그게 큰일이 닥치려고 한 것인지 하여튼 대전으로 가기 전날 잠이 안오는거예요. 이상하게 잠이 자꾸 깨고 그러더라고요. 대전에 버스를 타고 내려가가지고 지금처럼 사실 조명시설이 있고 그랬으면 나이트게임하고 괜찮았겠죠. 그럼 괜찮은데 쉬고하면 되고. 그런데 내려가서 하도 몸이 이상해서 내가 안하던 짓을 많이 했어요. 샤워를 하고 나갔어요. 7월 말이니까.

 

부상을 당하신 상황을 자세히 말씀해주신다면.

 

-게임을 뛰는데 이게 막 힘이 드는거예요. 그래서 나는 야구를 하면서 체력이 매우 강한 선수로 분류가 되었는데, 막 힘이 부치더라고요. 그래서 허정규 감독님한테 " 감독님 죄송하지만 (내가) 몸이 너무 지쳐있어니까 좀 빼달라 " 고 중간에 그랬어요. 허감독이 " 야 너가 지금 제일 잘 뛰는데 한번만 더 쳐라 " 고 그랬어요. 그러고 나가서 주자가 1, 2루 있는데 타구가 3-유간으로 갔어요. 3루수와 유격수로 갔는데 (유격수인) 조윤식씨가 수비를 굉장히 잘했어요. 조윤식씨가 딱 잡아서 나는 3루로 던지라고 했어요. " 서드 " 이랬는데 조윤식씨가 갑자기 세컨드로 던지는 거예요.

그 때 내가 멍했기 때문에 진짜 본헤드 플레이를 한거고. 그러고 1, 2루 상황에서 3루에서 1루로 올 때처럼 내가 1루수처럼 뻗어서 (잡아야하는데), 나도 모르게 일단 더블플레이하는 것처럼 딱 잡은 거예요. 더블플레이를 하는 그런 스탭을 딱 밟으니까, 이 1루 주자는 3루로 던질 줄 알았는데 이쪽에 와서 보니까 아마 내쪽으로 공이 오니까 당연히 방해를 해야 되겠죠. 그런데 이 친구도 늦게 슬라이딩을 했겠죠. 온 몸을 내가 학다리처럼 딱 들고 있는데 온 몸을 덮쳐 버린 거예요. 이 정강이가 동강이 나버렸죠.

 

그 때 의료진도 갖추어져 있지 않는 등 좀 안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뭐 진짜 저를 만나면 팬들이 그러는데, 대전구장에 오셨던 분들이나 또 같이 뛰었던 그 때 선수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 소리가 " 빡 " 하는 소리가 굉장히 크게 났대요. 이 정강이의 굵은 그 뼈가 그렇게 되었으니까 제가 뭐 수술을 한 4차례 했는데. 대전구장에서 저는 지금도 기억하는데 (웃음) 앰블런스가 못들어오잖아요.

대전구장에, 그 옛날 구장에 앰블런스가 못들어오니까 들것으로 실어야 되는데 그 때는 의무반도 없었거던요. 그러니까 들것을 실는데 정강이 뼈가 부러져서 들렁들렁 하잖아요. 그 고통은 말도 못해요. 바로 옆에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딱 보니까 뼈가 딱 나오고, 그리고 근육이 서로 막 엉키니까 마취주사를 하는데 마취가 되질 않아요. 그래서 앰블런스 타고 그 때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와가지고, 고려병원 가서 수술을 하고, 하여튼 4차례 수술을 했어요.

 

1978년에 백호기 대회에서 대타로 나와서 홈런을 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게 야구 인생의 마지막 타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응용 감독이 참 재미있는게 지금도 사실 몸이 아파가지고 좋아하는 골프같은 것을 못쳐요. 왜그러느냐 하면 이 다리 굵기가 달라요. 이 굵기가 다르고 그 때 그 보신 장면이 뭐냐하면 그 때 제가 재활을 한다고 해도 그 때 이 왼쪽 허벅지가 오른쪽 허벅지의 반밖에 안됐어요. 4차례 수술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절룩절룩거렸어요.

그러고 일주일정도 슬슬 런닝하고 그러는데 김응용 감독이 재미있잖아요. 스코어 차이가 제일은행을 한 뭐 한데 " 야 허구연이 대타 나가 " 라고 그러잖아요. 이게 뭔소리인가 해가지고 (웃음) 그러고부터 게임 나갔는데 그 때는 우중간 쳐도 2루까지를 겨우 갔을거예요. 절룩절룩하면서.

 

▶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허구연


어떻게 보면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계속 야구를 해오셨는데 유니폼을 벗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실업야구 1차를 마치고 제가 그만뒀어요. 왜 그만뒀냐 하면은 지금처럼 프로팀 같으면 트레이너가 붙어가지고 이쪽 강화 훈련하고 재활을 시키는데 우리는 그런게 실업야구는 없잖아요. 계속 그러니까 허리가 아픈거예요.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 당신 이렇게 계속하면 나중에 불구된다. 운동을 그만두던지 한참 후에 해야된다. " 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거던요.

 

은퇴한다고 했을 때에 팀이나 김응용 감독 등 반대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응용 감독한테 그만둔다고 했더니. 그 때 내가 또 뭐 그 때 보셨다니까 제가 중심타선이었거던요. 절룩절룩거리면서 중심타선이었으니까. 김응용 감독은 " 야 너 다치기 전보다 더 잘 친다 " 고 그러면서, (웃음) 그러는데 의사는 하면 안된다는 거죠. 맞겠죠. 이쪽에 중심이 계속되니까 밸런스가 다 무너지니까.

