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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준희 샤우트풋볼210] 나치와 파시즘의 희생양이었던 '원더팀'

정민건TV 2011. 5. 2. 03:19

 

[ⓜ 한준희 샤우트풋볼210] 나치와 파시즘의 희생양이었던 '원더팀'

-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은 어디일까 (11) -

 

1.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
2. 미켈스의 아약스
3. 사키(&카펠로)의 밀란
4. 세베스의 무적 헝가리
5. 1970 브라질
6. 디 스테파노의 레알
7. '토털풋볼' 네덜란드
8. 베켄바워의 바이에른
9. '카테나치오' 인터밀란
10. 페이슬리의 리버풀
11. 플라티니의 유벤투스
12. '조가 보니또' 산토스
13. '더 머신' 리베르
14. 디 스테파노의 미요나리오스
15. ‘갈락티코’ 초기의 레알
16. ‘골든 트리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7. 크라이프의 ‘드림팀’ 바르셀로나
18. 구트만의 벤피카
19. 지코의 플라멩고
20. ‘마스터’ 텔레의 상파울루
21. 1948 잉글랜드


(지난 회에 이어...)

 

22. ‘원더 팀’ 오스트리아 (1931-1934)

- 토털풋볼의 시작은 오스트리아에서? -

 

- 오스트리아 축구가 최고의 전설적 시대를 이룩했던 시절. 들어 올린 트로피는 “중부유럽 선수권(Central European International Cup)” 한 개에 불과하나, 당대 최고(혹은 적어도 최고들 중 하나)로 꼽히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팀. ‘원더 팀’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 중부유럽 선수권은 유럽선수권(유로) 대회가 시작되기 이전인 1927년에서 60년까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스위스, 유고슬라비아 등 중부 유럽 팀들을 중심으로 홈 앤 어웨이 리그 형식으로 치러지던 대회. 오스트리아의 ‘원더 팀’, 비토리오 포초의 이탈리아, 헝가리의 ‘골든 팀(푸스카스, 코치슈, 히데쿠티 등)’ 등이 모두 이 대회가 배출한 우승 팀들임을 고려하면, 20세기 전반 축구 역사에서 적잖이 의미가 있는 대회다.

 

- 오스트리아는 1932년 중부 유럽 선수권 우승을 차지했지만, 1934년 월드컵에서 4강(준결승에서 개최국 이탈리아에 패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은메달(결승전에서 역시 이탈리아에 패배)에 머무르면서 안타까운 ‘무관의 제왕’ 계열 팀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오스트리아는 54년 월드컵에서 아쉬운 준우승에 그친 헝가리 ‘골든 팀’의 원조 격이라 할 만하다.

 

-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1931년 4월부터 1934년 5월에 이르기까지 30차례의 A매치를 통해 21승 7무 2패라는 괄목할 만한 기록을 남겼다. 이 가운데에는 대 스코틀랜드 5-0(스코틀랜드가 전력 누수가 있기는 했지만 놀라운 결과), 대 독일 6-0, 5-0, 대 스위스 8-1, 대 헝가리 8-2, 5-2 대 프랑스 4-0, 대 벨기에 6-1, 대 이탈리아 2-1, 4-2 등의 승리가 포함됨. 이 기간 중 오스트리아에 패배를 안겼던 두 팀은 ‘종가’ 잉글랜드(4-3으로 잉글랜드 승리)와 체코슬로바키아(2-1로 체코슬로바키아 승)가 전부였다.

 

- 1932년 12월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벌어졌던 잉글랜드 전에서 오스트리아는 비록 패하기는 했으나 내용 면에서는 당시 언론 모두가 오스트리아를 격찬. 특히 오스트리아의 빠른 패싱 게임과 기술적 우위가 찬사를 받았다.

 

- 이 당시의 오스트리아에 주목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전적도 전적이지만) 전술사적 중요성. 오스트리아는 전술사의 ‘다뉴브 학파(Danubian School)’ 축구의 정점을 찍은 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다뉴브 학파는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스위스, 네덜란드 등지를 떠돌면서 지도자 생활을 했던 잉글랜드 출신 지미 호건(1882-1974)의 영향 하에 발전한 대륙(특히 중부 유럽)의 축구 스타일. 잉글랜드와는 대조적인 스코틀랜드 식 짧은 패스 게임 및 기술 중시 마인드에 기반한다.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 등이 대표적이다.

 

- 전쟁 상황 등과 맞물려 잉글랜드 FA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듣기도 했던 지미 호건은 현대 축구의 전술적 발전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지도자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인 2-3-5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했지만 그것을 변형시켜가며 활용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축구의 모차르트’라고도 불린 중앙 공격수 마티아스 진델라(1903-39)를 미드필드 쪽으로 끌어내리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이는 앞의 샤우트풋볼 시리즈들에서 설명한 헝가리의 히데쿠티 혹은 팔로타스 역할 내지 ‘더 머신’ 리베르의 페데르네라, 디 스테파노 역할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진델라를 중심으로 빠르고 유려하게 돌아가는 오스트리아의 패스&무브는 ‘다뉴브강의 소용돌이’로도 불렸다.

 

- 오스트리아 축구의 전설적 시기를 이끌었던 감독은 휴고 마이즐(1881-1937)이었다. 마이즐은 전술사의 거장들인 잉글랜드의 허버트 채프먼,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포쪼와 교류하는 한편, 친구 지미 호건의 결정적 도움에 힘입어 스코틀랜드 식의 빠른 패싱 게임을 완성시켰다.

 

- 전체적인 스타일과 전술의 견지에서 ‘원더 팀’과 진델라, 마이즐과 호건은 훗날 세베스의 헝가리, ‘토털풋볼’ 네덜란드를 비롯한 현대 축구 곳곳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무방하다.

 

- 1934년 월드컵을 앞둔 상황에서 오스트리아는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다(당대의 또 다른 강자 우루과이는 이 월드컵에 불참). 그도 그럴 것이 오스트리아는 이미 같은 해 2월에도 개최국 이탈리아를 4-2로 완파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는 지역 예선에서 불가리아를 6-1로 가볍게 물리치고 본선에 올라 프랑스를 3-2, 8강에서는 헝가리를 2-1로 꺾고 4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4강전의 상대는 무솔리니 치하의 개최국 이탈리아. 불리한 기상 조건과 의심스러운 심판의 판정 속에 오스트리아는 0-1로 패했다. 오스트리아의 에이스 진델라는 이 경기에서 루이스 몬티의 거친 마크에 고생해야 했다.

 

-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된 이후 오스트리아는 축구에 있어서도 주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하지만 진델라는 독일 대표로 뛰는 것을 거부했고 오히려 강제된 친선 경기에서 독일 팀을 상대로 골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이듬해인 1939년 진델라는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는데(공식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사고사), 이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존재한다.