그래서 김응용 감독한테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했죠. 김응용 감독도 놀랬던거죠. 야구를 그만두겠다니까. 그만두지는 말라고, 나는 그만두겠다고 하고 그 다음부터 야구를 안했어요.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잡을려고 하고 은행에서는 잡을려고 그러고 저는 안한다고 그러고.

 

만약 그 때 프로야구가 출범했다면 야구를 계속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때가 78년이니까 제가 야구를 할 때에 벌써 프로야구 이야기가 있었어요. 한번 모여서 재미동포인 홍모씨가 한다고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 때는 내가 다리가 너무 안좋았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하면 프로가 있었으면 내가 재활을 했겠죠. 그러고나서 야구를 어쩔 수 없이 실업야구니까 떠나게 된거고.

 

은퇴를 하더라도 한일은행에 남는 편한 선택(?)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 재미난게 한일은행에서도 이제 높은 분들이 와가지고 " 야구를 그만두드라도 은행은 다녀야 될 것이 아니냐 " 고 막 이렇게 많이 오셨어요. 저는 손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커잖아요. 주산을 놓아야 되는데 저는 상업학교를 나오지도 않았는데, (웃음) 주산도 못놓기에. 그래서 " 나는 은행 지점장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야구하러 왔기 때문에 전혀 관계없습니다. 괜찮습니다. " 하고 그만뒀어요. 그만두고 그 때 병원에서 4차례 수술을 하면서 병원에서 공부를 한거죠.

 

사실 허구연 위원이라고 하면 야구뿐만이 아니라 학업에도 열성적인 어떤 의미에서 문무를 겸비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저도 지금 생각해보면 특기자가 있었더라면 저라도 공부를 안했을거예요. 그런데, 경남중학교라는데 딱 들어가니까 졸업하는 선배들이 제가 입학할 때 졸업하는 선배들이 학생회장하고 대대장이 야구선수들이예요. 공부를 다 잘했어요. 그러니 당연히 공부를 잘해야 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잘하는 것보다 해야되는 거라. 그러니까 중학교 때 그런 기초가 되어 있어니까, 고등학교 때도 좀 하고 대학교 들어와가지고도 하고. 저도 고대 시험치고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어요. " 어떻게 이렇게 점수가 나올 수 있느냐 " 고 야구선수가 학부 들어갈 때도 그랬고, 그 다음에 학부 들어가지고 시험을 치잖아요.

저는 사실 공부를 다했어요. 사실 법대는 뭐에 대해서 논하라고 다 한자로 답안을 적어야 되요. 실제로 다른 운동선수들이 그렇다고 그래요. 저는 몰랐지만 교수들이나 감독하는 사람들이 그냥 누가 운동선수가 옆에서 컨닝을 하라고 보여줘도 한자를 못적어서 안되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한자로 많이 적어야 하니까. 저는 어쨌든 공부를 좀 하고 시험을 쳤고 그런거죠.

 

대학을 졸업하시고, 대학원에도 진학하셨는데.

 

-병원에서 내가 대학원 시험을 왜 쳤느냐 하면 병원에서 책을 보는데 야 이거 그냥 이렇게 책을 볼 것이 아니고 이 '오랜기간 병원에 있는 동안에 공부를 한번 해봐야되겠다. 그동안 안했던 공부를 하면서 대학원 시험을 한번 쳐보자.'고 생각해서 대학원 시험을 쳤는데 저는 될 것이라고는 생각안했어요. 솔직히 말해가지고 이게 어렵잖아요. 그래서 아무에게도 안알렸어요.

하루에 제가 병원에서 한 8시간에서 10시간 했을 거예요. 대학원 시험 공부를. 그래가지고 어쨌든 13명인가 뽑는데 제가 됐어요. 50 몇 명이 응시해가지고, 그러니 그 때 김상협 총장님이 돌아가셨지만 저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1학년 때부터 야구를 잘 하고 그러더니, " 허구연이가 대학원 시험을 치는데 학교에 이야기도 안하고 쳤어. " 라면서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주변에서 깜짝 놀랐겠습니다. 야구 선수가 대학원에 그것도 시험을 쳐서 약 5 : 1의 경쟁율을 뚫었기에.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 너가 국가대표급 선수고, 야구를 잘하고 그랬는데 고대 법대가 그런데가 아니다. 나중에 논문 심사는 학장이 직접이 하시겠다. " 면서 제 논문 심사는 학장이 직접 하셨어요. 그 정도로 엄하게 했어요. 그래서 공부 사실 좀 열심히 한거죠.

그런데 제가 공부를 잘 해서가 아니고, 다른 우리 법대 동기들이나 법대생들은, 잘 아시겠지만, 사시나 고시 공부하다가 병역을 연장하기 위해서 대학원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고, 물론 교수 지망생들도 있었지만 나는 죽어나 사나 그냥 대학원 시험 공부만 했어니까 된 것이지 공부를 그 친구들보다 잘해서 된 것은 아니죠.

 

그 당시에는 대학 교수 등을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죠. 대학원 나와가지고 저는 공부를 좀 하고 그 때는 프로가 없어니까 학자쪽으로 학교 교수를 좀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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